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41화
12. 청혼
가을이 쓸쓸히 지나가는 무렵이었다.
저 마을 너머 산지를 물들이던 알록달록한 색들은 언제나 푸르른 소나무만을 남겨둔 채 그 자취를 감추었다.
어제는 첫 서리가 내렸는지라 얼어붙은 땅에 어른들의 움직임은 다른 때보다 느릿하여 느긋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아이들은 춥지도 않은지 두껍지도 않은 외피를 입은 채 여기저기서 깔깔대며 마을 곳곳을 누볐다.
어린 여자아이는 그런 모습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다 누군가 올라오는 소리에 창문을 닫았다. 급히 피로한 몸을 움직여 침대에 들어간 그녀의 짐작대로 방문이 열리며 중년의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우리 딸, 일어났어?”
일을 급히 마치고 왔는지 아버지는 추운 날씨에도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딸의 머리를 만지려다 이내 자신의 몰골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녀의 방에 있는 천으로 땀과 먼지를 닦아냈다.
그는 한참을 공들여 몸을 닦고 나서야 딸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해열제가 효능을 본 것인지 어젯밤보다는 열이 많이 내려갔지만, 아직 미지근한 열이 남아 있어 여전히 병세가 짙음을 알 수 있었다.
걱정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에 멜리나는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는 말을 꺼내려 했다.
“콜록콜록, 아빠, 난 괜찮아.”
하필 아빠가 있을 때 기침이 나올 건 또 무엇인가? 조금 전 심심함을 이기지 못해 창문을 열었던 것이 화근인 모양이다.
자신의 기침에 아빠는 크게 표정이 바뀌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고 멜리나는 그 모습을 보며 크게 자책했다.
‘바보같이 뭐가 그리 보고 싶다고.’
동네 아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왜 그렇게 즐거워 보이던지. 이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정신을 차리고 보면 자신은 창밖 너머의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린 그녀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겨우 아홉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멜리나였지만 유독 허약하게 태어나 인생의 반을 침대에서 누워 지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밖의 세상에 대한 동경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러지 말아야지. 아빠가 저렇게 걱정하시잖아.’
혼자 속으로 속삭이던 그녀는 다시금 튀어나오는 기침을 참으며 맑은 미소를 보였다.
“큼, 큼. 괜찮다니까요. 아빠, 그보다 나 배고파.”
미소를 보이는 딸의 모습에 한스는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오냐, 안 그래도 어머니가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 일단 이것부터 먹고 참으려무나.”
그러며 예전에 상인에게 부탁해 사놓은 사탕을 하나 까 입 안에 넣어주었다. 사탕 특유의 달달한 향이 그녀의 입 안을 굴러다녔지만, 사실 멜리나는 사탕의 단맛보다는 입 안이 터 꺼슬꺼슬했던 탓에 사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도 아빠가 자신을 위해 어떻게 사탕을 얻었는지 짐작하기에 그녀는 아주 맛있다는 듯 미소를 머금었다.
한스는 일교차가 커지자 역시나 심한 감기를 앓는 딸의 모습에 가슴이 아팠다.
딸은 아파하는데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머저리 같았다. 베론 촌장님께 진료를 받아 약을 지었지만, 어디까지나 임시로 병의 기세를 누를 뿐 완치는 힘들 것이다. 어제는 끙끙대는 딸의 이마가 불덩이 같아 깜짝 놀랐다.
그래도 여름에 비하면 나았다. 여름에 이 같은 증세를 보였으면 살얼음조차 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딸에게 약초 달인 물을 먹였으나, 얼마 먹지 못하고 토해 버리고 말았다.
이런 경우 몸에서 발생하는 열 때문에 장기가 약해진 탓이라고 베론 촌장님께 배웠던 터라 그는 서둘러 이불을 치우고, 밖에서 구해 온 얼음 주머니를 겨드랑이와 이마 위에 올려 열을 낮추었다.
멜리나는 열 때문에 정상이 아닌 듯 오한으로 온몸을 떨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꾹 참았다.
