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홀로 선 인간 하나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이냐
회피의 감이란 무엇인가.
그건 단순한 회피 기술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묘한 게 많았다.
엔크리드는 렘의 볼에 생채기를 남겼으나.
그 전에 제 소대원이 그리 다친 걸 본 적이 있던가?
자신을 상대할 때도, 전장에서도 그들은 절대 쉬이 다치지 않았다.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일부러 당해 주는 게 아니라면 그들은 어지간하면 부상을 모르고 싸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회피의 감.’
단순히 피하는 기술이 아님이다.
어렴풋이 잡힌 게 있었으니, 지금부터 하나씩 뜯어 내 알아볼 참이다.
달려드는 놀을 상대함에, 엔크리드는 허공에 손을 흩뿌렸다.
잘 모르는 사람, 특히 크라이스가 보기에는 그냥 허공에 손을 휘두른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투두두둥.
손을 시위로, 가슴을 발사대로, 전신 탄력을 이용해 단검을 던지니.
빛살이 된 단검이 날아오는 하이에나 마수의 머리통, 놀의 목과 머리통 따위에 꽂혔다.
뽑아서 던지는 동작이 무섭게 빨라,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수준이다.
그동안 투척 기술이라고 늘지 않았을까.
이 또한 늘었다. 고립의 기법, 근력의 단련, 이후 제 몸을 다루는 능력이 골고루 발달한 덕이었다.
단숨에 세 마리가 죽는다. 달려오던 속도 그대로 시신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거기에 다른 놀과 하이에나가 걸려 넘어지고.
걸려 넘어져 뭉텅이가 된 것을 또 다른 놀과 하이에나 마수가 밟고 넘어왔다.
타닥, 투닥하는 발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사교!”
루아가르네가 옆에서 채찍을 꺼내 휘두르다가 똑같은 외침을 토한 뒤, 뛰어나갔으며.
“젠장! 이게 무슨!”
놀란 크라이스의 목소리도 들렸다.
“캬아!”
에스터도 마찬가지로 옆을 지켰고.
“그, 그, 으아아아.”
오줌 싸러 나온 인부의 외침까지.
똑같은 오늘이다.
하지만 달리 맞이한다. 엔크리드의 손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두 번째 오늘이었다.
이전의 오늘과는 조금 달라 여유가 있었다.
무차별적인 마물의 파도가 달려들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
가진 단검을 남김없이 뿌려 냈다.
삐이익!
휘슬 대거고 뭐고 간에 전부를.
그렇게 달려드는 마물과 마수를 두 자릿수 단위로 죽였으나.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 사실도 있었다.
많았다. 마물과 마수의 무리가 다시금 파도가 된다. 사체를 뛰어넘은 놈들이 엔크리드를 덮쳤다.
“대장 앞!”
크라이스가 외쳤다. 챙하고 자신도 숏소드를 뽑으며 하는 외침이다.
엔크리드는 호흡을 조절했다.
이전의 오늘에서 깨우쳤던 것, 목숨을 걸고 싸웠기에 느낄 수 있는 것.
감각의 날을 세운다. 육감과 직감의 영역 속.
놀의 공격을 순차적으로 받아 내고, 쳐 내고, 빈틈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다른 건 몰라도 엔크리드는 체력만은 자신 있었다.
거기에 그동안의 경험이 붙으니, 무슨 마물과 마수를 갈아 버리는 압착기 같았다.
콰드드득!
목이 떨어져 나가 죽는 놈.
찔려 죽는 놈.
그사이 따당! 땅! 퍽! 따위의 쇳소리와 파육음이 엇갈리고.
그걸 지켜보는 크라이스는 절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괴물인가.’
렘이나 다른 소대원을 보고 느낀 감상이 여기서도 튀어나왔다.
그만한 움직임이었다.
전부 막고, 전부 쳐 낸다. 이후 휘두른 검에는 놀과 하이에나가 맥없이 죽어 나갔다.
크라이스가 감동하든, 감상하든, 놀라든, 헛소리를 뱉든.
