소설리스트

오늘만 사는 기사-164화 (164/170)

164. 검을 휘두르다.

막 조잡한 창을 든 놀이 달려드는 순간, 엔크리드의 검이 호선을 그리며 놀의 창대와 가슴팍을 한 번에 갈랐다.

깍! 퍽!

두 가지 소음이 동시에 울리며 놀의 가슴팍이 쩍 벌어졌다.

놀의 노란 털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나왔다.

마물 특유의 걸쭉한 검은 피다.

점박이 가죽 위로 엔크리드가 검을 휘둘러 묻은 피를 흩뿌렸다.

가슴이 벌어진 놀이 꾸륵꾸륵 입에서 검은 피거품을 물었다.

촤악!

뒤이어 채찍이 날았다. 막 쓰러진 인부를 향해 달려들던 하이에나 마수의 목이 잡혀 날아갔다.

붕- 하고 하늘로.

저 멀리 날아가 놈들 사이로 떨어졌다.

어느 집 지붕 위로 떨어진 놈이 깽 소리와 함께 한쪽 밑으로 굴러떨어졌다.

“루아는 연인이 부르는 이름인데?”

이름에 반응한 프록이 말했다. 언제 입었는지, 호심갑까지 입은 채다. 그녀의 눈이 놀의 사체를 스쳤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심장을 갈랐다.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뗐다.

농후한 경험을 지닌 프록인 게 여기서도 태가 났다.

그런 그녀였다. 정검식의 스승이자, 경험이 농후한 프록.

“야, 난 가 봐야겠다.”

“……어딜?”

그런 프록인데, 이 순간에 자리를 비우겠다고? 이렇게 갑자기?

“사교다.”

사교? 뭐라 묻기도 전이다.

꾸르르르륵.

루아가르네의 볼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 그건 분노, 회한 따위를 닮은 감정 표현이었으나.

엔크리드가 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루아가르네는 그대로 내달렸다. 쾅 하고 땅을 박차 앞으로 사라지듯.

그녀가 있던 자리로 흙이 분수처럼 솟았다.

프록의 몸이 잔상을 만들며 나아갔고.

그 앞을 하이에나 마수 몇 마리가 막았으나, 의미 없는 짓이었다.

프록은 녹색 선이 되어 내달렸다.

퍼버벅!

선 끝에 부딪힌 하이에나 마수 덩어리가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놈들이 붕붕 날아가는 걸 보니 현실감이 무척 떨어졌다.

괴력이 만든 묘기였다. 자잘한 상처를 무시하는 프록만이 가능한 짓이고.

그녀가 내달리는 곳으로 엔크리드도 시선을 집중했다.

뭔가 있긴 했다. 아니, 익숙한 놈이다.

사흘 동안 있으면서 보아온 놈이다.

그 도이치란 대장 곁에 졸졸 붙어 다니던 놈.

“캿!”

놀라 쓰러진 일꾼의 앞, 에스터가 섰다.

엔크리드도 다시 시선을 뗐다. 앞에 놀과 하이에나가 그득했다. 한가로이 저 멀리 뭐가 있다고 구경할 때도 아니요, 사교가 뭐냐고 물을 때도 아니었다.

“뭡니까? 이건.”

뒤에서 크라이스가 중얼거렸다.

모른다고 답할 틈도 없었다.

엔크리드의 앞, 놀들이 몰려오기 시작했으니.

“후.”

호흡을 밖으로 뿜어낸 뒤, 엔크리드가 왼발로 땅을 찍고 발목, 무릎, 허리를 틀어 내며 검을 뿌렸다.

중검식 회전 베기가 다가오는 놀을 후려쳤다.

뻑!

그대로 상체와 하체를 가르는 칼날에, 검은 피와 내장이 후두둑 떨어졌다.

반이 잘린 사체가 엔크리드 기준 좌측으로 날아가며 놀의 돌진을 주춤하게 했으나, 그것도 잠시였다.

시신을 넘어선 놀 중 하나가 전투 망치를 휘둘렀다. 그 뒤로도 수 마리가 덤벼든다. 혀를 내밀고 침을 흩뿌리며.

엔크리드는 방어구도 걸치지 않고 오롯이 검 한 자루만 든 채였다.

