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벌써 침공 이벤트가 시작된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다.
아무리 세계선이 꼬였다 하더라도 아직은 너무 이르다.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애초에 칼루스 아카데미는 거대한 결계가 감싸고 있어서 외부인은 쉽게 들어올 수 없다. 게다가 이렇게 기숙사 입구에서 대놓고 노릴 만한 상대도 몇 없다. 그렇다면…….
“동급생……?”
쿵!
그때 거대한 무언가가 기숙사의 옥상에서부터 지면으로 뛰어내렸다. 그와 동시에 자욱한 흙먼지가 시야를 가린다.
“뭐, 뭐지?!”
잠시 후 흙먼지가 걷히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마치 악마와도 같은 괴생명체였다.
양의 얼굴과 뿔.
호랑이의 형상을 한 거대한 몸집.
거기다 온몸을 감싸며 일렁이고 있는 검은 기운.
난 그 흉측한 외형에 공포심보다는, 오히려 어디에서 본 듯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저건… 제페토의 사역마잖아?”
아직 입학 초라서 그런지 내가 게임 속에서 봤던 것보다는 크기가 조금 작긴 했지만, 눈앞에 있는 거대한 괴물은 분명 제페토 골드버그의 사역마였다.
“그런데 저 녀석이 날 공격한 거야?”
아마도 볼의 상처는 녀석이 뿜은 무언가에 긁힌 상처인 듯싶었다. 눈앞의 녀석은 명백히 나를 적대하는 것이다.
“왜……? 어째서?”
이건 ‘아카마’에는 없는 이벤트였다. 원작에서 제페토는 제이드와 자주 트러블이 일어나긴 해도, 제로와 엮이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나름대로 비중 있는 악역답게, 제이드를 플레이할 때도 상대하기 버거운 녀석이다. 그런데 지금 그 제페토 골드버그가 나에게 명백한 악의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내 혼란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갑자기 눈앞에 뜬 것은 예의 그 선택지였다.
[▶ 제페토에게 복종을 의미하는 표시로 바닥에 엎드려 정수리를 보인다.]
[▶ 제페토에게 항복을 의미하는 표시로 살려 달라고 울고불고 애원한다.]
[▶ 제페토와 싸운다.]
선택지의 내용을 확인한 순간, 나는 또다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게 이 선택지들은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내용만 나오는 듯싶다.
“복종? 항복?”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녀석이 나를 노릴 만한 이유도 모르겠다.
다만 저 괴물을 상대할 방법은 저것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이미 계획하고 있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거지…….”
나는 눈앞에 있는 ‘제페토와 싸운다.’ 선택지를 망설임 없이 선택했다.
그러자 또 다른 시스템 창이 눈앞에 나타났다.
〈서브 이벤트〉
[동급생의 습격]
* 달성 조건: 제페토와의 전투에서 승리한다.
* 제한 시간: 30분
* 실패 조건: 전투 패배, 사망
* 보상: 마법 주문서(???)
방금 전 선택의 영향으로, 부수적인 이벤트가 발생한 것으로 보였다.
“보상이 마법 주문서라고?!”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보상 내역이었다.
마법 주문서는 사용 시 보유하고 있는 마법을 강화시켜 주는 치트 아이템으로, ‘아카마’에서도 얻기 매우 까다로운 아이템이었다.
“그 마법서를 준단 말이지…….”
매우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잠시 후 시스템 창은 홀연히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와 동시에 가만히 있던 괴물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도 선택지를 고르기까지 시스템적으로 기다렸던 모양이다.
피슈욱!
또다시 괴물은 입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내뱉었다.
“으아아앗!”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괴물의 비수.
나는 몸을 풀숲으로 던져 가까스로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기숙사 입구에서 대놓고 공격하는데, 어째서 아무도 관심이 없는 거냐고.”
불만은 잠시, 나는 땅을 짚고 몸을 일으켜 세운 뒤 빠르게 기숙사 뒤편으로 뛰기 시작했다.
나는 저 괴물을 알고 있었다.
그야 게임에서도 제페토 골드버그와는 지독하게 엮였으니까.
저것의 정체는 바로 사흉수(四凶獸) 중 하나인 ‘도철’.
비록 내가 알던 녀석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지만, 강함은 여전했다. 소환계 영웅의 가문인 골드버그 출신답게, 제페토는 벌써 저런 놈을 다룰 수 있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의 내 수준으로는 절대 저 녀석을 이길 수 없다.
내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거라고는 매직 미사일뿐.
