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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무속성 마법사-97화 (97/175)

97화

* * *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여전히 제이드는 내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정체가 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것은 도리어 내가 묻고 싶은 부분이었다.

“정체가 뭐냐니?! 너야말로 그게 무슨 소리야?!”

제이드의 얼굴엔 평소의 웃음기가 없었다.

그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리고 곧 녀석이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이번’에는 평상시의 기시감이 없었고, 평소와는 전개가 달랐으니까.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건 항상 너였고.”

“전개가… 평소와는 달랐다고……? 너 설마?!”

제이드의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다만, 아직도 나는 녀석이 아군인지 적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지금껏 수없이 이 지옥을 반복하고 있었어. 매번 칼루스 아카데미에 수석으로 입학하고,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에게 미소를 보이고, 그러다가 결국 저 블랙잭이라는 조직이 아카데미를 침공하여 모두를 죽여 버렸지.”

“…….”

역시 내 생각이 들어맞았다.

녀석은…….

“…회귀자라도 된다는 거야?”

“회귀자? 글쎄. 계속되는 반복 속에서 이게 데자뷔인지, 아니면 처음으로 회귀한 건지, 그것도 아니라면 단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어. 이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도저히 구분할 자신도 없고 말이지.”

녀석의 말에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살짝 눈치챌 수 있었다.

‘아카데미의 마법사’라는 게임의 주인공 제이드.

녀석은 ‘아카마’의 게이머들에 의한 수백 번, 수천 번의 모든 플레이를 전부 겪은 것으로 보였다.

모든 플레이어가 지금껏 수없이 조종했던 제이드가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제이드 한 명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확실한 것은 지금 회차의 전개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거야. 그리고 그 중심에는 바로 너, 제로가 있었어.”

그렇겠지.

애초에 녀석이 수없이 반복한 회차의 제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엑스트라였을 뿐.

수업에서 활약하지도, 광폭화의 캐서린을 구해 내지도, 블랙잭을 막아서지도 않았었다.

녀석이 봤을 때 지금의 나는 명백히 이레귤러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나도 지금껏 제이드에게서 이상한 부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그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지금의 제이드는 아마도 내가 이 세계에 오기 전 마지막으로 행했던 선택지를 고르고 있는 제이드일 것이다.

그리하여 녀석은 ‘블랙잭이 칼루스 아카데미를 침공한다.’라는 히든 이벤트에 도달하고 있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내가 개입함으로써 결국 몰살 엔딩을 막아 진엔딩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너는 뭔가 알고 있지? 내가 왜 이 세계를 반복하고 있는지. 왜 이번에는 평소와 전개가 달랐는지, 그리고 어째서 블랙잭의 침공을 막아 낼 수 있었는지.”

그야 나는 그 답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쉽사리 말해야 하냐는 고민이 들고 있었다.

본인이 게임 속의 주인공이라고 말해 준다 한들, 이해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녀석의 정신 상태는 조금 불안정해 보였다.

아무래도 지금껏 교수님들과 학우들이 죽어 나가는 걸 계속해서 반복해서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완전히 미치지 않은 것만 해도 오히려 신기한 일이었다.

한참의 고민 끝에, 결국 나는 결심했다.

녀석에게 진실을 말해 주겠노라고.

“너는… 주인공이야. 게임의 주인공.”

“주인공?”

“응.”

그리고 나는 녀석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미 한차례 아텔라 교수님에게 설명한 기억이 있어서, 제이드에게 말해 주는 것이 새삼 어렵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사실은 이 세계가 ‘아카마’라는 게임 속 세계인 것.

그리고 제이드가 그 ‘아카마’라는 게임의 주인공이라는 것.

내가 ‘제이드’를 플레이하여 히든 엔딩을 클리어했고, 또다시 진엔딩을 클리어하겠다는 사명을 갖고 이 세계에 오게 됐다는 것.

칼루스 아카데미의 행사를 알고 있었다는 것과 블랙잭의 정보를 알고 녀석들에게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었다는 것까지.