상황은 최악이었다.

“계속 옵니다!”

크라이스가 외치고 엔크리드는 다시금 호흡을 쪼개 검을 치켜들었다.

입을 열 틈도 없는 난전의 시작이었다.

* * *

세상에는 양보할 수 없는 게 있고 지나쳐서는 안 되는 게 있으며.

용서되지 않는 일도 있었다.

루아가르네에게는 사교가 그랬다.

마경에 자신들의 신이 산다는 미친 광신의 집단.

놓쳐서는 안 되는 복수의 대상.

그러므로 사교를 본 직후, 루아가르네는 눈이 돌아갔다.

심장이란 두 글자를 제 입으로 꺼내 말할 만큼 경험이 농후한 것도 맞았지만, 그녀는 프록이었다.

제 가슴에 끓어오르는 욕망과 욕구를 분출시키는 종족.

제 두 번째 연인을 죽인 놈.

그때 심장에 맹세했다. 사교를 보는 족족 죽여 버리겠다고.

루아가르네에게 이건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거였다.

일단 쳐 죽이고 돌아온다.

그게 목적이었는데.

발이 묶였다.

사교도 새끼가 생각보다 수단이 좋았다.

“미친 프록 새끼.”

쫓긴 사교도가 입가를 비틀었다. 비릿한 미소다. 보는 처지에서는 그리 보였다.

자신이 그의 유인에 휘말린 건가.

아니, 이들의 오만함을 꺾어 줄 때다.

다만, 당장 엔크리드에게 돌아갈 수는 없을 테니.

‘죽지 마라.’

그저 바랄 뿐.

* * *

루아가르네가 자리를 비운 직후, 마물들은 터진 둑에서 밀려오는 물살과 같이 몰려들었다.

엔크리드가 앞으로 나서서 시간을 벌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상대가 많아도 너무 많았다.

“구우욱!”

묘한 울음과 함께 작달막한 전투 망치가 제 머리를 노렸다.

끝에 쇠추를 단 무기다. 맞으면 아픈 것에서 끝나지 않으리라.

걸음을 뒤로 물리며 아래에서 위로 검을 휘둘렀다.

역방향 수직 베기다.

퍽!

엔크리드는 검으로 상대의 턱과 머리통 반을 세로로 쪼갰다.

이후 좌측에서 달려드는 하이에나의 머리통을 검 폼멜을 둔기 삼아 찍었다.

뻑!

빈틈을 노린 하이에나가 뛰어올랐다가 밑으로 퍽 떨어졌다.

손에 호두를 까부수는 느낌이 여실히 남았으니, 머리통이 깨졌으리라.

얼마나 잘 빠갰는지 확인할 틈도 없었다.

이번에는 우측이다. 번뜩이는 칼날이 셋이다. 칼날이 날아와 엔크리드의 몸에 제 쓰임새를 보이려 했다.

놀 새끼들, 손발도 더럽게 잘 맞았다.

엔크리드는 순간적인 기지로 검을 세 번 휘둘렀다.

막을 수 없다면 후려쳐 때려 내면 그만이다.

집중력을 발휘한 엔크리드의 눈이 빛을 토하고.

검격 두 개를 후려쳤다.

따당!

나머지 하나는 틈이 나지 않아 몸을 틀어 피하자, 웬 창날이 쑥 하고 배를 찔러 들어왔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검을 내리쳐 창대 중간을 후렸다.

뻑.

배를 찌르는 창은 저지했으나.

퍽!

그 틈에 어깨 위로 망치가 떨어졌다. 이건 또 다른 놈이었다.

차마 이건 막을 수 없었다. 감각의 날을 세운다고 해도 이런 상황에서 일일이 모든 공격을 감지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뒤쪽 사각에서 들어온 공격이었다.

맞았다고 멈추면 죽는다.

본능이 말했고, 육감과 직감이 말하니.

엔크리드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듯 무게를 실었다. 그러곤 검을 역수로 고쳐 잡고서 폼멜로 왼쪽 어깨 위를 찍었다.

퍽!

묵직한 일격에 뒤쪽 놀이 그억그억 하고, 신음 비슷한 울음을 토했다.

