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56화 (56/385)

야안 56화

그들의 상행은 길고도 지루했다.

비록 마크 영지가 탈리아 왕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영지였지만, 안전을 위해 유토 산맥을 가로지르지 않고 빙 돌아가는 형태였기에 20일 동안 그들 외에 사람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오로지 푸른 산맥만이 그들을 반겼고, 가끔 낮에는 오크들의 습격과 밤에는 코볼트들의 유별난 기습 공격을 맞이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몬스터들의 습격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이유는 야안 때문인데, 이들 몬스터들의 수준이 낮아 제6감각에서 그들의 기습을 미리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때문에 야안의 지시에 따라 검수들이 오방 검진을 먼저 준비하여 기다린 탓에 별다른 큰 피해를 주지 못한 채 이들의 실전 경험만을 쌓게 해줄 뿐이었다.

“정말, 주군께서는 알수록 신비로운 분이시다.”

테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는 오랜 노예 생활로 눈치가 빨랐다.

그렇기에 야안이 경험이 있어 무언가를 보고 예측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하다가 갑자기 꺼림칙한 느낌을 받고 전투 준비 지시를 내리는 것임을 알았다.

이것은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가 알던 촉이 좋은 사람도 잘해야 열에 하나둘 정도의 확률로 맞힐 뿐인데 그의 주군은 벌써 열두 번째의 습격 모두를 예측하셨다. 그것은 주사위를 굴려 열두 번 모두 똑같은 숫자를 나오게 하는 것보다 더 낮은 확률이다.

‘어려울 것 없다. 주군께서 하시는 일에 의문을 가져서 무엇에 쓰려고. 어리석은 일이지. 테리야, 보아라. 저분이 나의 주군이시다.’

테리는 스스로 주군에 대해 이런 점까지 이해할 필요 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한쪽 어둠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단련하는 주군을 보며 감동에 젖었다.

조금씩 검에 대해 알아가고 여러 지식을 쌓아가며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게 되자, 자신의 주군이 얼마나 위대한 자인지 알게 되었다.

자신의 신분을 농노에서 구해준 것만으로도 그는 야안을 평생을 모실 만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은 그것이 아니어도 충분히, 아니, 과연 쫓아갈 수 있을지 모를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다.

굶는 일이 태반이던 시골 영지를 2년 만에 밀이 남아도는 영지로 바꾼 그 뛰어난 능력도 대단했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 같으면서도 가끔 보이는 따뜻한 인간적인 모습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했다.

이 이외에도 주군이 알려주는 검의 길은, 시간이 지나 생각하면 어떻게 그렇게 자신보다 더 자신을 알아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가르쳐 주었는지에 대해 경악할 뿐이다.

테리는 이제 상승 검리를 알게 되어 상급 유저로 넘어가는 기로를 맞고 보니 그분이 어떻게 아시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주군이 자신은 짐작조차 하기 어려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상치 못한 고행을 겪은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예전에 주군께서 자신을 보며 너는 근기가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정작 주군이야말로 대근기를 지닌 분이셨다.

근기. 그것은 고대어로 뿌리의 기운이란 말인데, 풀이하면 잎이 마르더라도 뿌리가 살아 있으면 다시 잎이 생생해지듯이 쉽사리 어떤 고난과 고통에도 넘어가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 의미를 알았을 때 그는 크게 낯을 붉혔다.

주군께서는 그런 대단한 의미인 근기를 자신에게 있다 말씀하셨지만, 그가 보아온 주군에 비하면 한참 멀었다 생각했다.

그런 테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안은 지금 겨우 검을 내려칠 수 없는 좁은 공간만을 점한 채 호흡을 멈추며 검을 내려치고 있었다.

열 번, 스무 번, 그리고 그 수가 백 번이 넘어간 뒤에야 그는 다시 멈춘 호흡을 풀어 숨을 들이켰다.

“쉽지 않군.”

야안은 5일 전 해가 저물어갈 때 만난 오크의 몸을 베어버릴 때 느낀 그 감각을 찾고 있었다. 그것은 기이한 감각이었다.

제6감각이 아니었다면 인지조차 못 하고 넘어갈 일이다.

