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이걸 다 올라가야 한다고……?”
애초에 가파른 계단은 그 끝이 보이지도 않았다.
그 장엄한 광경에 문득 예전 TV에서 봤던 중국 천문산에 있는 천국의 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도 천국의 문 계단은 고작 999개잖아…….’
반면, 눈앞의 계단은 족히 어림잡아도 1,000개는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나는 설마 싶어서 달시에게 넌지시 물어보았다.
“혹시 이거 진짜 걸어서 올라가는 건 아니지?”
“당연히 걸어서 올라가야지. 마법은 못 쓰니까.”
“…….”
이제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조금 괜히 왔나 싶은 마음도 물씬 생기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까지 온 이상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올라갈까?”
그렇게 나와 달시는 이 끝이 없는 지옥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 분 뒤.
거의 100개 정도 올라왔을까.
슬슬 ‘시작조차 하지 말걸.’ 하는 후회가 밀려오고 있었다.
“여긴 왜 리프트나 엘리베이터 같은 게 없는 거야…….”
“그야 마법을 사용 못 하니까?”
“…그니까 아무리 마법을 사용 못 한다지만 왜 일반적인 편의 시설조차 만들지 못하는 거냐고…….”
참 마법이란 것의 폐해가 심각한 듯싶다.
이곳의 사람들은 마법이 없으면 생활 수준이 정말 중세 시대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였다.
어쩌면 그 이하일 수도 있겠다.
“여기 다 올라가려면 보통 어느 정도 걸려?”
“혼자면 보통 10분에서 15분?”
“혼자라는 말은 혹시 전속력으로 뛴다는 소리야?”
“응.”
“…….”
달시 세이피어가 전속력으로 뛰어 올라가서 10분이 걸린다는 얘기는, 일반인이라면 이 계단을 다 오르는 데 최소 한 시간은 걸린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더더욱 건장한 성인이 아닌, 노인이나 어린아이라면 아예 이 산을 출입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낼 듯싶었다.
나는 문득 그 부분이 궁금해졌다.
“그럼 세오린 산의 사람들은 외출을 안 해?”
“글쎄. 외출해도 보통 10년에 한 번 정도 할걸?”
“…1년도 아니고 10년?”
아예 눌러앉는다는 소리잖아.
다만, 그 이유가 납득이 갈 만할 정도였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이 지옥의 계단을 두 번 다시 오르고 싶진 않겠지.
‘그러고 보니 세이피어의 선조는 왜 굳이 이런 곳을 가문의 영지로 삼았을까.’
달시 본인조차 그 이유를 모른다지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힘들어?”
성큼성큼 두세 계단을 한 번에 올라가는 달시는 뒤를 돌아보고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아무래도 내 올라오는 속도가 느릿느릿해서 조금 답답한 모양이었다.
다만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짓거리는 죽어도 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여긴 방출계 치유 마법사도 없잖아.’
분명 올라가게 되면 보나 마나 최소 일주일간은 알이 배길 텐데, 벌써부터 그 고통을 생각하자니 끔찍할 따름이었다.
그와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오르는 발이 더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많이 힘들어?”
나는 대답할 기운조차 없었다.
반면, 나를 보는 달시의 표정에는 힘든 기색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상시 강화 마법도 풀렸을 텐데.’
어떻게 저 가녀리고 왜소한 체구에서 단단한 힘이 나오는지 미스터리였다.
그런데 갑자기 달시가 발걸음을 멈추더니 상체를 굽혔다.
“자, 업혀.”
“응? 업히라고……?”
당장이라도 업힐 수 있게끔 상체를 구부려 준 달시 세이피어.
나는 그녀의 왜소한 등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심각한 내적 갈등에 빠지게 되었다.
‘업힐까……?’
매우 진지한 고민이었다.
아까 전, 흔들리는 페가수스 위에서도 허리를 잡기 싫어 괜스레 팔짱을 끼고 자존심을 부리던 나였다.
그런데 지금, 그 자존심이 흔들리려 하고 있었다.
이윽고 한참을 고민한 끝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으아아아앗!!”
갑자기 계단을 미친 듯이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정도야 가뿐하지!!”
나는 어느새 달시를 제치고 더더욱 치고 올라갔다.