엔크리드는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아니, 절로 유리된 세계에 들어섰다.
주변에 신경을 끊고.
오롯이 검만이 남은 세계.
시간이 느려지며 적과 나, 검과 세상, 예민한 직감만이 남는다.
몰아치는 마물의 파도 앞, 홀로 선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
엔크리드는 검을 휘둘렀다.
그렇다고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다시 정오, 햇살, 이전보다 부상은 덜했지만.
이번에는 양쪽 허벅지를 크게 베였다.
빌어먹을 글라디우스 두 자루를 피하지 못했고.
크라이스의 시신은 이번에는 찾을 수도 없었다.
엔크리드는 반복된 오늘도 똑같은 시간만큼 버텼다.
‘저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에스터가 어느새 오두막 지붕 위에 올라선 게 보였다. 그 파랗고 큰 눈망울에 어떤 감정 같은 게 엮인 것 같지만, 그걸 알아볼 시간도 여유도 없으니.
“구우욱!”
하이에나 특유의 울음, 그사이 나서는 콜로니의 리더.
마물의 대장이다.
전과 같았다. 허벅지가 당해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 피하는 게 더 곤란하니, 전보다 나쁜 상황이라고 해야 맞을지도 몰랐다.
다만, 엔크리드는 고작 하루 만에 실력이 느는 걸 확신했다.
가혹하고 참혹하나, 감각의 날은 더 서게 되니.
“또 보자.”
알아듣지 못할 말을 놀에게 던지며, 그대로 독에 발광하며 죽음.
암전, 뱃사공은 나오지 않았고 새로운 오늘이 시작됐다.
이번에는 루아가르네에게 괜한 걸 묻지 않았다.
어떻게 해도 떠날 사람이다. 호기심에 물어 괜한 짓을 할 필요는 없겠지.
왜 이곳을 지키지 않고 떠났냐는 물음만큼 허무한 건 없을 것이다.
돌아오라 말해도 의미는 없을 것이다.
그리 돌아올 거면 애초에 떠나지도 않았을 것.
뛰쳐나간다는 건 그녀 자신에게 그 일이 더 중요한 거겠지.
대신.
절그럭절그럭.
“잠 깨우는 방식이 독특한 것 같은데?”
장비를 챙기며 잠을 깨우긴 해야겠다.
“날이 좋습니다. 일찍 일어나면 좋을 듯해서.”
“아우. 새벽입니다, 새벽. 달도 안 사라졌어요.”
옆에서 크라이스가 불평을 내뱉으나, 무시.
다시금 땀을 흘린다.
이번 하루는 짧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훈련에 투자할 시간이 짧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전투를 훈련과 단련의 장으로 삼으면 될 뿐이다.
엔크리드는 그렇게 했다.
중독의 고통, 끔찍한 통증과 괴로움?
견디면 되는 문제다.
기실 통증을 잊게 해 주는 건 무엇인가.
기어서라도 나아가는 성장의 희열이 뒤따르니.
무엇보다 지금은 체감상 기는 게 아니라 걷는 듯했다. 조금은 빠른 걸음, 그리 나아가는 기분이 드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할까.
‘이번에는 조금 더.’
도전의 연속이라고 해야 할까.
엔크리드는 자신만의 목표를 세웠다.
단순하지만 확실한 목표였다.
반복되는 오늘, 다치는 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루는 것.
처음에는 고작 몇 번의 전투 끝에 어깨를 맞았고.
다음 날에는 양쪽 허벅지를 베였으며, 이후에는 창날에 복부를 맞았다.
든든한 갑옷 덕에 골로 가진 않았지만, 이후 반응이 조금만 늦었다면 치명상이었을 수도 있었다.
‘부족하고 또 부족하다.’
자기 객관화였다. 엔크리드는 이제까지의 경험을 통해 자신의 부족함을 알았다.
“소대장 형제님, 무투술은 반복해서 몸에 익히는 게 최우선입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기억하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 구르시지요.”
