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화
2. 최초의 이방인
사실 다른 농노들이 깨워줄 수도 있었지만 농노들은 어차피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야안을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제일 어리고 약하여 가장 얕은 잠을 잘 야안이 먼저 도망쳤을 것이었으나 한 덩이의 검은 빵에 의한 포만감에 빠져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건방진 돼지 새끼, 감히 이 브란 님이 왔는데 자고 있어. 이 쓰레기 같은 녀석, 토니 같은 사기꾼 개X끼.”
토니는 예전에 브란의 전 재산을 털어 간 노름꾼이었다. 그자 때문에 재산도 몽땅 잃었으며 노름에 발을 들이게 되었는지라 브란은 토니를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다.
더구나 오늘 브란의 상태는 상당히 좋지 못했다. 어제 잃은 노름의 빚을 만회하려 영주의 재산에 손을 댔기 때문이다.
농노 한둘 죽는 거야 흔한 일이지만 영주의 재산은 꼬박꼬박 그 쓰임새를 보고해야 했다. 단 1브람이라도 안 맞는 날에는 브란의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오늘의 브란은 상당히 위험했다. 더구나 토니의 얼굴이 야안의 얼굴에 투영되자 그의 분노는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는 야안을 패고 또 팼다.
머리에서는 피가 터져 나왔고, 브란이 치는 막대기를 막던 오른팔이 부러졌다. 부러진 오른팔로 막지 못해 오른쪽 얼굴의 일부는 형체를 알기 어려울 정도로 부었다. 운 좋게 먹은, 소화되지 못한 검은 빵은 이미 토한 지 오래였다.
새벽닭 울음소리가 울려서야 브람의 행패는 끝이 났다. 그는 피 묻은 몽둥이를 아무 데나 던지더니 속 시원하다는 얼굴로 잠자리에 들었다.
야안은 온몸에 일어난 고통에 정신을 잃을 듯했지만 애써 정신의 한 줄기를 악을 쓰며 잡았다.
막는 도중 두 번이나 기절을 했지만 다시 정신을 잃는 것이 두려웠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실제로 한 달 전에 죽은 한스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머리가 터진 그 날은 괜찮았지만 그다음 날 잔 뒤로 영원히 잠에 들었으니.
하지만 육체는 두려움에 떠는 야안의 의지를 무시한 채 그 한 줄기의 의식마저 끊어버렸다.
* * *
인류가 사라진 지구에 변화가 생겼다.
인류의 마지막 과학자들이 남긴 과학의 힘으로 인해 대자연의 자정 능력이 시간이 지나 조금씩 돌아오면서 놀라운 시너지 효과를 보인 것이다.
지금에 이르러 지구의 자정 능력은 놀라울 정도로 향상된 상태였다.
하지만 아쉬운 일들도 있었다. 그 자정 능력에 의해 인간이 세운 문명의 흔적 대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터져 나오는 용암은 모든 것을 불태웠으며, 지진에 의해 국가는 통째로 붕괴되어 땅 밑으로 사라졌다. 강이 생겨나기도 했으며 새로운 대지가 솟아오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지구의 자정 활동은 지구의 깊숙한 곳에 자리한 R2―아리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R2―아리스에게 있어서도 이 충격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하여 충격을 받게 되자 본래 여유 연산 능력은 물론이고 가상현실 게임을 돌리고 있는 아리스의 일부 연산 능력마저 그 충격을 막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다행히 1,000년이 넘게 발전된 R2―아리스였기에 앞으로의 방어 시스템을 더 강화하는 데 다시금 체계를 잡을 수 있었고, 이후부터 어떤 피해도 없이 그 충격들을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가상현실 게임인 아리스의 일부 연산 능력을 돌리는 과정에서 잠깐의 오류가 생겼다. 물론 그 오류는 복구가 되었지만 아리스의 그 거대한 세계에서 그 오류로 인해 파생된 변화는 막을 수 없었다.
‘X신 같은 여편네. 이딴 쓰레기를 낳고 뒈져 버리다니. 뭘 봐! 이 개X끼야.’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사나운 목소리가 그를 향해 소리쳤다. 그 모습이 몹시도 무서운 터라 처음에는 브란이라 생각한 야안이었지만, 이내 그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가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란 사실을.