곧 30분가량이 지나자 몸에 열이 떨어진 듯 딸은 조금 편한 기색을 보였다. 그런 딸의 모습에 안도하던 한스는 아내가 준비해 준 약초 물을 딸에게 먹였다.
딸은 그제야 속에서 받는 듯 더 이상 토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지나 약효가 돌아 멜리나는 많이 편안해진 모습을 보였다. 그제야 마음을 놓은 한스는 얼음 주머니를 치우고 이불을 눈 아래까지 덮어줬다.
딸은 조금 전 토해 내던 탓에 눈물이 고인 채로 자신과 부인에게 말했다.
“엄마, 아빠. 미안해.”
그렇게 말하던 딸은 부끄러운 듯 이불 아래로 머리를 숨겼고, 한스는 딸의 그 말에 울컥해 떨리는 손으로 머리 부분에 자리한 이불을 도닥인 후 자리를 피했다.
로나도 이럴 때 우는 소리를 내면 딸이 속상해한다는 것을 알기에 한스의 손에 이끌려 방을 나섰다.
‘몸이 아프면 투정이라도 부리면 좋으련만.’
어린 게 너무 일찍 철이 들었다.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아프다 보니 그만 고통에 익숙해져 버린 것 같아 한스는 자괴감에 머리를 움켜쥐었다.
저도 뛰놀고 싶을 것인데 그걸 참은 채 침대 옆의 자그마한 창을 내다보며 아쉬움을 대신하는 딸의 모습을 왜 모를까?
생각 같아서는 딸과 같이하고 싶은 일이 너무도 많았다.
부인과 같이 소풍도 가고 싶고, 목말을 태워 제 손으로 과일도 따게 해주고 싶고, 곤충 따위를 잡아 놀래주고 싶기도 했다.
‘여름이면 물놀이를 가는 것도 좋겠지. 저녁에 냇가에서 불을 피워 밤하늘을 보며 무서운 이야기를 하는 거야.’
그러면 저 녀석의 성격에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지.
‘그래, 이 모든 게 저 아이가 건강을 찾았다면 일어났을 일이겠지.’
한스는 일어나지 않는 일을 상상하며 즐거워하다 냉정한 현실에 돌아왔다.
‘한스야, 현실도피 따위는 하지 말자.’
예전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고 늦은 나이에 겨우 얻은 딸아이였다. 겨우 얻은, 세상의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하루하루가 두려웠다. 조금만 방심하다 딸아이마저 자신에게서 떠나가 버릴까 봐. 그것이 너무 두려웠다.
그는 밤새 뒤척이다 늦은 새벽에야 겨우 잠이 들었다.
“봄이다. 어? 아지랑이도.”
창을 활짝 연 여자아이는 따뜻한 봄 날씨에 크게 기뻐했다. 멜리나는 이번 겨울도 무사히 보내고 봄을 맞이했다.
따사로운 열기에 땅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던 여자아이는 저 너머로 베론 촌장님을 볼 수 있었다.
그동안 밖으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몇 번 보지 못했던 베론 촌장님은 왠지 모르게 예전에 보았을 때와 달리 얼굴이 밝아 보였다. 그 모습이 낯설던 멜리나는 곧이어 마구간을 정리하는 베론 촌장 뒤로 작은 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아이는 누구지.’
그녀는 반가우면서도 처음 보는 아이의 정체에 대해 궁금증을 보였다.
사실 그녀의 창 너머로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기란 어려웠다. 그 이유는 무서운 촌장님이 살고 계시는 곳과 가까이 있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녀는 가끔 노을이 질 때면 급히 달려가는 또래 아이들의 모습들을 보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랬던 차에 그녀는 매서운 추위가 지나고 오랜만에 보는 창 너머 세상에서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한 아이를 발견했으니 자연히 호기심이 갈 수밖에 없다.
그녀는 잠시 베론 가한과 모습을 감추던 아이가 다시 모습을 보이자 옆에 있던 엄마에게 물었다.
“저 아이는 누구예요?”