전부 빠짐없이 제이드에게 토해냈다.

그리고 제이드는 그것을 묵묵히 들어 주었다.

인지 부조화로 인해 혼란스러울 법도 한데 녀석의 표정은 매우 차분했다.

이윽고 나에게서 모든 진실을 듣게 된 제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이번 회차에서 전개가 달라진 이유는 뭐야?”

“글쎄. 아마도 내가 개입하면서 조금씩 나비 효과가 생긴 거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 나도 이곳 인물들의 기본적인 정보만 알 뿐이지, 사건의 흐름은 전혀 짐작하지 못했어. 너도 알다시피 비무제 이후로 전개가 너무 틀어졌잖아?”

“그렇긴 하지…….”

잠시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는 제이드.

그런 그에게 나도 물어볼 게 있었다.

“그럼 너는 이번 회차에서 왜 그렇게 행동했던 건데?”

“뭐가?”

“아니, 게임에서는 매번 너의 선택이 달라지잖아. 그러니까 이번 회차에서의 너는 어떤 선택을 내린 거였냐고.”

“음……. 그나마 이렇게 행동하는 게 블랙잭의 침공을 막는 것에 가까웠으니까. 블랙잭으로부터 모두를 지켜 내는 것이 내 반복되는 회귀를 막을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거든.”

역시나네.

나는 제이드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제이드는 내가 마지막으로 히든 엔딩을 봤을 때의 선택지를 그대로 답습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정석적인 미연시 게임의 루트가 아닌, 블랙잭의 침공 이벤트로 도달하게 된 거고.

‘가만, 블랙잭이 칼루스 아카데미를 침공하게 된 이유는 제이드가 고른 선택지 때문인 걸까, 아니면 내가 이 세계에 오게 돼서인 건가?’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것 같은 의문.

이내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침공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했으면 된 거지.’

결국 그게 중요했다.

제이드가 어떤 선택을 했든 간에, 결과적으로 우리는 블랙잭의 침공 이벤트를 막아 낸 것이다.

“그럼, 이제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거야?”

제이드가 넌지시 물어 왔다.

그러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쉽사리 해 줄 수는 없었다.

‘아마도 이제 이 세계는 곧 끝이라는 이야기겠지.’

결국 모든 게임의 엔딩이라는 게 그런 거다.

보스를 처치하는 것이 게임의 엔딩.

공주를 구하는 것이 게임의 엔딩.

모두를 지켜 내는 것이 게임의 엔딩.

무수한 종류의 게임 엔딩과 같이, 이 ‘아카마’라는 게임도 그렇게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이 세계의 주인공, 제이드에게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제이드의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그래서 그 침공 이벤트라는 건 종료됐어?”

“응? 아니. 아직…….”

“이상하지 않아? 이미 블랙잭의 침공은 종료됐고 모든 게 끝났잖아. 이게 게임이라며. 그런데 왜 아직 끝나지 않는 건데?”

그랬다.

아까부터 얼핏 느끼고 있던 위화감.

이게 무슨 고등학교 졸업식도 아니고, 동급생들과의 송별회 시간이 따로 주어질 리 없었다.

분명 게임으로 따지자면 지금쯤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왜… 왜 끝나지 않는 거지?”

그리고 나는 곧 그 의미를 머릿속으로 떠올리게 되었다.

게임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아직 이 게임의 ‘클리어’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 * *

한편, 루비 버밀리온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치고 있었다.

깨진 보석에서 주황색의 마나가 뿜어져 나오면서 동시에 축제 기간에 사라졌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머릿속에 떠오른 기억은 루퍼스가 블랙잭이라고 밝히는 부분이었다.

그러나 거기에 위화감은 없었다.

그야 루퍼스 그레이엄이 블랙잭이라는 사실은 오늘 알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 내용이었다.

루퍼스가 그녀에게 했던 말.