아무리 매직 미사일을 날려 봤자 저 괴물에겐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답은 제페토를 직접 공격하는 것.
소환계 마법사를 상대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마법사의 위치를 찾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 숨어 있냐, 이 말이지…….’
피슉!
기숙사의 모퉁이를 돌아 달려 나갈 때, 뒤에서 매섭게 쫓아 오는 도철이 또다시 철의 비수를 내뱉었다.
푸욱!
아슬아슬하게 스친 뒤, 멀리 보이는 나무에 박힌 기다란 송곳. 두꺼운 나무의 줄기는 송곳에 의해 반쯤 뚫려 버렸다.
‘저런 걸 직격으로 맞았다간 곧바로 저세상행이겠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렇게 연속으로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닌지, 계속해서 날아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일단 위치를 찾아야겠는데…….’
나는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자세를 낮추고 몸을 숨겼다.
그러자 달려오던 도철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도철은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따라서 목표물을 스스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오로지 소환사의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괴물이다.
녀석이 움직이지 않는 걸로 보아, 역시 지금 위치는 소환사에게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도대체 어디 숨어 있는 거야, 이 자식.’
나는 힐끔 주위를 살피며 제페토의 위치를 탐색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위쪽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레 같은 게 잘도 숨었구나. 그래. 그렇게 나와야 재미있지. 어디, 좀 더 꿈틀대 봐라!”
목소리가 들려오는 위치는 바로 기숙사의 옥상.
제페토 녀석은 그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벽에 딱 달라붙어서 녀석의 시야에는 보이지 않겠지만, 이대로면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나는 녀석의 위치를 파악하자마자, 침착하게 주문을 외웠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
점점 몸 주변을 감싸는 백색 구체들.
그 빛이 커지자, 이내 제페토가 내 위치를 발견한 듯싶었다.
“거기 숨어 있었구나, 쥐새끼. 숨을 거면 좀 더 제대로 숨었어야지. 네놈은 전투의 기본이 안 돼 있다. 그게 네 녀석의 수준이라는 거다!”
녀석의 히죽히죽하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조금 열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한 머릿속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어째서 나한테 이런 짓을 하는 거지? 게다가 이렇게 대놓고? 이건 명백히 범죄잖아?’
그래도 제페토가 멍청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은 다행이었다.
“멍청한 녀석, 그렇게 대놓고 몸을 보여 주는 소환사가 어디 있냐? 너야말로 기초부터 다시 배우는 게 좋겠는데.”
나는 실컷 제페토를 비웃어 준 뒤, 다시금 뛰기 시작했다.
내 말에 제페토는 살짝 약이 올랐는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 게 멀리서도 느껴졌다.
“이… 이 하찮은 평민 따위가, 감히?!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는구나? 아까부터 운이 좋아서 피하는 거 같냐? 아무리 평민이라도 까딱하면 죽일까 봐, 봐주고 있었더니…….”
“해 보든가, 멍청아.”
“뭐, 뭐라고?!”
그러고 보니 어쩐지 도철이 뛰어오는 속도가 느리다 싶었다. 내가 저 괴물보다 빨리 뛸 수 있을 리도 없었고.
역시 제페토는 날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기 위해 봐주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게 녀석의 가장 큰 패인이겠지만.
“더 이상은 안 봐준다! 죽어도 난 모르는 일이다!”
열받은 제페토는 도철의 속도를 높였다.
그리고 거대한 괴물은 미친 듯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흘끔 뒤를 돌아보니, 제페토가 흥분한 틈을 타 거리를 꽤 벌려 놨음에도 순식간에 근접해 오고 있었다.
‘이제, 곧이다.’
어느덧 나는 또다시 모퉁이를 돌아 기숙사의 뒤편에 도착했다. 달리면서 주문을 계속 외운 탓에 내 주변에는 꽤나 많은 백색 구체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기숙사 뒤편의 중앙 부근에 도착한 나는, 달리는 걸 멈춘 뒤 제자리에서 뒤로 돌았다.
쿵!
쿵!
쿵!
가까이서 느껴지는 땅울림.
골목길을 꺾어 커브를 돌은 괴물의 모습이, 이내 내 시야에 들어온다.
크르렁!
도철은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내 모습이 보이자마자, 순간 자세를 낮추더니 땅을 힘껏 차서 하늘 위로 도약했다.
순식간에 내 얼굴에 드리우는 거대한 실루엣의 그림자.
그리고,
“어, 어라?”