“아, 야안 말이구나. 이번에 촌장님께서 들이신 양자란다. 본래는 농노 출신이었던 탓인지 많이 먹지 못해 왜소하여 저렇지, 어려 보이지만 너랑 동갑이란다. 마리 아주머니께서 얼마나 예뻐하시는지 요즘은 만나면 저 아이 칭찬만 하는구나.”
“저랑 동갑이라고요?”
자신보다 두어 살 어린 듯한 체격을 지닌 아이인데, 동갑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더구나 농노라니. 저 아이는 얼마나 치열한 삶을 살았을까?
‘집 안에서 가만히 골골하기만 나로서는 상상이 안 되네.’
그렇게 생각하자 그 아이의 왜소한 체격과 달리 아주 강한 생명력이 그에게 있는 듯해 부럽기도 했다.
그 녀석은 참 부지런했다.
이른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몸을 씻고 마당을 청소하더니 식사를 하고 난 뒤에는 베론 촌장님의 뒤를 몰래 졸졸 따라다녔다.
그 녀석은 모르는 듯했지만, 멀리서 보고 있으니 지금의 상황이 한눈에 다 들어왔다. 베론 촌장님이 가끔 파이프에 담배를 붙이면서 그 녀석을 힐끗 쳐다보고 미소를 머금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던 멜리나는 촌장님이 밝아진 이유가 그 녀석 때문임을 알았다.
날씨가 따뜻해져 가면서 창가에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이렇게 날씨가 따뜻해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많이 오며 날이 추워지기에 그녀는 최대한 이 시간을 즐겼다.
가끔 햇빛에 취해 끔뻑끔뻑 졸면서도 창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유독 활동량이 많아 자신에게 심심함을 주지 않는 그 녀석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 녀석은 마치 자신의 방에 있는 화분의 꽃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그 녀석을 본 지 이제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저 혼자 시간을 몇 배나 먹는 듯 이제 또래의 작은 아이처럼 보였다. 또 살도 올라 얼굴빛이 맑아 보였다.
그 녀석은 언제나 웃고 다닌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 것인지. 너무 즐거워 보여서 어떤 때는 얄밉기까지 했다.
마을에 새롭게 들어온 아이였던 탓인지 마을 아이들은 그 녀석과 잘 놀아주지 않았다. 자신 같았으면 가슴 아파했을 것인데 그 녀석은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언제나 책을 옆에 끼고 다녔고, 베론 촌장님이 영주 성으로 나갈 때면 햇볕을 쬐며 책을 읽다 베론 촌장님과 같이 집에 들어가곤 했다. 머리가 아주 좋아 어쩌면 영주 성의 관료로 들어갈 인재라고 마리 아주머니가 자랑하신다고 엄마에게 들었다.
그 말에 나는 까르르 배를 잡고 웃었다.
저 어리숙해 보이는 저 더벅머리 녀석이 그런 높으신 분이 된다니 상상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우기가 왔다. 겨울만큼이나 몸이 불편한 시기이다.
한동안 그 녀석 때문에 재미있었는데, 우기 때문에 몸이 많이 상해 침대를 쉽게 벗어나지를 못했다. 그래도 지난 시간 동안 관찰하던 그 녀석을 생각하면서 고독한 병과의 싸움이 심심하지는 않았다.
가을이다. 가장 바쁜 한때이기도 했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기도 했다. 햇볕도 강하지 않았고 날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적당한 환경이었다.
그녀는 오랜만에 집을 벗어나 아버지가 일하는 곳에 구경하러 갔다. 아버지는 자신 때문에 작은 상점과 농사일을 같이 하시기에 언제나 바빴다.
듣기로는 몇 년만 더 돈을 모으면 내 병을 고칠 좋은 약재를 구할 수 있다고 했다. 무언가 도와드리고 싶어 엄마와 함께 음식을 이고 밭으로 갔다.
이번에는 베론 촌장님의 밀을 수확하는 시기라 그 녀석을 실제로 만나겠구나 싶어 갔는데,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알고 보니 그 녀석 때문이었다. 혼자서 어른 몇 명 몫을 해치운다면서, 칭찬이 자자했다.
