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평소처럼 자고 일어났는데 눈 뜬 곳이 평소와 다른 곳이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사실 로판 읽으면서 한 번쯤 해 본 생각이긴 했다. 그만큼 현실을 도피하고 싶을 때가 많았으니까.
하지만 설마 그게 정말 현실이 될 줄은 몰랐다. 막상 빙의해 보니 생각보다 낭만적인 느낌도 아니었고.
처음, 서양풍이 나는 저택에서 깨어났을 때, 그녀는 자신이 반쯤 미치거나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 어떤 젊은 여자가 들어와 “아가씨”라고 불렀을 때도 현실이라 믿지 않았다.
하지만 거울 앞에 섰을 때, 청색과 검은색이 미묘하게 섞인 머리카락과 짙은 푸른색 눈동자를 보았을 때가 되어서야 그녀는 뭔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아가씨?”
하녀로 보이는 여자가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거울을 붙잡았다. 아무리 봐도 이 여자는 그녀와 똑같은 행동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악!”
“악! 아가씨! 왜 그러세요?”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건 말이 안 돼. 지금 이건 무슨 상황이지?
“에스티아 아가씨! 또 차인 꿈이라도 꾸신 거예요?”
‘에스티아 아가씨……?’
잠깐만. 에스티아라면 어제 읽은 로판 소설에 나온 인물 이름인데.
그러고 보니 이 생김새는 분명 어제 읽은 로판에 나오는 악녀와 똑같지 않은가! 독자들에게 두고두고 욕을 먹은 ‘에스티아 글레멘드’ 말이다. 거울 속 여자는 책에서 묘사한 에스티아의 생김새를 그대로 빼닮아 있었다.
그녀는 손을 덜덜 떨며 소설 속 구절을 떠올렸다. 에스티아가 어떤 여자였는지. 그리고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에게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는지.
‘기사단장이자 대공인 에버하르트 바일을 에스티아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랑해 왔다. 그러니 갑자기 나타난 여자 따위가 그의 연인이 될 수는 없다. 그것도 글레멘드 가문과 척을 지고 있는 셰린포드 가문의 영애, 메르헨 셰린포드라면 더더욱.’
그녀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녀가 허겁지겁 달려오며 외쳤다.
“아이구! 에스티아 아가씨!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어디 아프세요?”
하녀의 말이 계속 들려왔지만 그녀의 머릿속엔 온통 소설 내용이 흘러 다녔다.
‘셰린포드 가문은 글레멘드 공작 가문에는 못 미치는 가문이었으나 칼 셰린포드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면서 단숨에 글레멘드 가문까지 치고 올라왔다. 칼 셰린포드가 후작에서 공작이 된 건 물론, 성품이 선하기로 유명한 메르헨 셰린포드가 대공 에버하르트 바일의 약혼녀 후보로 거론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 에스티아 글레멘드는 바로 이 소설, <대공과의 은밀한 결혼>의 서브 여주였다. ‘메르헨 셰린포드’가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고.
즉, 자신이 빙의한 에스티아 글레멘드는 남주인공와 여주인공을 방해하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이하는 파렴치한 악녀였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치는 이 여자는, 아니 자신은 누가 봐도 소설에서 묘사한 에스티아와 똑같았다. 신비로운 기운을 품은 짙은 호수 같은 눈동자가 이를 증명했다.
그 사실을 비로소 받아들이는 순간, 소설에서 보았던 내용들이 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차라락 펼쳐졌다. 소설 내용대로라면 지금 자신을 부르고 있는 이 하녀는…….
“메리……?”
“네! 아가씨! 도대체 왜 그러시는 건데요? 어디 아프신 거예요? 악몽이라도 꾸신 거예요?”
하녀가 울먹거리며 외쳤다.
에스티아가 하녀와 사이가 좋았던가?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에스티아가 하녀와 사이가 좋다는 내용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아고, 아가씨! 바일 대공 전하께서 그런 짓을 해서 그러시는 거죠?”
메리가 거의 울듯이 말했다.
바일 대공 전하라면 이 소설의 주인공 에버하르트를 말하는 건가?
그녀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메리에게 물었다.
“그런 짓?”
“예!! 어제 아가씨가 부득부득 바일 저택으로 쳐들어가더니 전하한테 왜 편지 답장 안 하냐고 화내셨잖아요!”
“내가?”
그녀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네! 그래서 대공 전하께서 아가씨가 쓰신 편지를 가져오더니 아가씨 눈앞에서 찢어 버리셨잖아요!”
