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78화 (78/175)

78화

* * *

제로가 연구실을 떠난 후.

랑켄 슈타이너는 구체의 분석에 매진했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이올렛은 따분하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거, 언제 끝납니까?”

이올렛이 기다리다 지쳐 랑켄을 불러 봤지만, 대답은 없었다.

애초에 저 인간은 하나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성격이라 사실 기대조차 하지 않기는 했었다.

‘슬슬 배고픈데.’

이올렛은 다시금 턱을 괴고는 구체 분석에 몰두하는 랑켄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한참 뒤,

- 이거, 큰일 날 뻔했군.

랑켄이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이올렛은 별 관심이 없었는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끝났어요?”

그런 이올렛의 태도에 랑켄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너, 이게 뭔 줄 알고 그러냐?

“뭔데요.”

- 이건 일종의 아공간 이동 장치다. 인벤토리랑 비슷한 원리의 도구지.

“에… 사람을 넣을 수 있는 인벤토리라는 겁니까?”

- 그런 셈이다. 단, 마나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마기로 이루어진 아공간이다. 게다가 설치한 시점으로부터 점차 그 마기의 농도가 짙어져 더욱 견고해지는 부류의 마도구다.

누군진 몰라도 이걸 교직원실과 아우레인의 기숙사에 설치한 녀석은 아카데미의 전투 인력을 배제하려는 심산으로 보였다.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쉽게 교수진들을 제거할 수 없을 테니까, 아예 아공간으로 보내 버리는 방식.

다소 치밀한 방법이라 볼 수 있었다.

- 게다가 이 구체에는 원격으로 제어하는 스위치도 연결되어 있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범인은 외부인. 아마도 범인은 그 소년이 말했다시피 ‘블랙잭’이라는 단체인 거 같군.

어떤 경로로 이 마도구를 설치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강력해지는 위험한 마도구를 조기에 발견한 게 정말 다행이었다.

- 그나저나 참 놀랍군.

“뭐가요?”

랑켄은 이내 흰 장갑을 낀 손으로 검은 구체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는 저 마도구에 무척이나 흥미를 느끼고 있는 듯했다.

- 이걸 만든 자는 천재가 분명해. 나조차도 겨우 발동 결과만 짐작할 수 있을 뿐, 만들기는커녕 구조를 분석하기도 상당히 까다로운 마도구다.

이올렛은 다섯 손가락 위에서 요리조리 구체를 돌리는 랑켄의 모습에 살짝 불안함을 느꼈다.

“…그런 거라면 부디 조심히 다뤄 줄래요?”

- 응? 내가 설마 이걸 떨어뜨릴까 봐?

이올렛의 말에 랑켄은 이내 구체를 마치 캐치볼처럼 위아래로 던지기 시작했다.

“어휴…….”

마치 말 안 듣는 애 같은 랑켄의 모습에 이올렛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런데 그때,

쾅!

랑켄이 실수로 구체를 놓쳤고, 구체는 그대로 지면으로 낙하했다.

“…….”

- …….

순간 둘 사이에는 정적이 흘렀다.

둘 다 사고가 정지해서, 그 누구도 먼저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 숨 막히는 찰나의 시간이 흐른 뒤.

이내 구체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마기가 연구실을 감싸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그리고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앞이 보이지 않는 칠흑의 공간으로 전송되었다.

이내 정신을 차린 랑켄은 침착하게 주변을 파악하고, 이올렛의 상태부터 살피려 했다.

- 이올렛! 괜찮나?!

그러나 이올렛은 대답이 없었다.

랑켄은 당황스러움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을 더듬으며 이올렛의 위치를 찾으려 했다.

그런데 그때,

퍼억!

- 아야…….

난데없이 날아오는 등짝 스매싱.

그 익숙한 강도와 고통에 랑켄은 단번에 이올렛이 때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 …미안.

보이지는 않았지만 랑켄이 머리를 긁적이는 소리가 정적을 깨고 있었다.

이올렛은 그 소리를 듣고는 어이가 없었다.

“어쩌실 거예요.”

도대체 그 위험한 마도구로 캐치볼을 하는 몰상식한 인간이 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이올렛은 눈앞의 사람이 어떻게 방출계의 권좌 자리를 받았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 그, 그래도 다행히 이 아공간은 살상을 위한 목적이 아니야. 단순히 가둬 두는 용도지.

