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디단홍시] 약혼은 개뿔 사업이나 하렵니다
프롤로그 (1)
폭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멍한 시선으로 빗방울이 부딪히는 창문을 바라보았다.
“아가씨.”
하녀 메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에스티아를 불렀다.
에스티아의 흰색 드레스는 비에 젖어 축축해져 있었다.
수행원이 우산을 씌워 주기는 했지만 워낙 비가 많이 온 탓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메리는 거의 울먹거리고 있었다. 그동안 고고하고 강인하던 주인이 거의 무너질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난 괜찮아, 메리. 걱정하지 마.”
에스티아가 애써 잠잠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드레스가 젖은 채로 현관 앞에 멍하니 서 있는데 아무도 그 말을 믿을 리가 없었다.
“아가씨, 일단 방으로 들어가요. 이러다 감기 걸리세요.”
차라리 감기에 걸리는 게 낫겠어. 에스티아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을 거 같았다. 어느 누가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왔는데 멀쩡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 사람이 인생의 유일한 운명 같다면.
“메리…….”
에스티아가 슬픔에 젖은 목소리로 메리를 불렀다.
“나 아무래도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아.”
어느새 담요를 갖고 온 다른 하녀가 에스티아의 어깨에 담요를 둘러 주었다.
“예……. 아가씨. 얼마든지 쉬세요. 저희가 옆에 있어 드릴 테니까. 언제나처럼.”
메리가 담요를 두른 에스티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하녀가 감히 주인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지만 둘 사이에 신분의 거리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하녀와 수행원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가 그를 얼마나 사랑했던가. 자신을 버려 가면서까지 사랑했던 사람을 그녀가 버리고 온 것이다. 그것도 방금.
“아가씨, 방에 난로를 피우고 왔습니다. 얼른 들어가시죠.”
다른 하녀가 에스티아에게 말하며 그녀를 부축하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때였다. 누군가 현관문을 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아가씨.”
메리가 겁먹은 목소리로 에스티아를 불렀다.
예상치 못한 순간은 아니었다. 그가 순순히 납득할 리가 없었으니.
“열어.”
“하지만 아가씨…….”
“난 괜찮으니까 어서 열어.”
메리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수행원에게 눈짓했다. 수행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현관으로 다가갔다.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고풍스러운 저택 문이 열리면서 두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의 뒤로 천둥이 번쩍하며 하늘을 가로질렀다.
에스티아는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저택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면에 그녀를 바라보는 눈동자는 세차게 흔들리고 있었다.
수하로 보이는 듯한 남자와 딱 봐도 귀족으로 보이는 남자가 들어왔다. 에스티아의 시선이 잠시 수하에게 머물렀다가 다시 남자에게로 향했다. 푸른 잔디를 닮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에스티아.”
침착해 보이려 애쓴 듯했지만 목소리에는 분노와 절박함이 물씬 묻어 나왔다.
“바일 대공 전하.”
이름을 부르던 평소와는 달리 예의를 갖춰 그를 부르자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자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 늦은 시간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에스티아의 목소리는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침착했다. 반면에 남자는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간에 찾아오시는 건 결례라는 걸 모르십니까? 급한 일이라면 시종이나 기사를 통해…….”
“결례라는 걸 아시는 분이.”
에스티아가 말을 멈췄다. 어느새 눈을 뜬 남자는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다시 한번 자신을 버린다면 용서하지 않겠다는 듯이.
“낮에 그렇게 제 심기를 흔드셨습니까?”
에스티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가장 화려한 순간에 그에게 가장 최악의 순간을 선물한 것이,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기에.
결국 에스티아는 그의 눈을 피했다. 반면에 남자의 눈은 집요하게 그녀의 시선을 쫓았다.
“사용인들은 잠시 물러나 있거라.”
남자의 목소리가 단호하게 사용인들에게 꽂혔다.
“하지만…….”
“괜찮아, 메리. 무슨 일 있으면 부를게.”
마지막 말에서는 그녀의 시선이 정확하게 남자에게 꽂혔다.
사용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제 1층 로비에는 그녀와 그만 남았다.