아우딘의 말이 떠올랐고.
“보는 순간, 몸이 반응하면 됩니다. 그럼 피할 수 있습니다. 게으름뱅이의 이상한 집중력 기술 따위는 없어도 됩니다.”
작센의 말이 떠올랐다.
본래라면 동체 시력과 감각을 통해 느끼는 순간, 몸이 반응하는 협응력을 올리는 훈련을 엔크리드는 다른 방식으로 답습했다.
‘모든 상황에서 근육이 기억하게 하면 어떨까.’
그렇게 했다.
반복하는 오늘 속, 마물의 파도 안에서.
세 번째 오늘, 네 번째 오늘, 다섯 번째 오늘.
모든 오늘에서 발악했고, 또 발악했다.
그렇게 스무 번이 넘는 오늘이 지나간다.
훈련은 당연하나, 뱃사공이 말한 마물의 파도가 벽이라면 넘을 엄두가 나지 않을 만했다.
당장 기사가 된다면 모를까.
또는 그에 준하는 병력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엔크리드는 이런 쪽에 신경을 뺏기지 않았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쌓을 뿐.
잡념은 없었다.
반복되는 오늘, 해야 할 일을 해나갈 뿐.
처음에는 열 마리 안쪽, 스무날이 지나자, 검을 들고 놀 한복판에서도 숨 수십 번 고를 시간 동안 전부 막고 피했다.
“와.”
도망가야 할 인부가 놀라서 입이 떡 벌어질 만한 묘기였다.
그렇다고 해서 놈들 사이를 헤집듯 뛰어다니며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을 수준은 될 수 없었다.
그럼 어떻게 하나, 반복할 뿐이다.
서른 몇 번의 오늘이 지나고.
다시금 마흔 몇 번의 오늘이 지났다.
매번 독에 당하다 보니, 통증에 치가 떨릴 지경이 됐다.
그렇게 요령도 생겼다.
독에 당해도 버티고 검을 휘두르는 거다.
중독 직후 놀 무리 사이로 난입하면 어떻게 되겠나.
사방에서 칼날과 망치, 도끼, 창날 따위가 날아드는 거지.
퍼버버벅.
난도질이 중독으로 말라 죽는 것보다는 몇 배는 나았다.
그리 놀과 하이에나 사이에서 목숨을 대가로 구른다. 구르고 또 굴렀다.
그리 오늘을 보내는 사이사이, 사교에 관해 물을 기회도 있었다.
“마경 성지교에 대해 들어 보셨습니까?”
반쯤 의도한 질문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오늘, 주어진 시간이 짧으니 매일 새로운 걸 물을 도리밖에, 그걸 기준으로 삼았다.
열흘에 한 번, 사교에 관해 묻는 거로.
그렇게 날짜를 셌다.
뭐, 기왕 묻는 거 의미 있는 질문을 던졌고.
“썩어 빠진 광신 집단이지.”
루아가르네는, 프록답게 참지 않고 증오를 보였다.
그건 증오였다. 하얗게 부푼 볼의 중심이 새빨갛게 보일 만한 증오.
“다 죽여 버릴 거다. 보이는 족족.”
왜 튀어 나갔나 했더니.
“그렇게 맹세했다. 내 심장에.”
심장이란 두 글자를 꺼낼 때의 루아가르네는 경험 많은 프록다웠다.
조금 주춤했으나, 결국 말을 하긴 했으니.
그것만으로 이 여자가 얼마나 대단한 프록인지 알 수 있었다.
마경 성지교.
이게 공식 명칭인지는 모르겠으나, 하여간 인간이 답습할 수 없는 마물의 근원지에 자신들의 신이 유폐되었다고 믿는 미친 새끼들이었다.
사교 중의 사교.
대륙 제일의 이단이다.
실제 그들은 인간을 제물 삼아 이상한 소환식도 쓴다고 했다.
그 소환으로 나오는 것? 마물이었다. 가끔 악령도 부르고.
마물도 다 같은 마물이 아님에.