한참을 끙끙거리며 사람들을 제친 뒤에야 어른들의 칭찬에 볼을 긁적이는 그 녀석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매일매일 보아서 잘 몰랐는데, 실제로 보니 그 녀석은 벌써 자신보다 한 뼘이나 커져 있었다.
어떻게 저렇게 사람이 자라나 싶어 놀랍기도 했다. 그러다 그 녀석의 눈과 마주쳤다.
‘어쩜 저런 눈을 가질 수 있지. 반짝반짝 빛나네.’
동네 개구쟁이들의 장난기 어린 눈빛이 아닌 동네의 점잖은 할아버지의 눈 같으면서도 그보다 맑고 빛났다. 이상하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고 몸에 열이 났다.
아픈 것은 아니었다. 무언가 불편하지만, 또한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그 녀석이 자신을 바라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밝게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안녕, 네가 야안이지. 난 멜리나라고 해.”
그 녀석은 아니, 야안은 다행히도 자신의 인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아! 네가 그 애구나. 옆집 한스 아저씨의 딸. 생각해 보니 예전 봄에 너를 본 적이 있어. 창가에 앉아 있었던 것 같았는데.”
아마 자신이 야안을 보았듯이 야안도 자신을 발견한 듯했다. 야안이 궁금하다는 물었다.
“그런데 많이 아프다고 하던데 몸이 많이 나았나 봐.”
“지금은 그래. 그런데 너 힘이 아주 센가 보다. 안 힘들어?”
“이 정도로 뭘. 더구나 다른 사람 일도 아니고 우리 집 일인데.”
야안은 그렇게 말하며 우리 집이라는 말이 쑥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혔다. 잠시 동안 멜리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야안은 곧 쉬는 시간이 끝이 나자 다음에 또 만나자는 말과 함께 일터로 갔다.
그 후 야안과 멜리나는 가끔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창을 내다보는 자신에게 야안이 먼저 손을 들어 인사하기도 했고, 자신은 방 안에서 아침 일찍 창문 너머로 야안이 하는 그 이상하고 어려운 체조를 따라 하기도 했다.
봄이면 나긋한 날씨에 창문을 열고 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야안이 깨우기도 했다.
“이봐, 멜리나. 일어나. 잠은 침대에서 자야지.”
“이봐, 멜리나. 일어나. 이 날씨에 여기서 자면 어쩌자는 거야.”
“아! 야안, 언제 온 거야.”
약속 시간보다 좀 일찍 와 기다리다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즐거운 꿈을 꾸었다.
“하여간 매번 그런 곳에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참 신기하단 말이야.”
멜리나는 예전 야안과 처음 이야기를 나눈 그 큰 나무의 갈라진 틈 안에 있었다. 입구가 좁아 그렇지 멜리나의 작은 몸 정도는 자리를 잡을 여유가 있었다.
1년 전. 아버지가 구해 오신 약초를 먹은 뒤로는 더 이상 아프지도 않았고, 추위도 잘 타지 않게 되었다.
한스 부부는 딸아이가 건강해지자 크게 기뻐했으나, 그도 잠시 약초의 효용이 너무 뛰어난 탓인지 너무나 다른 모습 때문에 매번 깜짝깜짝 놀라 크게 걱정하기도 했다.
쌀쌀한 날씨에 한나절이 지나 집에 돌아오는 모습을 볼 때면 혹시 예전처럼 몸이 악화되는 것이 아닐까 싶어 놀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 잔병치레 한 번 없었기에 한스 부부도 나중에는 그러려니 하며 딸의 건강한 모습을 즐겼다.
야안은 멜리나가 걱정이 되어 알게 모르게 마케를 걸어주었다. 그녀는 몸을 구겨 잠을 잔 터라 몸이 뻐근했는데, 야안이 손을 잡아주자 어느새 그런 고통도 사라지니 야안의 손을 신기하듯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