애정과 증오가 어린 두 눈빛이 허공에서 얽혔다.
* * *
처음 그에게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게 될 줄은 몰랐다. 처절하게 그를 버린 이유는 그래야지 정말 그를 버릴 수 있을 거 같아서였다.
“에스티아.”
절박한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았다. 에스티아는 바닥에서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전하.”
“아니.”
남자가 에스티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름, 이름을 불러 줘요.”
지금 이 순간, 방금까지 보였던 그의 거만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거리 두지 말고…… 지금은…… 그냥…….”
“에버하르트.”
그의 숨이 떨렸다. 비로소 숨통이 트인 것처럼.
그가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 걸음을 멈추게 하려는 듯 에스티아가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
“승전 파티에서 내가 했던 말 진심이에요.”
“당신이 했던 말?”
“네, 당신의 약혼녀는 하지 않겠다는 말.”
에버하르트가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난 당신 때문에 살아 돌아왔어요. 아무리 작은 왕국에서 반기를 든 거라고 해도 쉽지만은 않았어. 난…….”
그가 울음을 삼키는 것이 보였다.
“난 당신 때문에 돌아왔다고.”
그제야 에스티아의 눈동자가 떨렸다. 그걸 본 에버하르트가 마치 작은 빛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에스티아에게 매달려 왔다.
“아무리 셰린포드 가문이 상승세라고 해도, 당신이 안 좋은 소문에 둘러싸여 있다고 해도, 내 약혼자를 당신이 결정할 권리는 없어요.”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손목을 붙잡았다.
“다른 여자를 약혼녀로 제안할 권리는 더더욱.”
“그냥 여자가 아니에요. 알잖아요.”
에스티아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차마 그의 손을 쳐내진 못했다.
“이미 돌이키긴 늦었어요. 내가 했던 말 기억하잖아요.”
에스티아가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 말에 그의 머릿속으로 파티장에서 에스티아가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당신의 약혼녀는 하지 않겠습니다.
-글레멘드 영애, 그게 대체 무슨 소리입니까?
-대신 메르헨 셰린포드를 약혼자로 삼으십시오.
그가 이를 으득 갈았다.
“아니, 절대 그럴 일은 없어.”
그가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엄청난 손의 힘에 에스티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다른 가문의 여식을 약혼자로 맞이할 일도 그리고…….”
그가 그녀 앞으로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댔다.
“당신이 다른 남자의 약혼자가 될 일도 없을 테니까.”
심장이 쿵 떨어졌다. 에스티아는 그가 소문을 들었음을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누구와 어떤 시간을 보냈든, 나와 보냈던 시간이 사라지진 않아요. 만약 날 벗어나고 싶었다면 그날 밤 나한테 그러지 말았어야지.”
에버하르트가 에스티아의 목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의 입술이 목을 스치자 에스티아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에스티아가 그를 밀치려고 했지만 그는 그 상태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에스티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자신과 다른 남자의 염문설까지 뿌렸더니만 오히려 그 염문설이 그의 마음에 불을 붙인 듯했다.
에스티아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었지만 목에 닿는 그의 입술이, 푹 젖어 있는 그의 몸이 거슬렸다. 하필이면 그와 그녀 모두 비를 흠뻑 맞은 상태라 옷이 몸에 딱 들러붙은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그는 자신에게 안기고 있었던 것이다.
에스티아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밖에서나 고고한 대공 전하이시지 안에서는 완전히 어린애였다.
에스티아는 결국 그를 밀어내는 걸 포기했다. 그러자 에버하르트가 두 팔로 그녀의 몸을 꽉 끌어안으며 목에 얼굴을 비볐다.
에스티아는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그가 자신에게 매달렸던 건 그날 밤 이후로 처음이었다. 이렇게 그가 무너진 것도.
“티아.”
그가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로 그녀의 애칭을 불렀다.
“난 당신에게 낭만이 아니었던 겁니까?”
에스티아는 ‘낭만’이라는 글자를 듣자마자 가슴이 저밀어가는 걸 느꼈다.
