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4화
저도 모르게 두려움이 생겨 고개를 돌리니 들어선 이는 다름 아닌 마리의 남편인 베론 촌장이었다.
야안 또한 이 마을에 들어선 날 멀리서 본 적이 있었는지라 그가 누구인지를 알고 두려운 마음에 고개를 조아렸다.
“농노 야안이 베론 촌장님을 뵙습니다.”
그 모습에 베론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는 더 이상 그런 예를 보이지 않아도 된다. 이제 너는 농노가 아니다.”
베론의 그 말에 야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 모습이 너무도 어리숙해 보이는지라 촌장은 마땅치 않다는 듯 혀를 내차더니 이내 방문을 크게 닫으며 나섰다. 야안은 그 태도에 그의 심정이 매우 불편함을 알아차린지라 긴장감에 몸이 웅크려졌다.
그렇게 어찌해야 할지 몰라 하는데 곧 발소리가 요란히 들리더니 마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마리는 상당히 들떠 있었다. 그녀는 어딘가 갔다 온 듯 평소와 달리 치장을 한 상태였는데 급히 온 듯 거친 숨을 내쉬던 그녀는 야안의 오른팔에 부목이 없음에 걱정했다.
“답답하더라도 부목을 해야 한다. 덧나면…… 어머나!”
걱정하는 그녀 앞에서 야안은 걱정 말라는 듯 자연스럽게 오른팔로 크게 원을 돌렸다.
“괜찮습니다, 아주머님. 이제 다 나았는걸요. 생각보다 다친 곳이 깊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야안의 말에 마리는 참으로 다행이라는 듯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주무르다가 문득 중요한 사실을 기억했다. 그리고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말문을 열었다.
“아리스 님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셨나 보구나……. 혹시 남편에게서 얘기를 들었니?”
야안은 촌장님이 마리의 남편이라는 말에 놀라워하다 이내 그녀의 질문을 생각하고는 작게 고개를 조아리듯 끄덕였다.
“제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저보고 농노가 아니라 하셨습니다.”
그 말에 마리는 미소를 보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 외에는 혹시 듣지 못했니?”
“네, 제가 잘못 들었나 싶어 촌장님께 되물으니 아무 말 없이 나가셨어요.”
야안의 말에 마리는 촌장이 있는 곳을 보며 화를 냈다.
“하여간 이이는!”
남편의 무뚝뚝함에 마리는 고개를 내젓다 이내 힘겹게 말을 꺼냈다.
“사실 방금 전 나는 남편과 함께 영주성에 갔다 왔단다.”
“영, 영주성 말씀이십니까?”
야안은 비록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칭호로 인해 자존감이 많이 회복이 되었다지만 오랜 농노의 습관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영주라는 말에 간이 오그라지는 듯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마리의 말은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래, 나는 영주성에 가서 너를 농노에서 풀어주고 양자로 삼겠다고 말씀드렸단다. 다행히 영주님께서는 이를 받아들이셨고, 사실 너의 의견을 물어봐야 했지만, 브란이 영주의 돈을 횡령하여 목이 달아난 뒤 조사관이 마을을 휘젓고 다니는지라 너의 의사를 물어볼 기회가 없었단다. 너는 이해해 줄 수 있겠니.”
야안은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머리임에도 마리의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말은 이해했지만 그보다 이 기적 같은 일에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농노에서 벗어나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할진대 언제나 혼자였던 자신에게 빛이 돼주었던 그녀의 아들이 된다니.
저도 모르게 어머니였으면 하는 존재가 실제로 어머니가 된다니. 그는 믿을 수 없었다.
야안은 거친 파도처럼 휩쓸리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손발을 오들오들 떨어대며 되물었다.
“저, 정말인가요. 제가 마리 님의 아들이 되는 건가요. 오! 맙소사, 그것이 사실이라면 저는 이 커다란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요?”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는 야안의 모습에 마리는 떨리는 그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 잡아주는 그녀의 손은 차가웠지만 야안은 하늘의 태양보다 더 뜨겁다고 느꼈다.
“너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나의 아들이 되어준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축복이란다. 아! 아리스 님이시여, 감사하나이다.”
다행히 야안이 크게 자신을 반기자 긴장이 풀린 마리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렇게 새롭게 연을 맺게 된 두 모자는 오랜 세월 동안 메우지 못한 감정을 나누었다.
그렇게 한 시간여를 서로를 부둥켜안던 모자는 눈이 부은 채 점심을 들어야 했다.
부인의 극성에 야안을 아들로 받았지만 사실 베론 가한은 영 야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농노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베론 가문의 조상이 예전 이곳 영주성에서 집사를 한 일이 있어 그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비록 남작가의 집사였지만 집사는 어엿이 영주의 가신. 그 직위는 준남작에 달했다. 그러한지라 농노를 베론 가문에 입적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은 것이다.
만약 그에게 다른 자식이 있었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일이지만 이미 그에게 후사는 없었고 마리가 그토록 마음에 들어 했으며, 베론 가문을 자신의 대에서 끊게 할 수 없다는 압박감과 우울증이 어울리면서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을 일을 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역시 농노였던 탓일까? 사내의 호쾌함을 좋아하는 그로서는 눈치를 살피는 야안의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휴, 그래도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뭐 저런 것도 시간이 지나면 차차 나아지겠지. 아니, 나아지도록 가르쳐야지.’
그는 자신의 눈치를 살피면서 빵과 콩이 들어간 수프를 먹는 야안을 보며 말했다.
“너는 이제 베론 야안이다. 하지만 베론 성을 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야.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나는 너에게 이를 가르치는 데 그 어떤 수단과 방법도 가리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너는 늦게 배우는 것이니 말이다.”