대륙에서도 꽤 유명한 마물이 있었는데, 그게 소환식의 결과라는 말이 팽배하기도 했다.
용병계에서 떠도는 헛소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루아가르네가 그게 그저 소문이 아님을 확인해 줬다.
“샐러맨더 알지?”
모를 리가 없는 마물이었다.
전신 피부에서 불꽃을 흩뿌리는 것도 부족해 불을 토해내는 마물의 별명이니.
“그거, 그 개자식들 작품이다.”
소문은 진실이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거든.”
루아가르네가 증인이었다.
그래서 이게 중요하냐고?
그건 아니었다.
그저 오늘을 반복하며 기억하는 이정표일 뿐.
다시금 시작된 훈련과 단련이다.
이전의 오늘에서 했던 실수를 곱씹는 과정도 있었다.
그렇게 쉰 번이 넘어갈 때쯤이었다.
‘너무 몰아쳤다.’
체력에 자신이 있다고 초반부터 가진 모든 걸 쏟아 냈다.
‘체력 분배도 다시.’
다수의 포위에서 싸우는 법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것들도 자연스레 몸에 뱄다.
놀의 노린내라면 치가 떨릴 날들이 흘러갔다.
엔크리드는 여든아홉 번의 오늘을 반복했으나.
여전히 상처 하나 없이 리더의 앞에 설 수는 없었다.
아니, 다치지 않으면 리더란 놈은 나서지 않았다는 게 맞는 말일 터였다.
정오까지 버티던 게 이제는 저녁까지로 늘었다.
그래도 변하는 건 없었다.
노을을 보며 죽을 수 있는 것 외에, 죽는다는 건 변함 없다.
“너, 음흉하네.”
다쳐야 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어야만 리더가 나왔다.
가령 배에 구멍이라도 하나 나든지.
아니면 발목 쪽이 반쯤 잘려 덜렁거리든지.
당연히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
아흔여섯 번의 오늘에서 리더의 단검에 목숨을 뺏긴다. 발악의 끝은 죽음, 정해진 운명 같은 나날들.
반복되는 시간 속, 자연스레 놀의 습성이 습득되기도 했다.
‘놀은 상체가 길고, 다리가 짧다.’
마물의 체형을 통해 배우는 것.
발은 느리나, 손은 빠르다.
인간의 무기를 다루나, 형식은 없다. 냅다 후려갈긴다.
가진바 힘은 일반 성인 남성 수준이나, 다리가 짧은 탓에 생각보다 돌진 속도가 느렸다.
사각(死角)에서 공격하는 걸 즐기며 근접전에 들어서면서 서슴없이 물어뜯는다.
물리는 건 최대한 피하는 게 맞았다.
치악력이 남달랐다.
하이에나도, 놀도.
그리 물리면 괴력의 심장을 발동해 뜯어 내는 게 아니라면 잘 뜯기지도 않았다.
여기에 더 배우는 것도 있었다.
‘검은 두 자루.’
두 개의 검에 괴력의 심장까지 발동하면.
그 한순간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까지 가능했다.
“다 썰겠는데요.”
이리 크라이스가 여유를 부릴 정도로.
문제라면 지속력이었다.
체력 안배를 아무리 잘해도 이걸 끝내 지속할 수는 없었다.
다시 반복.
피하고 또 피한다.
본래 회피의 감은 어느 정도 재능의 영역이었다.
이걸 작센은 훈련으로 대체했다곤 하나, 당연히도 되는 놈만 됐다.
엔크리드는 그걸 하나하나 몸에 새기는 거로 해결했다.
그러니까.
‘근육이 기억한다.’
눈으로 보고 몸으로 반응하는 모든 걸 수 없이 반복함으로 근육에 새겨 버렸다.
머리가 아닌 몸에 새겨진 회피기가 된다.
그걸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보고 곧바로 반응하는 게 가능했다.
몸의 협응력이라는 게 제대로 몸에 자리 잡은 거였다.
보는 순간 피하고 반응하고.
그게 가능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