아니라고 얘기해야 했다. 사실 그는 그녀에게 낭만이 아니었다고. 갑자기 물에 빠진 것처럼 숨 막히게 만들었다고.
왜냐하면 원래대로라면 당신은 날 죽일 운명이었으니까. 저 깊은 물속으로 날 버릴 사람이었으니까.
“낭만이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아닐 뿐이지.”
에스티아는 이 세계에서 처음 그의 눈동자를 보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녀를 경멸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으나 결국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그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스티아는 그 틈을 타 그를 밀어냈다. 그제야 에버하르트의 몸이 에스티아에게서 떨어졌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려던 그 순간, 에스티아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에버하르트…….”
에스티아가 떨리는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눈빛이 이토록 광기에 물든 걸 본 적이 없었다. 예상했던 순간이지만 상상했던 것보다 더 깊은 공포감이 에스티아의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래, 속이려면 계속 속여. 혼자 해결하고 싶으면, 그래서 날 떠나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럼 난 죽어라 밝혀내고, 죽어라 당신에게 들러붙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을 찾아낼 테니까.”
“이미…… 이미 늦었어요! 여론은 이제 바일 공작 부인으로 셰린포드 영애의 손을 들어 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그래? 그렇다면 난 당신의 계획이 모두 수포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겠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프롤로그 (2)
에스티아는 마음속에서 솟아오르는 두려움을 억지로 삼켜야 했다. 에버하르트 바일은 적국의 살인귀마저 겁먹게 하는 전무후무한 악귀로 불렸다. 원작에서 묘사한 것처럼.
“메리!”
에스티아는 큰 목소리로 메리를 불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하려고 했지만 에스티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메리가 에스티아의 목소리에 잰걸음으로 뛰쳐나왔다.
“오스카 후작에게 가야겠어. 내 진짜 정혼 상대가 에버하르트 대공이 아니라 오스카 후작이라는 걸 사람들한테 알려 줘야지.”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에 질세라 에버하르트도 매서운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당신을 보내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보내 줄 수밖에 없을걸요. 만약 지금 내가 오스카 후작가에 가지 않는다면, 대신 황제 폐하께 나랑 정혼한다고 전하라고 오스카 후작에게 말해 둔 상태니까.”
“…….”
사실은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성 잃은 에버하르트에게는 진실을 구별할 분별력이 지금은 없었다.
에버하르트는 당장 그녀의 목을 비틀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분노로 몸을 떨고 있었다. 에스티아는 도발이라도 하듯 그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에버하르트는 부드럽게 오른손으로 그녀의 턱을 감았다. 서늘한 손길에 에스티아의 몸이 움찔했다.
“그래, 다녀와요. 대신 오랜 시간 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돌아 버리는지 봐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잘 알 거라고 생각합니다, 글레멘드 영애.”
에스티아의 눈가가 떨렸다. 이름이 아니라 영애라고 불렀다는 건 권력으로 그녀를 눌러 버리겠다는 의미였다. 에스티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에스티아는 그의 오른손을 쳐냈다.
“아무리 당신이 대공 전하셔도 모든 게 당신 뜻대로 될 거라는 기대는 하지 말아요. 귀족 사회는, 여론은 그래서 무서운 거니까.”
에스티아는 메리의 도움을 받아 새 코트를 몸에 걸쳤다.
“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당신과 메르헨 셰린포드를 약혼시켜야 하니까.”
그래야 내 사랑을 지킬 테니까.
에스티아는 그를 지나쳐 현관으로 걸어갔다. 에스티아가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천둥소리가 점점 커졌다. 비가 점점 많이 오고 있었다.
고통과 슬픔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버림받았다는 끔찍한 기분에 그가 무너지고 있는 소리였다.
에스티아의 수행원이 문을 열었다. 메리가 우산을 펴자 에스티아는 계단을 내려갔다.
에스티아는 몰랐다. 설마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될 줄은. 자신 또한 그를 사랑하게 되었을 줄은.
왜냐하면 자신은 그저 ‘에스티아 글레멘드’라는 악녀가 등장하는, 어처구니없는 로판 소설에 빙의했다고 생각했으니까.