그의 말에 실린 의지가 워낙 확고한지라 야안은 두려워 이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네, 저는 앞으로 베론이라는 성을 욕보이지 않도록 촌장님의 가르침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야안의 말에 베론 가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앞으로는 촌장이라 부르지 마라.”
그 말에 야안은 베론 가한의 말의 뜻을 알고 답했다.
“네, 아버지. 감사합니다.”
금방 자신의 뜻을 알아듣자 베론 가한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멍청이는 아니군.’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베론 가한은 식사를 마친 후 야안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의외로 야안의 그 뛰어난 머리에 베론 가한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한 번을 말해주면 잊지 않았고, 문장의 조합 법칙을 다 말하지 않아도 이미 이해하고 있었던 탓이다.
대륙어는 뜻 문자인 룬 문자와 달리 소리 나는 대로 쓰는 음 문자라 배우기는 쉬운 편이지만 가르친 지 한나절도 되지 않아 어설프게나마 글을 읽기 시작하는 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베론 가한은 듣지 못했다.
그만큼 야안의 모습은 크게 놀라울 만했다.
물론 단어의 뜻이나 여러 가지 부수적인 것을 배우는 데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의 속도라면 열흘도 안 되어 웬만한 책을 읽는 데 불편함이 없을 정도로 숙달할 것이다.
이 같은 야안의 변화는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칭호의 영향 때문이었다.
보통 일반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지혜는 3에서 5 정도였다. 한데 이 칭호로 인해 10을 더해 12가 된 야안의 머리는 세상의 법칙을 수습할 수 있는 하급 현자를 눈앞에 두게 되었다.
그만큼 이 최초의 이방인이라는 칭호는 상당한 이득을 주는 것이다.
이 칭호가 왜 그렇게 놀라운 것인가를 설명하자면 아리스가 왜 게임이라는 틀을 넘어 새로운 세계라고 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수많은 우주의 지식과 근원과도 같은 진리를 파고든 끝에 만들어진 아리스는 현실과 전혀 다름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아리스에서 할 수 있는 것은 현실에서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몸을 구성하여 움직이게 하는 전기적 신호는 인간의 근원적 생명 에너지이며, 고대 인류가 동쪽에서는 기라 하여 도를 닦거나 수련을 하고 서쪽에서는 마나라 하여 주술이나 기적을 행한 이것의 정체는 바로 지구의 거대한 에너지 자기장이었다.
인간은 수련을 통해 이 기운을 빌려 더 강한 에너지로 몸을 활성화하고 또한 이 기운을 스스로의 의지로 통제하여 여러 형태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가능했다.
이미 오래전부터 가상현실을 다루어 인류에게 행복을 주었지만, 정작 100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야 아리스라는 게임을 완성하게 된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다.
아니, 실상 그것만이라면 그렇게 많은 세월이 필요하지 않았을지 모르겠지만, 레벨이라는 것과 스탯이라는 시스템을 적용하기 위해 10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를 적용하는 건 우주의 무수한 근원적 법칙들을 알고 엄청난 연산 능력이 합쳐져야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빠른 발전을 위한 레벨과 스탯이라는 시스템이 없다면 R2―아리스가 아리스를 만든 의미가 없다.
인간이 가상현실이라는 것에 젖어 어느 순간부터 퇴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만든 게 아리스인데, 가상현실이라 해도 모든 것이 똑같은 세상에서 힘들게 노력하며 발전하는 머저리는 없는 것이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많은 도구와 도움을 얻을 수 있는 현실에서 노력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하니 이 레벨과 스탯 시스템은 상당히 중요하다.
레벨을 올리면 한 개의 스탯을 주게 되는데 이걸로 발전하고 싶은 곳에 투자하면 된다. 물론 그렇다고 이 스탯은 레벨을 올려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말한 바처럼 현실과 같은지라 근력과 체력을 키우면 힘이 올라가게 되고, 신체 운동 능력을 높이면 민첩성이 올라가며, 공부를 하여 진리에 한층 다가가면 지혜가 올라간다.
참고로 힘이 강해지면 체력 20이 올라가고, 민첩성이 올라가면 그 몸의 신체 반응 속도가 올라가고 지혜는 머리를 활성화해 지능지수를 높여준다.
또한 마나라는 스탯이 있는데 이는 생산직이 아닌 이들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행운이라는 스탯이 있다. 이는 계륵과 같은 스탯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올린다 해도 당장 겉으로 보기에 큰 이득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행운 스탯이야말로 레벨이나 특정 퀘스트 또는 특정 직업에서만 올릴 수 있는 사실상 아리스에서 유일하게 현실과 조금 다른 스탯이라 할 수 있다.
계속 올리다 보면 육감이라는 것이 생기게 되기도 하여 위험을 미리 인지하는 능력을 가지는 등 많은 변수가 있는 특이한 스탯이다.
그러나 초기에 이 스탯을 찍어 올린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할 수 있다.
처음 시작부터 거의 아무것도 없는 몸으로 시작하는 아리스에서는 신체 능력을 올리는 데 급급하기 때문이다. 하니 살기 바쁜 그들 중에 이 운 스탯만을 찍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한데 그런 운을 벌써 10스탯이나 올려 운이 12나 되었으니 이로 인해 그의 인생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또한 아직 마나 심법을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마나의 양은 검사로 치면 소드 중급 유저에 달할 정도로 오른 상태였다.
아직 마나의 활용을 알지 못해 그저 무언가가 있으리라 생각만 하지만 야안이 마나 심법을 몇 년간 계속 공부하여 응용하는 법을 배우고 또한 마나의 양이 더 늘어난다면 검기는 무난히 생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기능을 가진 스탯을 50이나 올린 상태였으니 베론 가한이 처음 야안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과 달리 그에 대한 호감도는 점차 크게 상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