아버지에게 있어 그는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었지만, 아버지는 야안을 아내를 죽인 살인자로 여겼다.
본래, 아버지는 용병 출신으로 은퇴 후 마을 자경단에서 일을 했으나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번번이 사고를 치느라 감옥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고, 자신은 마을 주민들 손에 이리저리 떠돌다 결국 감옥에서 나온 아버지의 하루 술값에 팔려 가게 되었다.
야안은 이제 겨우 아홉 해를 살았지만 지금껏 아무도 자신을 사랑한 이가 없다는 생각에 너무 슬펐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는데 조심스러운 손짓이 자신의 눈가를 훔쳤다. 무언가 싶어 궁금증이 일어났지만 무섭기도 해 조심스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낯익은 얼굴이 자신의 눈에 들어섰다.
그 얼굴은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에게 호의를 보였던 마리의 얼굴이었다. 그녀는 몹시도 안타깝고 지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신이 의식을 차린 것을 알자 크게 미소를 보이며 반겼다.
“아! 아리스 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그래, 내가 누구인지 알겠니?”
야안은 앞니가 띄엄띄엄 있는 그녀의 그 미소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다 생각했다. 여신 아리스 님이 저러할까? 야안은 입안이 온통 터져 도저히 말문을 열지 못해 그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야안의 대답에 한참을 호들갑을 떠는 그녀였다. 야안은 도대체 이것이 무슨 영문인가 싶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어두운 밤이었으나 촛불의 빛에 주위를 살피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구멍이 자리해 비 오는 날에는 비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천장은 빈틈도 없었으며 또한 아무리 뛰어도 닿지 않을 만큼 크고 높았다.
침구 또한 좋은 향기가 나는 새것으로 보송보송한 것이 처음 느껴보는 안락함이 자리했다. 벽 한쪽에는 벽난로가 자리하여 따사롭고, 커다란 나무문이 있는 창가와 그 문 옆으로는 책이 가득 자리한 서재가 있었다.
의아함 가득한 야안의 모습에 마리는 벽난로 근처에 걸어놓은 단지에서 멀건 죽을 떠 와 야안에게 먹이며 말했다.
“자, 아. 그래그래, 잘 먹는구나. 일단 이것부터 다 먹으면 이야기할 터이니. 자, 다시 아 해보렴.”
야안은 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자신에게 죽을 건네는 마리에 부끄러우면서도 기분 좋은 느낌에 저도 모르게 새끼 새처럼 마리가 떠준 죽을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그렇게 금세 죽 한 그릇을 비워낸 야안은 곧 마리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말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마리는 다음 날 아침에 야안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아마도 벌을 받느라 아침을 못 먹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그녀의 심장은 바늘로 콕콕 찌르는 듯 아파왔다. 마리는 평소 힘든 사람들을 많이 도왔지만, 이같이 마음이 동한 이는 처음이었다.
그날 야안을 보고 난 뒤 계속 눈에 밟혀 그날 밤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마치 전쟁 통에 죽어버린 피붙이가 돌아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리는 이것이 주신 아리스 님께서 말씀하시는 인연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지라 몰래 빵이라도 주려 농노들이 있는 안식처로 가는 중에 그녀는 짚더미 사이에 대충 파묻은 한 구의 시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크기가 어린아이만 했기에 왠지 불안한 예감이 들어 그녀는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갔고, 덮은 흙을 치우자 이내 그 시체가 야안이라는 것을 알았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에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야안을 만지려는데, 마침 야안의 입이 작게 콜록거리며 움찔거렸다.
‘살았구나. 그래, 살아 있구나.’
그 생각이 들자 어디서 그런 힘이 일어난 것인지 그녀는 그 늙은 몸으로 야안을 업어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다행히 배운 것이 많은 베론 촌장은 간단한 응급치료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이런 작은 마을에 치료사가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기 때문에 촌장들은 이런 치료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어야 했다.