아, 기억났다. 분명 그 장면이었을 것이다. 에버하르트에 집착하던 에스티아가 그가 자신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아 화를 냈던 장면. 그래서 에버하르트가 읽지도 않은 편지를 그녀의 눈앞에서 찢어 버린 장면. 그걸 본 에스티아가 에버하르트의 멱살을 잡고 울부짖는 바로 그때 그 장면!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이 에스티아에 빙의했다는 사실을 이제 부정할 수는 없을 듯했다.
“그래서 그게 언젠데?”
“언제라뇨, 아가씨! 바로 어제였잖아요.”
세상에, 그것도 어제라고? 하다못해 집착하기 이전에 빙의했으면 또 나았을 것을, 이미 스토커처럼 집착하고 난 후에 빙의를 해 버렸구나.
“망했네, 망했어.”
“망한 것뿐일까요! 바일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아가씨께 사과하라고 요청했잖아요! 솔직히 말이 요청이지, 거의 협박이더구먼요! 흑.”
옳다구나! 아주 꿈도 희망도 없구나!
“아, 정말, 당황스럽네.”
정말 얼떨떨했다. 당장 소설에 빙의한 것도 당혹스러운데 하필 빙의한 인물도 악녀 서브 여주라니.
“잠시 생각 좀 해 볼게.”
에스티아는 메리에게 양해를 구하고 생각에 잠겼다. 역시 지금 당장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있잖아 그럼, 지금이라도 내가 그 사람을 포기하면……?”
“예? 바일 대공 전하를요? 아가씨가요?”
메리가 ‘뭐 이런 미친 애가 다 있어’라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그러면 무슨 술수를 쓰냐고 뭐라고 할걸요? 게다가 아시잖아요. 가주님께서 아가씨를 바일 공작 부인으로 만드시려고 엄청 혈안이신 거.”
애써 행복 회로를 돌리려는 에스티아의 노력이 무색하게 메리는 다시 한번 그녀에게 꿈과 희망도 없음을 못 박았다.
하기야 소설의 큰 설정 중 하나가 글레멘드 가문과 셰린포드 가문이 서로 물고 뜯지 못해 안달 났다는 거니까. 글레멘드 가문이 절대 좋은 상품인 ‘에스티아 글레멘드’를 절대 순순히 놔 줄 리가 없다. 어떻게 가꾼 상품이던가.
‘그니까 당장 에스티아의 아버지인 로셸 글레멘드부터 꺾어야 한단 말이지?’
하지만 차라리 에버하르트에게 무릎을 꿇을지언정 로셸은 절대 딸 에스티아를 자유롭게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결말이 뭐다? 그녀는 원작대로 에버하르트와 엮이고 여주인공 메르헨과 엮이다가 아주 참혹한 죽임을 당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아니, 아니, 절대로 싫어!”
그녀는 머리를 감싸며 절규했다. 메리는 그런 그녀를 다른 뜻으로 해석하고는 말했다.
“그래도 사과하셔야 해요, 아가씨! 그러면 대공 전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같은 공간에서라도 있어 주실지도 몰라요.”
아니, 됐거든!? 이쪽에서 사양이야!
에스티아는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분명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하지만 무슨 수로? 아무리 소설 속이라고 해도 누군가를 해치거나 범죄를 저지르면서까지 벗어나고 싶지 않다. 그래 봤자 또 다른 방법으로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그녀는 침착하게 숨을 고르며 머리를 굴렸다. 분명 돌파구가 아예 없진 않을 것이다.
* * *
아무리 그녀가 상황 파악을 빨리 했다고 해도 갑자기 빙의한 건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에스티아는 메리가 가져다준 차를 홀짝이며 소설 속 내용을 정리했다. 덧붙여 놀란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금은 당혹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었다. 여태 살아오던 삶이 갑자기 사라진 것뿐만 아니라 소설 속 인물에게 빙의를 해 버렸으니.
그래도 에스티아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애썼다. 어쩌면 지금은 그렇게 최악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게, 자신이 이곳 사람들보다 유리한 게 있다면 이 소설의 내용을 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미래를 그녀가 ‘어느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그녀는 절대로 전에 에스티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에게 집착할 생각이 조금도, 아주 조금도 없다는 것이고.
불행 중 다행으로 대공이 황제에게 그녀를 처형하라는 청원을 하기 전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빠져나가냐는 건데…….’
아버지 로셸로부터 벗어나고, 남주 에버하르트와 다시는 안 보는 방법. 그리고 메르헨과는 아무런 악감정 없이 끝내는 법. 동시에 자신의 이미지를 해치지 않는 법.
‘그럼 이것밖에 없어.’
에스티아는 비장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설령 가문에서 내쫓아지더라도 스스로 먹고살 방법이 필요했다. 아무래도 전생에서의 본업을 살려야 할 거 같았다. 전생 때처럼 다시 ‘사업가’가 되는 것이다.