* * *
마차가 창살로 된 대문 앞에 다다랐다. 마부가 시종과 얘기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철문이 열렸다. 마차가 긴 마찻길을 달렸다. 이제 저택에 거의 도착했다.
마차가 멈췄다. 집사가 마차 문을 열고 에스티아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집사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통 연령대가 있는 다른 가문의 집사와는 달리 이제 막 30대가 된 듯한 젊은 집사였다. 하지만 에스티아는 알고 있다. 이 얼굴은 그저 ‘늙지 않은 거’라는걸.
에스티아는 거북함을 참고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랜만이에요, 안셀.”
감정이 전혀 없어 보이는 표정을 피해 에스티아는 시선을 돌렸다. 바람을 타고 파란 장미 꽃잎이 흩날렸다. 이제 곧 다시 비가 올 것이다.
에스티아는 미간을 찌푸렸다. 황실 기사단의 훈련을 이끌어야 할 에버하르트가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걸 여기서 티 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는 에버하르트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니까.
에스티아는 집사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육중한 현관문이 열리면서 온통 파랗게 칠해진 내부가 드러났다. 에스티아는 욕지거리가 치미는 걸 억지로 참아야만 했다. 이곳에서 평생 살게 된다면 미치기라도 할 거 같았다.
“가주님께서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집사가 감정 없는 목소리로 에스티아에게 말했다. 에스티아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속이 울렁거렸다.
응접실 앞에 도착하자 집사가 노크를 하며 말했다.
“가주님, 글레멘드 영애께서 오셨습니다.”
에스티아는 침을 꿀꺽 삼켰다. 무서웠지만 두려운 걸 티 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설의 흑막이 원하는 대로 결말을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집사가 문을 열었다. 에스티아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응접실 안에는 에스티아가 좋아하는 차향이 은은하게 났다.
책상 위에는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과 바닐라 쿠키가 놓여 있었다. 모두 그녀의 취향에 따라 맞추었지만 에스티아는 그 모든 게 불쾌하기만 했다.
문이 닫혔다. 일순 숨이 막혔지만 에스티아는 침착하게 그를 향해 다가갔다.
라 빅터 후작은 창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에스티아는 그가 장미를 바라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원작에서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 유치하던 로맨스 소설에는 흑막이라고는 ‘에스티아 글레멘드’라는 악녀만 있을 뿐이었다.
원작 뒤에 선한 이들을 고통으로 몰고 간 진짜 흑막이 존재한다는 걸 알았더라면 좀 더 빨리 그녀의 세상을 지킬 수 있었을까.
아름다운 꽃밭은 황홀함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황홀함을 안겨 주었지만, 조용히 몸을 숨긴 악마에게는 그저 박제된 조화일 뿐이었다.
꽃이 살았든 죽었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을 테니.
“오스카. 당신이 바라는 대로 모든 걸 끝내고 왔어요.”
“아주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에스티아.”
후작이 나른한 미소를 지은 채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침착하던 마음은 오만한 미소를 보자 와장창 무너지기 시작했다. 에스티아가 감정을 제어하기 위해 숨을 한 번 훅 내뱉었다.
“그러니 이제 약속을 지키세요. 이건 후작님과 제가 정식으로 계약한 거 아닌가요?”
주먹을 쥔 에스티아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 저주를 바꿔 주세요.”
감정이 자꾸 북받쳐 올랐다. 에스티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영애, 일단 앉으시지요.”
후작이 나긋나긋하게 말하며 소파 쪽으로 손짓했다. 에스티아는 내심 감탄했다. 정말 겉으로만 보면 젠틀한 신사 같았다.
걷는 폼도 어찌나 우아한지. 에스티아는 잠깐이나마 저 몸짓에 홀렸던 자신에게 화가 났다. 가능하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멍청이! 어떻게 빙의 전이나 후나 둘 다 똑같이 멍청이냐!’
빙의 전에도, 빙의 후에도 알고 있었다. 직감적으로 위험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꼭 경계하고 경계하자.
살면서 뼈저리게 깨달은 사실이었기에, 에스티아는 이 악마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경계해 왔다.