엔크리드는 그대로 뒤로 넘어지는 척하다가 벌떡 일어나선 오른쪽으로 검을 휘둘렀다.

막 달려드는 하이에나 마수가 있었다.

처음 목을 노린 놈이 과감했다면.

이후 덤벼드는 하이에나 마수는 집요했다.

이번에는 손목을 노린 놈이었다.

그리 달려드는 하이에나의 머리통을 쪼갠 직후.

위기에 빠진 엔크리드의 심장이 요동쳤다.

평정심, 대담함.

야수의 심장이 엔크리드의 정신을 붙들고.

그리 주변을 인지한 순간, 칼날의 감각이 오감을 넘어 육감을 자극했다.

동시에 시간이 느려졌다.

앞에 놓인 놀의 무기가 순차적으로 제 몸에 떨어진다.

창, 글라디우스, 전투 도끼와 망치.

점과 점을 잇는 선이 보였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선이라.

엔크리드는 선을 따라 검을 휘둘렀다.

퍽! 서걱! 드득! 퍽!

잘 갈린 칼날이 부리는 묘기다.

가장 앞에 있던 놀의 머리는 정수리 베기 끊어치기로.

두 번째 놈은 끊어쳐 위로 솟은 검을 부드럽게 아래로 그어 목덜미를 베고.

세 번째 놀은 순식간에 검을 들었다가 내리쳐 빗장뼈 부근을 가르며 심장까지 그었다.

네 번째 놈은 심장을 긋고 뺀 검을 뽑아, 사선으로 휘둘러 갈비뼈 일부와 뱃가죽을 크게 베어 냈다.

내장이 밖으로 기어 나와 흐를 만한 상처였으니, 당연히 죽은 목숨이라.

나머지 셋도 마찬가지였다. 전부 치명상이었다.

순식간에 네 마리를 죽인 셈이었다.

땅이 마물의 검은 피로 흠뻑 젖었다.

놀은 집요함의 대명사였다.

그들은 동료의 죽음을 이용해, 뒤에서 창을 내질렀다.

간간이 하이에나 마수가 집요함을 더했다.

손목을 노리는 것도 실패하자 허벅지를 노렸고, 그 또한 검을 재차 휘둘러 죽이자 이번에는 정강이를 노렸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놀의 숫자를 세는 게 의미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른 사람을 걱정할 여력조차 없다.

엔크리드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에 모든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니까, 베고 또 베고 찌르고 또 찌르는 것.

중검식의 기술이 훌훌 나오며 마수의 머리통과 몸통을 쪼갰다.

그렇게 십여 마리와 난전 속에서 사투를 벌였음에도.

주변 놀과 하이에나의 숫자는 여전했다.

아무리 평정심을 유지한다고 해도 숨이 차,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 막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놀 중에서 묘한 놈들이 나왔다.

다른 놈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놈들.

당연히 힘도 더 셌고, 상대하기 까다롭기도 했다.

대부분 엔크리드보다 덩치가 작은 놈들이었으나, 이런 별종은 엔크리드보다 더 컸다.

그중 한 놈이 다가와 위에서 밑으로 징 박힌 나무 곤봉을 휘둘렀다.

“구우우!”

‘못 피해.’

순간적인 판단, 할 수 있는 최선.

‘뛰어라.’

쿵!

아까부터 준비했으나, 함부로 쓰지 못하기에 아껴 뒀던 비기를 꺼낸다.

괴력의 심장을 꺼내 들어, 엔크리드는 서슴없이 검을 올려 쳤다.

꽝!

폭음이 터졌다.

무슨 폭발 마법이라도 터진 것처럼 변종 놀의 몽둥이가 위로 솟았다.

무기를 놓친 놀의 목을 향해, 엔크리드가 전신을 튕겨 내며 손을 뻗었다.

한 손 찌르기가 빛살이 되어 별종 놀의 목에 구멍을 냈다.

푸북!

찌르고 빼는 것까지 한 동작이었다. 그래야 했다. 검을 놓치면 유일한 무기를 잃는 셈이니.

이번에는 옆으로, 변종 두 놈이 달려든다.

아니, 다른 놀들까지도 다 노란 눈을 번들거렸다.

살기와 악의, 탐욕 어린 눈동자들.