‘원작대로라면…… 괜찮은 사업 아이템이 있지.’
그녀는 벌떡 일어났다. 멍하니 차를 마시던 주인이 갑자기 자신감 있게 일어나자 메리가 ‘드디어 얘가 미쳤구나.’라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도 제정신이지.
“메리! 내가 아버지 몰래 숨겨 둔 비자금이 있지 않았어?”
“네? 그랬죠. 가주님한테 받은 용돈이요. 나중에 두 분이 결혼하게 되면 대공 전하께 예물 선물할 때 쓰실 거라며 차곡차곡 모아 두셨죠.”
하! 예물 선물?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위해 돈을 모은다고?’
그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 이미 전생에서 제대로 배웠다 이거야!
“그걸 왜 그 남자한테 써? 나와 너네를 위해 써야지.”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메리가 멍한 눈빛으로 에스티아를 바라보았다.
에스티아가 대공 전하를 저렇게 얘기를 한다니. 아무래도 오늘 여러모로 이상하시다.
메리는 아가씨의 몸에 다른 사람이 들어왔나 생각했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에스티아는 그런 메리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소설 속 내용을 곱씹고 있었다. 에스티아의 청원을 간절히 바란 두 사람이 있었다. 남주 에버하르트 그리고 아버지 로셸.
에버하르트가 먼저 황제에게 에스티아를 죽여 달라는 청원을 하고 이를 로셸이 지지했다. 와중에 우리 여주인공은 그런 남주를 만류하며 청원을 반대했다.
그때 유일하게 어떤 하녀가 울었다고 나와 있었다. 단 한 줄이었지만. 에스티아는 그 하녀가 메리라고 확신했다.
“날 많이 걱정했지, 메리?”
“당연한 거 아니에요! 어제 아가씨가 얼마나 울었는데!”
메리의 눈가가 다시 촉촉해졌다. 에스티아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울긴 많이 울었는지 얼굴이 퉁퉁 부어 있었다.
에스티아가 사랑하는 남자를 괴롭게 했을지언정, 집안 사용인들한테는 착실하게 잘한 모양이었다. 역시 돈을 쓸 데가 잘못됐다.
“메리, 오늘 며칠이지?”
“엘레노르 제국력 6월 13일이요, 아가씨.”
6월 13일. 그 ‘사태’가 일어난 때가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여름에 일어났다고 했으니 얼마 남지 않은 건 분명했다.
그 ‘사태’는 바로 장마였다. 원래 세계에서라면 장마가 그렇게 별일이냐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엄청난 별일이었다.
마나를 보호해 주고 치료해 주는 약초가 비에 아주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마나는 마법사들에게 꼭 필요한 존재였던 만큼 제국에서는 비가 오기 전 신관들이 날씨를 계측했고, 이를 전달받은 상단들이 미리 산으로 해당 약초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그 비는 예고도 없이 내렸다고 나왔지.’
나라가 혼란에 빠질 것은 자명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신관도 아닌데 비가 온다고 말하고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랬다가는 정말 정신 병원행이었다.
“우리와 자주 거래하던 상단이 있지, 메리?”
에스티아는 소설 속 한 줄로 스쳐 지나간 구절을 떠올리며 물었다.
“네, 그렇긴 한데 그건 왜…….”
귀족으로서의 품위는 잃으면서 ‘에스티아’로서의 품위는 잃지 않는 법.
“상단에 연락해. 어…… 딱 2주 뒤에 만나자고.”
“네? 상단에는 왜요, 아가씨?”
소설을 아무리 휘리릭 읽었다고 하더라도 그 소설의 세계관은 잘 알고 있었다. 이 제국을 지키는 마법사들의 ‘마나’가 위태로워지면 이 나라도 위태로워진다는 것.
‘누구한테 죽을 생각도 없지만, 재난에 죽을 생각도 없어!’
“지긋지긋한 짝사랑 그만해야지. 언제까지 성공 가능성 없는 일을 할 거야.”
“…….”
메리의 시선이 멍했다. 당최 지금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몸에 멍이 많이 들었네. 어제 그 집 사람들이 날 아주 끌어내기라도 했나 보지?”
“네, 아주 질질 끌려 나오셨…….”
그 말을 하다 메리는 손으로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흥, 그러라지. 내가 다시는 그 꼴 당하나 봐!”
이제는 너한테 목매는 거 다 디 엔드다 이거야!
갓 빙의했음에도 전생에서의 거친 삶과 사업적 지식 때문에 그녀는 금방 침착함을 회복했다.
그래서 곧 닥친 상황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2주 뒤, 바일 가문의 기사가 그녀의 사과를 받기 위해 저택 초인종을 눌렀을 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