당시 수하들의 오방 검진을 살피며 검진의 개선해야 할 점들을 살피던 야안은 자신의 옆을 지나치며 도망치던 오크를 베었는데, 검기를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마치 원래 그렇게 몸이 반으로 잘리는 것이 당연한 일인 것처럼 몸이 쩍 갈라졌다.

한데 그때의 감각이 이상했다. 검기를 일으킨다 해도 충격에 의한 반동이 남는데 그때는 검기를 일으키지 않았음에도 그런 반동이 상당히 줄어들어 있었다.

만약 제6감각이 아니었다면 일시적인 착각이니 하면서 넘어갔을 대수롭지 않을 일이었겠지만, 다행히 그는 그 우연의 산물을 인지할 수 있었다.

분명 그때 자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그것은 앞으로 검을 수련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자신이 걸어온 검의 길 자체를 바꾸어버릴 만한 것이었다.

야안은 당시의 기억을 복원해 검을 펼쳤다. 당시의 바람 세기와 온도 따위의 기후는 물론이고, 그때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는지도 복원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때의 검을 알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일상의 모든 것이 그 한 번의 일검을 복원하기 위한 수련으로 돌아갔다. 밥을 먹을 때도, 복수면을 할 때도, 몬스터들과 싸울 때도 그는 일검이 어떻게 펼쳐졌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은 자칫 심마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그의 품속에 있는 뇌전의 정화가 예전 중급 현자 익스퍼트에 올라설 때도 그러하였듯이 그의 마음을 한없이 고요한 호수처럼 만들었다.

잠시 호흡을 다듬던 야안은 다시 검을 내려치기 시작했고, 잠시 후 자신의 불 당번이 끝이 난 테리 또한 그와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을 수련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5일이라는 시간이 더 지날 무렵에서야 그들은 탈리아 왕국의 영역에 들어갈 수 있었다.

야안은 이곳 북쪽 성문을 지키는 위스 자작에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는 패와 자신이 작성한 남작의 사유서를 보여주었다.

다른 때였다면 제법 까다로운 절차를 겪어야 했겠지만, 동맹국인 마일드 왕국에서 온 귀족 상행이었고, 현재 전쟁에 참여한 왕국 연합 중 마일드 왕국의 군세는 큰 것이라 호의를 베풀어 간단한 절차로 끝을 내었다.

그에 야안은 크게 감사하며 가져온 와인 한 상자를 그에게 바쳤다. 그에 위스 자작은 생전 처음 듣는 작은 영지에서 생산한 와인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다, 막상 마개를 열고 향을 맡자 자신이 아끼는 고급 와인과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다.

그가 맡는 북쪽 성문은 외지라 물류 거래가 없어 이런 고급 와인을 얻기 위해서는 돈도 돈이지만 여러 과정을 거쳐야 했다.

과연 맛도 그 향처럼 뛰어났기에 크게 미소를 보이며 야안이 이곳 성에서 편하게 지낼 수 있게 편의를 봐주었다.

야안은 이곳에서 새로 무구 정비를 하고 식량을 구입해야 했기에 이틀가량을 쉬어야 했다. 그런 찰나에 이런 위스 자작의 호의는 고마운 것이었다.

본래 이런 외지 성문 쪽은 타국의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기 어려운데, 위스 자작이 호의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여러 귀찮은 일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령 험한 용병들과의 마찰도 경비대와의 중재로 막을 수 있었고, 물품을 사는 데도 위스 자작이 준 물품 거래 임명서를 보이면 어렵지 않게 물건을 구입할 수 있었다.

라몬 여관은 때아닌 손님들로 오랜만에 쾌재를 불렀다.

평소 돈이 안 되는 손님들을 맞이하다, 30명이나 되는 인원들 덕분에 방을 꽉 채울 수 있었고, 건량의 준비로 쌓아놓은 고기류를 처리할 수 있어 좋았다. 더구나 다들 건장한 터라 식사량이 대단해, 끼니마다 큰돈을 벌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귀족가 소속답게 격식을 차린 검사들이라 평소 자신들을 귀찮게 한 지저분한 용병 같은 짓거리는 하지 않았다.

저녁이 되어 가볍게 마실 수 있는 퍽을 준비하는 라몬에게 야안이 물었다.