우울증에 걸려 본래라면 마을 사람들이 다쳐도 도와주는 것을 꺼릴 터이지만 둘째 부인이 재물을 들고 도망가 버리고, 마지막 남은 첫째 부인이 생전 처음 그렇게 부탁하자 그는 상당히 귀찮아하면서도 결국 야안을 살폈다.
만사가 귀찮은 그였지만 야안의 처참한 모습에는 그런 그로서도 마음이 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여기저기를 살피더니 작게 한숨을 내쉰다.
“휴우, 그나마 다행이라 할까? 당신이 준 목도리가 이 아이를 살렸어. 이 목도리가 아니었다면 갈비뼈가 폐를 찔러 죽었을지도 몰라.”
다행히 대대로 내려오는 응급치료술은 그 수준이 낮지 않았고, 마리의 간호가 워낙 극진한지라 야안은 죽을 것이라는 브람의 예상을 깨고 살아날 수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 벌써 일주일 전이라 했다.
그렇게 지난 일을 들었던 야안은 죽을 먹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녀의 따뜻한 마음에 동해서 그런지 밀려오는 잠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 고맙습니다, 아주머님. 제, 제가…….”
‘제가 받은 이 큰 은혜를 어찌 갚을 수 있을까요?’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야안은 정신을 잃었다. 그는 그 와중에 머리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길에 만약 어머니가 있다면 이 같지 않을까 생각했다.
야안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이틀이 지나, 해가 중천에 떴을 때쯤이었다. 이만큼 잠을 잔 적은 처음이라 그는 불편한 몸임에도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 느껴보는 잠이 주는 느슨함을 더 느끼고 싶어 가만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데 눈앞에 무언가 엄지만 한 네모나고 희끗희끗한 것이 자리했다.
그 안에는 실 같은 그림이 자리했는데, 그는 그것이 문자라는 것을 알았다. 평생 노역으로 살아온 그가 문자를 읽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나, 그는 그 문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스탯 창.”
그러자 그 네모나고 희끗거리는 것이 조금 더 짙어지더니 자신의 두 손 크기만큼 펼쳐졌다.
//최초로 아리스에 접속하셨습니다. 주신 아리스의 축복으로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칭호를 내립니다. 모든 스탯 10이 추가로 주어집니다.//
//이름 : 야안
레벨 : 1
칭호 : 최초의 이방인
생명력 : 220
마나 : 200
힘 : 2(+10)
민첩성 : 2(+10)
행운 : 2(+10)
지혜 : 2(+10)
마나 : 0(+10)//
이게 뭐지? 야안은 갑자기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 이상한 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구나 자신은 글을 배운 적이 없는데,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뿐인가?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칭호로 인해 추가된 스탯 덕분에 머리는 한없이 맑고 가벼워졌으며 전신에는 힘이 남아돌 지경이었다.
접골을 한 오른팔의 부목을 떼어내어 팔을 돌리니 어느새 회복이 되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배꼽 밑 부분이 뜨끈한 것이 무언가 이 안에 있는 것 같은데 그 기분이 묵직하여 나쁘지 않았다. 아니, 이것이 뭔지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큰 힘이라는 것을 알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것은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오랜 농노 생활 때문에 그에게 자신감이라는 단어는 아예 존재치 않았다. 자존감이 극히 낮은지라 매사에 소극적인 그였건만 야안은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칭호로 인해 신체가 변해 버리면서 상실된 자존감을 많이 되찾은 상태였다.
어린 나이의 아이답게 야안은 잠시 들떴지만 이내 길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몸이 낫고 전신에 힘이 샘솟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의 신분은 농노였다.
‘그래, 그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지.’
머리가 맑아져 자신이 처한 현실과 주위 상황을 쉽사리 파악하게 되면서, 야안은 들뜬 기분을 단숨에 가라앉혔다.
잠시 그렇게 자신의 주제를 파악하며 한숨을 내쉬던 야안은 자신의 몸을 살펴보았고, 그제야 자기가 입고 있는 옷이 다른 옷임을 알 수 있었다. 낡았지만 좋은 천인 듯 피부에 닿는 감촉이 매우 부드러웠다.
예전 자신이 걸치던 넝마를 다시 입기 두려울 정도였다. 새로운 옷에 신기해 기뻐하는데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갑자기 방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