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에 문자 내역을 좀 더 확인했다.
스크롤을 내리자 더 많은 내용의 문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캐서린(3주 전): 잘 도착했어요?]
[캐서린(2주 전): 잘 지내고 있어요?]
[캐서린(1주 전): 설마 사용법을 모르시는 건 아니겠죠? 보면 답장해 주세요.]
[캐서린(5일 전): 제가 뭐 잘못했나요……?]
……
“…….”
그러고 보니 이곳에 와 있는 동안은 세오린 산의 마나 봉인 때문에 본의 아니게 연락을 받지 못했고, 마나 봉인이 풀린 이후에는 ‘계승의 힘’의 반동으로 기절해 있었기 때문에 연락을 받지 못했었다.
아무래도 캐서린은 뭔가 단단히 오해한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곧바로 캐서린에게 전화를 걸었다.
띠리리…….
- 여보세요?!
다이얼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은 캐서린.
그녀의 목소리에는 뭔가 다급함이 느껴지고 있었다.
“으, 응… 여보세요?”
- 뭐예요? 무슨 일 있던 거예요?!
“뭔 일이 있긴 많이 있었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애초에 세오린 산은 마법을 사용할 수 없는 곳이라 연락을 확인 못 했었어.”
- 그런 거였어요?
“응. 미안.”
아무래도 세이피어 가문의 영지가 세오린 산에 있다는 것은 유명한 모양이지만, 세오린 산에서 마법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외부인에게까지는 잘 알려지지 않은 듯싶었다.
- 그나저나 언제 오실 거예요? 휴교도 곧 끝나잖아요.
“골드버그 가문 영지?”
- 네.
골드버그 가문이라.
일곱 영웅 가문 중에서도 가장 부유하다는 골드버그 가문.
그러고 보니 한번 놀러 가기로 캐서린과 약속했던 것이 기억이 났다.
다만, 사실 이 이후에는 다른 아티팩트를 모으기 위해 아메드의 영지를 방문할까 생각 중이었던 터라 조금 고민이 되는 부분이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선택해야 하나. 흐으음……. 응? 선택……? 그러고 보니 왜 요즘 선택지 창이 나타나지 않는 거지?’
문득 의식하지 않고 있던 사실을 눈치챘다.
이곳에 온 이후로 내 눈앞에 나타나던 선택지.
그 선택지 창이 최근 들어 보이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아예 사라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있었다.
‘마지막 선택지가 언제였지……?’
아마도 내 기억상의 마지막 선택지는 비무제 16강 던전 안에서 오스카를 구했던 때였다.
그 이후로는 선택지가 나타난 기억이 없었다.
‘마지막 선택지 이후로의 사건이라면…….’
그것은 다름 아닌 캐서린의 마인화.
그때 당시에 내게는 시스템 창도 선택지 창도 주어지지 않았었다.
물론 아직도 이벤트 창은 간간이 뜨고 있긴 하다만, 결국 캐서린 사건을 계기로 선택지 창이 사라진 걸 보면, 아마 그때의 내 선택이 일종의 트리거 역할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캐서린을 마인화로부터 구해 낸 것이 원작의 시나리오와 가장 틀어졌던 사건이라 일리가 있는 추측이었다.
‘그나저나 진짜 선택지가 사라진 것이려나……. 이곳에 온 초창기엔 선택지가 나름 쏠쏠했는데 말이지.’
초반에는 선택지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상황도 더러 있었다.
물론 선택지가 나를 난처하게 만들 때도 있었지만, 결국 나한테 큰 이득을 불러왔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지금껏 이 세계에 몰입하고 있었기에 잊고 있던 사실.
물론 지금의 나에게는 멸망을 막으라는 목표도, 사명도 있었고 애초에 내가 선택하여 여기까지 온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가장 의구심이 드는 것은 ‘누가’ 나를 이곳으로 보내고, 이렇게 성장하게끔 유도했느냐는 것이었다.
게임사? 아니면 혹시 신?
그것도 아니라면 단순히 꿈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갑자기 그러한 의문들이 머릿속에 맴돌기 시작했다.
다만, 머릿속에 생긴 의문점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 …뭐 해요? 왜 대답이 없어요?