이런 나를 달시 세이피어는 멀뚱멀뚱 올려다볼 뿐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씨익 미소를 지었다.
“뭐야? 멀쩡하잖아? 같이 가!!”
그렇게 나는 실리보다는 자존심을 택하고 말았다.
* * *
계단의 정상에 도착한 것은 처음으로부터 한 시간이 훌쩍 지난 후였다.
“주, 죽을 거 같아…….”
나는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털썩 바닥에 누워 버렸다.
도저히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었다.
‘몇 개까지 셌더라…….’
계속 올라오면서 계단의 개수를 세어 봤지만 1,500개 정도에서 포기한 듯싶었다.
아무래도 그때가 반쯤 올라왔을 때였으니까, 이 지옥의 계단은 대략 3,000개 정도는 될 듯싶었다.
“괜찮아?”
거의 죽기 일보 직전인 나를 달시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내 어깨를 툭툭 치며 일어나라는 시늉을 했다.
“그만 가자.”
“조금만 더 쉬었다가…….”
“어차피 중림사에 도착하면 근육통쯤이야 곧장 치유될걸?”
“응? 마법도 못 쓰는데 어떻게?”
“몸에 잘 듣는 약초가 있거든.”
“약초?”
이곳은 마법을 사용 못 하는 만큼 약초학이 발전돼 있는 걸까.
물론 약초 자체의 효과야 포션만도 못할 테지만, 그럼에도 뭔가 이곳 세오린 산의 분위기가 산신령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신비한 분위기였기에, 충분히 믿음이 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억지로 기운을 짜내 가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럼… 갈까?”
세오린 산의 정상은 거대한 분화구 같은 평지에 가까웠다.
아래에서 봤을 때는 몰랐는데, 정상에서 보니 나름 사람이 살 법한 공간이라 볼 수 있었다.
길을 쭉 따라 걸어가니 갈림길이 나왔고, 달시는 오르막길 쪽으로 가야 중림사가 나온다고 말했다. 반대편은 아무래도 마을로 가는 길인 듯싶었다.
다행히도 오르막길은 이전에 올라왔던 그 계단만큼 가파르진 않았다.
나는 어기적어기적 발걸음을 옮기며 달시의 뒤를 따랐다.
이윽고 오르막길을 전부 올라가자 거대한 사찰이 나타났다.
“정말 절이네.”
중림사를 처음 본 내 감상평은 그랬다.
괜히 이름이 중림사가 아닌 듯, 외견은 거대한 사찰로 보였다.
입구를 들어서자 중앙에는 드넓은 연병장이 있었고, 가장자리에는 마치 한옥 같은 느낌의 집들이 디귿(ㄷ)자 모양으로 쭈르륵 연결되어 있었다.
연병장에는 무술을 단련하는 사람의 무리도 여럿 보이고 있었다.
“마치 소림사 같네.”
물론 모든 사람이 전부 민머리는 아니었지만, 개중에는 머리를 민 사람도 종종 보였고, 입고 있는 복장도 드X곤볼에 나올 법한 무술인의 복장이었다.
연병장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내 안으로 들어온 달시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숙여 인사하기 시작했다.
“오셨습니까! 달시 님!”
“응. 혹시 노엘 선생은 계셔?”
“예! 의원에 계십니다!”
아무래도 달시가 말하는 노엘 선생이라는 사람이 이곳의 의료 담당인 듯싶었다.
나는 그보다 사람들의 태도가 의외였다.
‘달시 님…인 건가?’
사람들이 달시를 대하는 태도가 지나치게 깍듯했다.
그들의 반응을 보아하니, 새삼 그녀가 세이피어 가문의 당주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지금껏 그저 근육 바보 소녀인 줄만 알았는데 말이지.’
역시 영웅의 가문은 영웅의 가문인가 보다.
어찌 보면 이러한 영웅의 가문의 귀족들, 일반 귀족들, 평민들이 자유롭게 어울릴 수 있는 칼루스 아카데미가 조금 이례적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윽고 달시는 디귿자로 세운 여러 한옥 중, 한곳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러고는 그 한옥의 마당 앞에서 누군가를 큰 소리로 부르기 시작했다.
“노엘 선생!!”
그러자 문 안쪽에서 버선발로 뛰쳐나오는 백발의 늙은 남자.