그 눈동자를 상대로 무엇을 할 수 있나.

어떤 일이 가능한가.

모르겠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검을 휘두르는 것뿐, 그게 전부였을 따름이다.

* * *

에스터는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았다.

‘많아. 대규모 군집화.’

콜로니 규모가 다름을 말하는 단어였다.

도망가기에도 늦었다.

표범의 눈이 뒤를 훑었다.

인간들이 죽어가는, 마물이 자행하는 학살이 눈에 들어왔다.

“사, 살려!”

차마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글라디우스에 목이 찔리는 놈.

“끄아아악!”

산 채로 하이에나 마수 이빨에 물어뜯기는 자.

푹푹.

이미 쓰러진 시신 위로 수 차례 창을 찌르는 놀.

“구욱! 구욱!”

저열한 희열을 뿜어내는 마물이다.

모든 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인간은 도망갈 수 없었다.

목책은 높았다. 마물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이곳은 인간의 마을이 아니라 마물의 접시 위가 됐다.

도망갈 곳이 없다. 그러자 인간 일부가 망루로 달렸다.

높은 곳으로 가서 시간이라도 벌어 볼 셈으로 보였으나,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마물만 문제도 아니고.’

에스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망루 위, 무슨 전직 용병단이란 놈이 실실 웃으며 활을 쐈다.

올라서려는 인간을 겨누고, 퉁, 퍽.

화살에 맞은 놈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머리통이 깨진 채로 하이에나 마수의 먹이가 된다.

망루로 올라가려는 이들은 모두 같은 신세였다.

에스터는 불길한 감각이 머릿속을 수놓는 걸 느꼈다.

“캬아아아!”

그러함에 그녀는 제 능력을 일부 보였다.

괴력의 발길질로 놀 머리통 하나를 부수고.

앞으로 뛰어 하이에나 마수 몇 마리를 발톱으로 긋고 베고 찍었다.

퍽! 푹! 끄드득!

두개골을 가르는 발톱이다. 에스터도 날뛰었다. 그렇게 십여 마리를 죽였음에도 웨이브는 끝나지 않았다.

소수 인원으로 해결할 콜로니가 아니다. 재앙급 콜로니였다.

왕국 내에 큰 문제를 초래할 게 분명한 비정상적인 형태의 마물 콜로니.

‘누가 수작을.’

에스터는 주문 세계를 가진 마법사.

그녀의 직감은 이게 누군가의 의도로 생긴 일임을 알았다.

그렇다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긴 했다.

에스터는 생각하면서도 쉴 새 없이 움직였고, 곧 한계를 실감했다.

많아도 너무 많다.

버티면 죽는다. 도망가야 했다. 그녀의 판단은 그렇다.

활로는?

“앞, 앞을 뚫어야 합니다. 대장!”

크라이스, 왕눈이의 외침이다. 어느새 이 친구도 숏소드 하나를 뽑아 들었다.

재주도 좋은 친구다.

숏소드 한 자루로 어찌 살아남았나 했더니, 제 대장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곳 근처다.

딱 경계선쯤에서 버텼다.

주변 놀은 위협적인 존재부터 노렸다.

그러니까 엔크리드.

에스터에게 필요한 사람.

그는 무슨 전설 속 영웅처럼 싸웠다.

다가오는 놀을 상대로 검 한 자루로 미친 듯이 베고 찌르고 죽였다. 리캇소 부근을 쥐고 하프 소드 파이팅하듯, 놀의 머리통 하나를 힘으로 부수는 건, 그야말로 장관이다.

가히 입지전적인 무력이었다.

여유가 있었다면, 위험이 적었다면, 가히 놀라서 감상할 상황이었으나.

‘안 좋은데.’

주문 세계를 가진 인간 에스터라면 모를까.

표범의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같이 싸워 주는 거? 그건 같이 죽어 주는 거다.

에스터는 주변에 있던 오두막 지붕 위로 올라갔다.

그대로 기척을 죽이고 남자를 지켜봤다.

그녀는 이제 지켜보고자 했다.

‘복수는 해 준다.’

그리고 새삼 각오도.

생전 누구를 위해 이런 마음을 갖지 못했으나.

에스터는 그걸 인지하지도 못하고 복수를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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