“어어……?”
- 오기 싫은 거예요……?
그러고 보니 캐서린과 통화 중이었지.
통화 중에 너무 딴생각을 많이 하고 있었던 듯했다.
그녀는 지금껏 긴 침묵을 잠자코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미안. 잠시 딴생각 좀 하느라. 사실 아메드가에 들를까 고민 중이었거든.”
- …샬롯 아메드요?
샬롯 아메드라는 말에 갑자기 캐서린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아, 맞다…….’
나는 달라진 분위기를 곧장 눈치채고 그녀에게 사과했다.
“미, 미안! 그, 그게 아니라… 갈게! 언제쯤 가면 될까?”
- …진짜요?
나는 다시금 풀린 캐서린의 목소리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엉겁결에 골드버그 가문에 간다고는 했지만 내가 말실수를 한 것도 맞으니까.
아무리 지금은 이전보다는 괜찮아졌다고는 하지만, 원래 캐서린은 샬롯 아메드와 나름대로 앙숙 관계.
따라서 조금 전 내 말은 엄연히 실언인 것이다.
‘뭐, 어차피 여기서 더 아티팩트를 모으기에는 시간적 여유도 부족하려나.’
벌써 휴교 기간의 끝이 머지않았다.
애초에 휴교 기간은 한 달 정도였기에, 앞으로 일주일 남짓이면 다시 아카데미로 복귀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 이왕 골드버그 가문에 방문하는 김에 그 ‘피너클러스 골드버그’에 대해 좀 알아봐야겠네.’
예전에 골드버그의 저택에 영웅 ‘피너클러스 골드버그’의 동상이 있다는 말을 제페토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안 그래도 영웅의 아티팩트가 가진 마법에 대해 살짝 의문점이 들던 참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럼, 내일 가도 될까?”
- 내일이요? 알겠어요.
캐서린은 어느새 다시금 평소의 살짝 무뚝뚝한 반응으로 돌아와 있었다.
- 준비하고 있을 테니 천천히 오세요.
“으응.”
그리고 나는 통화를 끊었다.
“휴우……. 아무튼 마침 잘됐네. 아메드의 아티팩트는 나중에 얻으면 되는 거니까.”
이제 남은 아티팩트는 네 개.
이제 막 학기 초임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이 모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이번은 나름의 정비 시간을 갖기로 마음먹었다.
* * *
그날 저녁.
골드버그 저택.
휘황찬란한 장식과 조명이 가득한 널찍한 홀에 골드버그 일가의 식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분주히 음식을 나르는 시종들.
그들의 복장은 하나같이 단정한 옷차림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가져오는 음식 하나하나도 고작 4인 가족이 먹기에는 넘칠 정도의 호화스러운 음식들이었다.
이윽고 식사 준비가 모두 끝나자, 골드버그의 일가가 자리에 앉았다.
식사가 시작된 뒤, 홀에는 정숙한 분위기와 그저 포크와 나이프가 접시를 두드리는 달그락 소리만이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런데 왠지 음식에 손을 대지 않고 가만히 있는 캐서린 골드버그.
그 모습에 의아한 그녀의 아버지 율리안 골드버그가 냅킨으로 입을 닦고는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왜 들지 않는 것이냐. 캐서린.”
진중하지만 어딘가 차가운 그의 목소리.
캐서린은 이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내일 손님이 올 예정이에요, 아버지.”
허락이 아닌 통보.
그러한 캐서린의 태도에 율리안은 짐짓 당황했지만 아무렇지 않게 반문했다.
“손님이 온다고? 어떤 분이시지?”
“‘제로’라고 합니다.”
“제로……? 처음 듣는 가문이다만.”
캐서린은 이내 침을 꿀꺽 삼켰다.
홀이 너무 조용했던지라 그 목 넘김 소리는 옆에 앉아 있던 제페토에게까지 들렸고, 제페토마저 덩달아 긴장해 버렸다.
이윽고 말을 잇는 캐서린 골드버그.
“제로는 성이 아니라 이름이에요.”
“그럼 어느 가문 출신이더냐?”
“가문은 없어요. 제로는 평민입니다, 아버지.”
콰아앙!!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는 율리안 골드버그.