“그래서 얼마나 갇혀 있어야 하는데요?”

- 음……. 검은 구체의 설치 시기가 아무래도 비교적 최근이었던 거 같으니까……. 아무리 길어 봤자… 일주일?

“일주일이라고요……?”

일주일이나 이 칠흑의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한다니.

그것도 저 랑켄 교수와 함께 갇혀 있어야 한다니…….

이올렛은 억울함과 짜증이 올라와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그런데 그때,

꼬르륵.

이올렛의 배에서 공복을 알리는 장음이 울렸다.

아까부터 이올렛은 배고픔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리를 들은 랑켄이 허겁지겁 말을 잇기 시작했다.

- 괘, 괜찮아. 이 공간은 마나 그 자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마나를 에너지로 변환한다면 적어도 아사는 하지 않을 거다. 무, 물론 마나가 아니라 마기지만 다행스럽게도 내 방독면에 마기를 마나로 바꿔 주는 필터가 있거든?

“…그것참 다행이네요.”

할 말이 많았지만, 이올렛은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욕설을 도로 삼켰다.

‘어쩌겠어. 이미 벌어진 일인데.’

그저 자신의 담당 교수가 한심할 뿐이었다.

그렇게 둘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이 칠흑의 공간에서 일주일을 갇혀 있어야 하는 것이다.

- 누, 누가 그전에 우리의 실종을 알아차려 주지 않을까?

“퍽이나요.”

랑켄이야 항상 지하 연구실에 처박혀서 수업도 빈번히 휴강하는 터라 찾을 리 없었고, 이올렛 본인도 자주 연락 없이 자리를 비우는 편이기에 찾을 가능성은 적었다.

애초에 누군가가 그들을 찾는다 해도, 이런 아공간에 갇혀 있다는 걸 알아낼 방법도 없을 것이다.

- …그, 그럼 일주일 동안 뭘 하면 좋을까…….

“…….”

- …숫자 야구나 할까……?

퍽!

또다시 등짝을 얻어맞는 랑켄 슈타이너였다.

* * *

시간은 어느덧 늦은 저녁.

벌써 조금 있으면 ‘브라더 레인’ 밴드의 마지막 공연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브라더 레인’의 대기실.

루비는 벌써 세 통째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있었다.

‘도대체 왜 안 오는 거야?’

아까부터 루비 버밀리온은 공연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계속되는 공연 때마다, 무대 아래에 제로가 왔는지에만 온 신경을 쏟고 있던 것이다.

‘온다고 약속했잖아…….’

분명 제로는 오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벌써 마지막 공연인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것 때문에 루비는 여러모로 신경이 쓰이고 있던 것이다.

“무슨 일 있어?”

그때 대기실에서 빵을 먹고 있던 달시가 말을 걸어 왔다.

혼자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던 루비는 달시의 말에 재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무슨 소리야? 난 멀쩡…….”

“아까부터 계속 집중 못 하던데?”

“지, 집중을 못 한다니!!”

“그렇다기엔 계속 음 이탈 나던데.”

그랬다.

사실 아까부터 공연 중에 계속 음정이 불안불안하고 가사가 떠오르지 않아 우물우물하기도 했었다.

이게 단순히 한 번의 공연이라면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실수였다.

그러나 같은 곡을 계속해서 반복 공연하는 거라 가사 실수는 있을 수가 없었다.

달시의 말에 루비는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그러자 달시가 루비의 표정을 쓰윽 보더니 넌지시 말했다.

“괜찮아. 올 거야.”

그런 달시의 말에 루비는 속마음을 들킨 거 같아 얼굴이 빨개졌다.

잠시 뒤.

슬슬 브라더 레인의 멤버가 마지막 공연을 위해 무대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루비 버밀리온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그 뒤를 따랐다.

조심스레 손을 뒤로하여 마이크를 쥔 그녀는 무대 위에 선 뒤 크게 심호흡을 내쉬었다.

그런데,

“루비!! 파이팅!! 달시도 파이팅!!”

무대 한구석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그곳을 내려다보자, 그곳에는 역시나 제로가 있었다.

‘역시… 왔네…….’

아까까지만 해도 축 처져 있던 루비 버밀리온.