잠시 후, 옥상에서 당황한 제페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녀석의 당황스러운 목소리를 듣고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야 도철이 도약하던 자세 그대로 하늘에서 굳어 버렸으니까.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했네. 너, 이 정도면 엄연히 살인 미수야.”
“어, 어떻게 된 거냐? 이럴 리가 없는데? 왜 안 움직이는 거냐고?!”
물론 내게 대답해 줄 의무는 없었다.
“그럼, 그대로 갚아 줘야겠지?”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펑!
내가 외운 마지막 주문을 신호로, 주변을 맴돌던 백색 구체는 일제히 제페토가 있는 옥상을 향해 날아갔다.
“으, 으아아아아!”
콰아앙!
허공에 정지해 있던 도철이 옥상에서 들린 굉음 이후에 사라졌다. 매직 미사일에 맞은 제페토가 제대로 혼절한 모양이다.
“그러게, 왜 덤벼 가지고.”
승리를 확신한 나는 그제야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눈앞에는 이벤트에 성공했다는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띠링―
[서브 이벤트 ‘동급생의 습격’을 완료하였습니다.]
[보상 ‘마법 주문서(???)’를 획득하였습니다.]
나는 ‘마법 주문서’라는 말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마법 주문서는 애초에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플레이어를 위한 게임용 아이템일 뿐.
보유하고 있는 마법 중 하나의 특성을 개화하고 성능을 향상시켜 주는 엄청나게 사기적인 효과로, 게임 속에서도 얻기 까다로운 초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그걸 이렇게 쉽게 보상으로 주다니?
그런데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라……? 잠깐만… 어차피 주문서를 얻게 되어도 마법이 없는 거 아닌가……?”
게임에서야 워낙 주인공이 사기스러운 마법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법을 강화시켜 주는 주문서가 매우 유용했으나,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지금의 나로서는 쓸모없는 거나 다름없었다.
아니, 사용할 수 있는 마법이 하나 있긴 했다.
“…설마 매직 미사일에 주문서를 써야 되는 건 아니겠지.”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보상 ‘마법 주문서(???)’를 감정하였습니다.]
* 감정 결과: 마법 주문서(더블 캐스팅)
[‘마법 주문서(더블 캐스팅)’을 사용하시겠습니까?]
[▶ 사용한다.]
[▶ 버린다.]
“…….”
나는 시스템 창을 보자마자 할 말을 잃었다.
더블 캐스팅.
마법을 두 번 사용할 수 있게 해 주는 사기적인 강화 효과.
사용 시 주문을 한 번만 외워도 될뿐더러, 소모하는 마나량도 한 번이면 충분하게 만들어 주는 거의 1티어급 주문서 효과였다.
예를 들어 ‘메테오’라는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리는 마법에 이 주문서를 사용하게 되면, 도시 두 개를 날릴 정도의 위력으로 증폭되는 것이다.
“내가 사용해 봤자, 매직 미사일을 두 번 날릴 뿐인 거잖아…….”
저 더블 캐스팅 주문서는 ‘아카마’ 게임 내에서도 100회차 중에 한 번 얻을까 말까 한 초레어 아이템인데, 이걸 이렇게 허무하게 사용해야 한다니…….
게다가 ‘사용한다.’, ‘버린다.’ 외에는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하겠습니다.”
어쩌겠나. 선택지에 거역할 수 없는 몸인데.
나는 눈물을 머금고 ‘사용한다.’ 선택지를 터치했다.
“하하…….”
입에서 힘없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리고 나는 조금 전 얻은 주문서의 위력을 알아보기 위해, 매직 미사일을 사용해 보았다.
「마지아 미실레(magía míssĭle)」
그와 함께 생성되는 두 개의 백색 구체.
피유우웅― 펑!
기숙사의 벽면에 힘없이 날아가더니 작은 폭음과 함께 터진다. 나는 그 모습에 실성하고 말았다.
“우와… 매직 미사일이 두 개가 나간다……!”
아마도 마법 주문서를 고작 매직 미사일에 바르는 녀석은 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조금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가만… 계속해서 주문서를 바르게 되면 배수로 늘어나게 되는 거 아닌가? 그럼 가능성이 있을지도?”
게다가 이렇게 초반부터 마법 주문서를 주는 걸 보면, 나중에도 퍼 줄 가능성이 컸다.
“그래도 마냥 답이 없는 건 아니네.”
처음 이 세계에 오고 나서, 멸망을 막으라는 둥, 구원자라는 둥, 뜬구름 같은 소리에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했으나, 이제는 조금 길이 보이는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