그와 함께 테이블 위의 접시들이 순간 움찔거렸다.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제페토는 더욱더 불안해졌다.
반면 캐서린은 예상했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을 뿐이었다.
“평민을… 평민 따위를 골드버그가에 들이겠다고?!”
“그는 평민 따위가 아니라 칼루스 아카데미의 동급생입니다. 게다가 매우 뛰어난 사람이죠. 안 그래요, 오라버니?”
갑작스레 이목이 자신에게 끌리자 제페토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지금껏 유순했던 캐서린이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태도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제페토였다.
다만, 그도 어느 정도 제로를 나쁘지 않게 보고 있었기에, 일단은 캐서린의 편을 들기로 마음먹었다.
“그, 그래요, 아버지. 제로 녀석이 평민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 아카데미 수석이긴 하니까…….”
콰아아앙!
제페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율리안 골드버그는 또다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의 주먹 쥔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사실 율리안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황스러웠다.
지금껏 반항 한번 하지 않던 순종적인 딸이 갑자기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던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평민을 집안에 들이겠다니.
게다가 자신의 아들 제페토마저도 캐서린을 옹호하는 분위기라니.
“제로라…….”
젊었을 때의 율리안이었으면 자식들의 외도를 가만히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도 이젠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예전 같은 성깔은 조금 누그러져 있었다.
또 두 자식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그 평민 자식이 어떤 녀석인지 낯짝을 보고 싶어졌다.
“좋다.”
“…예?!”
오히려 당황한 듯 반문한 것은 제페토였다.
평상시 불같은 아버지가 평민을 집에 들이는 것을 허락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단, 그 평민 녀석이 내 기대에 못 미치지 않길 바란다.”
“당연합니다. 분명 아버지도 마음에 드실 거예요.”
장담하는 캐서린 골드버그.
율리안은 그런 캐서린의 당당한 표정을 슬쩍 눈으로 흘겼다.
평생 동안 순종적이었던 딸이 저 정도의 단호한 자세로 나올 정도라니.
율리안은 제로가 조금 궁금해졌다.
* * *
다음 날.
세이피어 가문의 모두는 세오린 산 지옥의 계단 앞에 나를 마중 나왔다.
배웅한다길래 기껏 해 봐야 달시와 두 꼬마 녀석만 올 줄 알았건만, 이 정도로 많은 인원이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소문은 들었습니다. 세오린 산의 마나 봉인을 혼자서 해제하셨다지요?”
“게다가 반란을 일으킨 노엘 선생도 제압하시고요!”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덕분에 당주님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그들의 성원에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그러고는 데이몬 쪽을 슬쩍 바라보았다.
그러자 부끄러운 듯 달시 뒤로 숨는 데이몬.
아무래도 녀석이 청월제 때 있었던 일을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닌 모양이었다.
그러나 사실 과장된 부분은 없었다.
그들이 말하는 내용은 전부 사실이었으니까.
오히려 영웅담이 조금 부족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튼 그동안 저도 신세 많이 졌습니다.”
나는 나에게 열렬히 환호하는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그리고 그들의 환호가 그치자, 쭈뼛쭈뼛하고 있던 데이몬이 달시에 떠밀려 내 앞으로 오게 되었다.
나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여는 데이몬.
“…꼭 다시 돌아올 거지?”
“당연하지. 약속했으니까.”
그러자 데이몬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각오를 말했다.
“나도 용사가 될 거야.”
“용사?”
나는 데이몬의 말에 피식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그럼 다음에 볼 때는 용사 대 용사로 보는 거다?”
“잠시만요! 저도 용사가 될래요!!”
나와 데이몬 사이로 뛰어든 포비 세이피어.
나는 그런 그녀의 머리도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너희라면 충분히 가능할 거야. 꼭 훌륭한 용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때까지 기대하고 있을게.”
이내 작별 인사를 끝마친 나는 슬슬 갈 준비를 취했다.
그러자 지켜만 보고 있던 달시가 조용히 다가왔다.
“정말 안 데려다줘도 괜찮겠어?”
“응.”
“그래, 그럼. 나중에 아카데미에서 보자.”
“그래, 그때 보자.”
나는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팟!
점멸을 사용해서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