“아이고 오셨습니까, 당주님.”
아무래도 저 사람이 그 ‘노엘 선생’이라는 사람 같았다.
게다가 한눈에 봐도 노엘 선생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의 몸에서는 살짝 씁쓰름한 한방약 냄새가 나고 있었다.
“들어오시죠.”
나는 알이 배긴 다리를 절룩거리면서 그의 안내에 따라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나를 침대 위에 눕혔다.
나는 누운 상태로 앞에서 지켜보고 있는 달시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효과가 있겠지?”
“그럼! 한 방에 나타날걸?”
호언장담을 하는 달시 세이피어.
나는 반신반의하며 처방을 기다렸다.
이윽고 노엘 선생은 뜨겁게 데운 수건을 내 종아리 부근에 올려놓았다.
매우 뜨거웠지만, 그 덕분에 아까부터 느껴지던 다리의 근육통이 조금 사그라든 느낌이었다.
“이렇게 10분 정도만 있으시면 됩니다. 그럼 근육통이 말끔히 가실 겁니다.”
10분?
나는 고작 10분 동안 온찜질을 한다 해서 계단 3,000개를 올라온 근육통이 말끔히 사라질지 의문이 들었다.
달시는 내 의심 가득한 표정을 보며 배시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당주님!!”
누군가가 문을 열고 급하게 들어왔다.
들어온 사람은 30대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왜?”
당황하지 않고 되묻는 달시.
그러자 여자는 이내 용건을 말했다.
“당주님이 오셨으니, 가문 회의를 실시한다고 합니다.”
“그래? 얼마나 걸리는데?”
“아마 당주님이 본가를 비운 지 꽤 긴 시간이 흘렀으니, 그만큼 회의도 길어질 것으로 예상됩니다.”
“으음…….”
그러자 달시 세이피어는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그러더니 이내 나에게 양해를 구했다.
“미안. 아무래도 가문 회의에 가 봐야 할 거 같은데. 아마 영감들 말하기 시작하면 두세 시간이 기본이라 좀 오래 걸릴 거 같아.”
“아냐, 괜찮아. 갔다 와.”
“그럼, 여기 있어도 되고, 정 심심하면 마을 구경이라도 하고 있어.”
“응.”
그러더니 이내 달시는 여자의 뒤를 따라 의원 밖으로 나갔다.
“기본이 두 시간이라.”
혼자 있기에는 다소 긴 시간이었다.
“마을 구경이라도 해 볼까?”
나름 동양풍의 건축 양식과 생활 양식에 마치 조선 시대에 온 것 같은 기분도 들고 있었다.
따라서 마을 구경도 나름 쏠쏠한 재미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윽고 10분이 지나자, 노엘 선생이 와서 수건을 제거했다.
그러고는 나에게 물었다.
“어떻습니까?”
사실 수건을 걷어 낼 때만 해도 별 느낌이 없었다.
계속해서 온찜질을 받고 있었기에 조금 뜨겁다는 느낌뿐이었다.
그런데 막상 두 다리로 바닥을 짚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통증이… 하나도 없네요?”
고작 온찜질 10분 받았을 뿐인데 정말 통증이 싹 가시다니.
물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마법 한 번으로 모든 통증이 사라지는 경험을 한 나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새삼 놀라게 되었다.
“그럼요. 제가 누굽니까. 세오린 산 최고 의원 노엘 아니겠습니까.”
다소 과장된 내 리액션에, 노엘 선생은 기분이 좋은지 연신 껄껄 웃었다.
나는 다리도 완전히 치유됐겠다, 이내 더더욱 마을 구경을 하고 싶어졌다.
“노엘 선생님, 마을은 들어올 때 보았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꺾으면 되는 거죠?”
“예? 마을이요?”
갑자기 표정이 어두워진 노엘 선생.
나는 그의 태도에 ‘뭔가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음… 당주님의 손님이라면 괜찮겠죠.”
“네?”
“아, 아닙니다. 마을은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는 게 맞습니다.”
나는 그의 말투에서 미묘하게 불안한 느낌을 받았지만, 이내 상관하지 않았다.
어느새 몸이 팔팔해진 나는, 이곳의 특산물을 먹을 생각에 기대감이 부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