지크 버밀리온이 안티 매지션이라는 것.

그리고 그 지크 버밀리온이 그들 블랙잭을 만든 장본인이라는 것.

루비는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 마법으로 봉인된 이러한 기억을 굳이 되살아나게 한 것이 바로 눈앞의 지크 버밀리온이었으니까.

“오, 오빠가… 아, 아니 당신이… 당신이 블랙잭을 만든 거였어?!”

루비 버밀리온은 이내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 내렸다.

그러고는 그나마 남아 있는 마나를 짜내어 눈앞의 오빠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응, 맞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지크 버밀리온.

딱히 부정하려는 태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 당당한 모습에 오히려 루비 버밀리온 쪽이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내 앞에 나타난 것도……?!’

생각해 보니 그랬다.

뜬금없이 7년 전 실종되었던 오빠가 지금 이곳에서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그가 블랙잭이라는 방증이었다.

아무래도 이곳을 침입한 것은 다른 블랙잭들과 마찬가지로 어딘가에 설치된 포탈을 타고 온 모양이었다.

7년 만에 만난 오빠가 블랙잭이 아니라는 것을 부정하기에는 이미 모든 증거와 상황이 뚜렷했다.

그리하여 루비는 소리쳤다.

“왜! 도대체 왜 블랙잭인 거야?!”

양손을 교차하여 눈앞의 지크를 견제하고 있었지만, 소리치는 루비의 눈가에는 어느새 또 눈물이 글썽글썽 맺혀 있었다.

방금까지 오빠의 따스한 품에 안겨 있던 그녀였기에, 지금의 상황을 쉽사리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루비의 모습에도 지크의 표정에는 감정의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야, 이게 맞는 길이니까.”

“맞는 길이라니?! 도대체 블랙잭의 목적이 뭐길래!!”

그게 무엇이길래 상냥했던 오빠가 모두를 버리고 7년 동안 잠적했던 것일까.

루비 버밀리온은 꼭 그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나 지크 버밀리온은 전혀 숨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을 말하기 위해 이곳에 온 걸지도 모르겠다.

“우린 마계의 문을 열 거야.”

“마계의 문? 마계의 문을 연다고?! 미쳤어?!”

200년 전 일곱 가문의 영웅들이 봉인한 마계의 문.

지금 그녀의 오빠는 그 마계의 문을 열어 마족들의 봉인을 풀겠다고 하고 있었다.

“도대체 왜……? 당신도 버밀리온 가문의 사람이잖아. 버밀리온 가문의 사람으로서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자신이 목숨을 바쳐 이루어 냈던 마족의 봉인을 후손이 다시금 망치려고 한다는 것을 알면 선조 버밀리온이 얼마나 땅을 치고 오열할까.

그러나 지크 버밀리온은 그런 것은 그다지 상관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루비를 자신의 쪽으로 설득하려는 듯했다.

“나와 함께 가자. 이 오빠와 함께 마계의 문을 열자.”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지크.

그리고 루비는 대답 대신 그 손을 거세게 뿌리쳤다.

“싫어! 당신 같은 건 더 이상 오빠가 아니야. 그저 더러운 안티 매지션일 뿐이야!”

오열하는 루비의 손은 입고 있는 붉은 로브를 힘껏 쥐고 있었다.

지크는 그런 루비를 보며 생긋 웃었다.

“좋아. 쉽게 설득할 거라곤 생각 안 했어.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그러더니 검은 로브를 다시금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이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잠깐! 어디 가려는 거야!!”

그 모습에 루비가 신속히 저지하려 했지만 이미 지크 버밀리온의 몸은 검붉은 빛을 발산하고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아니, 이미 당신의 블랙잭은 전부 무너졌어. 이제 남은 건 당신뿐이라고!”

“글쎄, 그들은 애초에 버리는 패였을 뿐.”

우우우웅.

순간 지크의 몸이 번쩍이더니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우리의 계획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그 말을 끝으로 지크의 몸은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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