그녀는 제로의 모습을 보더니 있는 힘껏 마이크를 쥐고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 * *

노래- 너 때문에 할 수 없어. 난 아직도 잘 지내지 못하나 봐, 더 이상.

증폭 마법을 받아, 무대를 가득 채우는 루비 버밀리온의 목소리.

나는 넋을 놓고 그녀의 노래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역시 잘 부르네.’

노래는 ‘아카마’에서 불렀던 것과 동일했다.

장르는 미디움 템포의 다소 잔잔하면서도 신나는 얼터너티브 록.

어찌 보면 평범할 수도 있는 곡이지만, 루비 버밀리온 특유의 음색이 더해져 빠져들게 했다.

사실 나는 루비의 저 노래를 ‘아카마’에서 즐겨 들었었다.

물론 ‘아카마’를 플레이할 당시에는 일상 파트에는 별 관심 없고 히든 엔딩을 보기 위해 집중했었지만, 한 번 루비의 노래를 듣고 난 뒤에는 축제 파트에 올 때마다 일부러 저 노래를 듣기 위해 세 명의 히로인 중에 루비 버밀리온을 선택하곤 했다.

그만큼 루비 버밀리온의 노래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이 있었다.

관객들의 표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마도 이 중에는 브라더 레인의 공연을 보기 위해 재방문한 사람도 많은 듯싶었다.

어느덧 공연이 끝나고, 루비가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그런 그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역시 잘 부르던데?”

“고마워……. 그리고 와 줘서도 고마워.”

“미안, 기다렸지. 좀 사정이 있어서 못 올 뻔한 거 겨우 온 거야.”

“무슨 사정?”

“그건 비밀.”

굳이 루비 버밀리온에게 누군가가 교수와 나를 노리고 마기를 품은 마도구를 설치했다는 것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어쨌든 결국 조기에 발견해서 조치했으니 다행이었다.

‘앞으로 매일같이 감지 마법으로 점검해야겠네.’

이젠 내 감지 마법으로만 마기를 확인할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침공 이벤트를 방지하기 위해 좀 더 내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마도구 건은 잘 정리돼서 다행이었다.

그거와 별개로 나는 루비에게 따로 할 말이 있었다.

“내일 뭐 해?”

“내일……?”

“내일 할 거 없으면 같이 부스 구경하자.”

내일부터는 아네락샤와 시즈모어의 부스 운영이 시작된다.

사실상 아우레인 학생들의 축제는 내일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좋아.”

루비는 웃으며 대답했다.

* * *

벽틈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오는 낡은 지하실.

그곳에는 네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중 의자에 앉아 있는 주황 머리의 남자가 앞의 책상을 크게 내리쳤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하트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분명 ‘흑구’를 넘겨준 학생은 제대로 설치한 게 맞았다.

문제는 그게 왜 지금 발동했냐는 것이었다.

그런 하트의 당혹스러운 모습에 클로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게 왜 지배를 안 한 것이냐.”

“지배랑 상관없는 이야기거든?!”

클로버의 못마땅한 말투에 하트가 발끈했다.

애초에 ‘흑구’는 쉽게 발동되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미 그 ‘흑구’가 발동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 안의 아공간에는 누군가가 들어가 있었다.

“젠장…….”

그들, 블랙잭은 흑구로 교수진을 모조리 가둔 뒤에, 학생들뿐인 칼루스 아카데미의 빈집을 털 예정이었다.

그런데 그 계획이 시작부터 엉망이 되어 버렸다.

‘분명 발견할 수 없었을 텐데…….’

흑구에는 인식 불가능 마법을 추가로 걸어 놨었다.

따라서 아무리 대놓고 흑구를 설치한다 해도, 보통의 마력으로는 그것의 존재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흑구의 위치를 발각되는 것은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때, 팔짱을 끼며 문 쪽에 몸을 기대고 있던 남자가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뭐, 어차피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뭐라 했냐?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말아 줄래, 스페이드?”

하트의 다소 위협적인 말투에 스페이드, 루퍼스 그레이엄은 히죽 미소를 보였다.

“됐어요. 그럴 줄 알고 따로 준비해 놨으니까.”

“따로. 준비했다?”

클로버의 반문에 루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주는 칼루스 아카데미의 중간고사.”

루퍼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피의 중간고사가 시작될 거랍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