‘바보같이. 그렇게 주의하고 또 주의했는데.’
전생과는 다르게, 나를 위한 삶을 살기 위해 이번에는 멍청하게 당하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악마 앞에 끌려와 있지.’
에스티아는 속으로 자책하며 손님용 소파에 앉았다. 라 빅터는 1인용 소파에 앉았다. 어째 손님용 소파와 주인용 소파 간의 거리가 전보다 훨씬 가까운 거 같았다. 에스티아는 티 나지 않게 라 빅터를 노려보았다.
“향이 좋지 않습니까? 이번 폰스탄 왕국이 반기를 들기 전에 콘스 왕국에서 사 온 차입니다. 폰스탄이 우리 제국에 반기를 든 후에는 콘스 왕국과 왕래하기가 불편해졌으니 딱 적시 적소에 잘 샀다고 볼 수 있지요.”
“콘스 왕국의 상단이 폰스탄 왕국을 거쳐 찻잎을 유통했으니까요.”
“역시 잘 아시는군요. 상단주다우십니다.”
빅터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물론 폰스탄이 완전히 제압되기는 했습니다만 폐허가 된 길을 복구하기까지 시간이 꽤 걸릴 테니까요. 병사와 기사, 마법사들까지 총동원이 될 테지만 쉽진 않을 겁니다. 제국 기사들과 병사들이 오죽 짓밟아 놓았던가요.”
차를 들던 에스티아의 손이 움찔했다. 딱 봐도 누굴 겨냥하고 말하는지 눈에 뻔히 보였다.
에스티아가 컵을 팍 내려다 놓았다. 소매에 차가 튀었지만 에스티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괜히 돌려 말하지 말고 본론부터 얘기하세요. 내가 일반 귀족 영애처럼 고분고분 당신의 얘기를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에스티아가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빅터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제야 빅터가 가식적인 미소를 거두고 소름 끼치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렇지. 여기에 기죽었다면 성취감이 분명 덜 들었을 거 같습니다.”
성취감? 이 새끼가 또 개소리하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세요. 그런 소리 한 번만 더했다가는……!”
“더했다가는?”
“…….”
“에버하르트에게 달려가기라도 할 겁니까?”
“당신 헛소리나 들을 바에는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지.”
에스티아가 지지 않고 빅터의 말을 맞받아쳤다. 빅터의 미간이 꿈틀했다.
“그러니 약속한 대로 저주의 방향을 바꿔 줘요. 당신이 원하는 건 이미 거의 다 이루어졌잖아.”
빅터가 몸을 일으켜 에스티아 앞에 섰다. 그러고서는 팔을 뻗어 소파 등을 짚어 그녀를 자신의 품 안에 가두었다. 조금은 움츠러들길 바랐지만 에스티아는 동요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주는 나한테만 걸어. 당신이 원하는 걸 가져올 테니까. 그리고…….”
에스티아가 쓰게 웃었다.
“내 영혼은 갖지 못할지언정 내 몸은 가질 수 있을 거야. 그것만으로도 당신한테는 꽤 괜찮은 수확 아닐까.”
에스티아가 해사하게 웃었다. 반면에 빅터의 얼굴은 점차 일그러졌다. 소파를 잡은 빅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날 도발해 봤자 당신한테도, 에버하르트에게도 좋을 게 없을 텐데.”
빅터는 소파에서 손을 뗐다.
“당신은 전에도, 지금도 참 겁이 없어. 덕분에 명을 단축시키고 있으니.”
“…….”
“그래, 당신이 나한테 생명과 영혼을 갖다 바치면 이 저주는 풀릴 겁니다. 단 당신의 거처는 내가 결정하게 될 테지만.”
에스티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렇게 될까 보냐!
“그래, 그럼 지금 당장…….”
“단.”
에스티아가 일어나려다 말고 그의 목소리에 멈췄다.
“오늘은 내 곁에 있어 줘야겠는데?”
그가 씩 미소를 지었다. 에스티아는 주먹을 꽉 쥐었다. 아마 오늘 밤이 고비일 것이다. 하지만 순순히 이 그림자에 삼켜지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