“이곳에서 윌 백작가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윌 백작가 말씀이십니까? 아이고, 타지에서 오신 분이시라 모르시나 보군요. 지금 윌 백작가는 상행을 가기에 좋은 선택이 아니십니다. 지금 전쟁으로 떠도는 유민 2만 명이 윌 백작가에 몰려들어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더군요. 더구나 전대 백작이 돌아가신 후 또 한 번의 전투에서 기사님들과 병력의 반 이상을 잃어 지금 치안조차도 어렵게 되었답니다.

이번에 새로 오르신 윌 백작께서는 나이가 어리시고 영민하지 못해 그 평이 좋지 못하니 떠도는 소문으로는 그 위세 높은 백작가도 이제 저물게 될 것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습니다.”

주인장의 말에 좋은 사실을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해 주어서 고맙네. 그래도 그곳으로 상행을 가야 하니 좋은 길이 있으면 추천해 주겠는가?”

야안의 말에 라몬은 잠시 답답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래도 많은 것을 팔아준 호의에 예전 이곳을 묵었던 용병들이 추천한 길 두 곳을 알려주었다.

하나는 10일이라는 긴 시간이 걸리지만 몬스터들의 출현이 적은 안전한 길이었고, 또 다른 한 곳은 4일이라는 짧은 시간이 매력적이지만, 중형 몬스터들도 출현하는 위험한 길이었다.

야안은 잠시 생각하다 두 번째 길을 선택했다. 오우거나 트롤 같은 몬스터에게 이 오방 검진이 어떤 위력이 있는지를 검토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 열일곱 번에 달하는 실전이 있었지만, 사실 안전한 길로 돌아왔고 그가 옆에서 많은 도움을 주어 실전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특히 테리의 경우는 치열한 실전을 겪고 난다면 단숨에 상급 유저에 들어설 수 있는 기미가 보였기에 더욱 이곳을 가기로 했다.

꼭 테리만이 아니라 그동안 몬스터들과의 전투를 통해 이제 크게 몬스터들의 살기에 움츠러들 것 같지도 않으니 수하들에게 좋은 경험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가볍게 술을 즐기고, 오늘 마차를 지킬 인원 둘에게 맡기고 그들은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내 총관님과 대장 테리가 여관의 마구간 옆에서 훈련하는 모습을 보고, 서로 쓴 미소를 짓더니 그들 또한 이 훈련에 참여했다.

비록 소소한 전투뿐이었지만, 일순간에 팔이 날아가고 목숨을 잃는 전투를 겪어서인지 훈련은 아무리 많이 해도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탓이다.

한데 자신보다 강한 두 사람이 이처럼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으니 그보다 못한 자신들이 편하게 쉰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가 않았다.

그렇게 이들은 이번의 상행을 통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차츰 성장해 갔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이른 새벽에 출발한 그들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야루스 산맥의 끝자락과 붙어 있는 우랄 산맥에 들어섰다.

그들은 우랄 산맥에 들어서면서 벌써 두 번이나 몬스터들을 만났는데, 두 번 다 오크들이었다. 그 수는 지금까지와 달리 50마리를 넘어섰는데, 아무래도 야루스 산맥에서 도망친 하급 오크들인 모양이었다.

하급 오크들이라 해도 여타의 오크들보다 강한 면모를 보이기에 지금까지의 전투와 다른 치열한 양상을 보였는데, 그들이 이들을 다 처리하는 데에 한 시간에 걸친 긴 전투를 해야 했다.

그런 전투를 두 차례나 해야 했으니,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위험성에 신경이 예민해져 스스로 정비 등에 크게 신경을 썼고, 하인들도 다른 분위기에 잡담을 하는 시간도 없이 조금이라도 남는 시간에 선잠을 자며 체력을 아끼기에 바빴다.

“이곳은 정말 무시무시한 곳이군.”

테리는 모닥불에 장작을 더 집어넣으며 중얼거렸다. 단순히 야루스 산맥과 이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이처럼 많은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것이 믿기질 않았다.

만약 주군께서 오방 검진을 내려주지 않으셨다면, 자신들은 전멸하였을 것이다. 아니, 이번에 참여한 대원들이 복수면을 하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오방 검진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반 이상이 이번 몬스터들의 습격에 죽었을지 모른다.

“아니지, 그보다 주군께서 없었다면 상상하기 싫은 일이 생겼을지도.”

아직 오방 검진은 미숙한 점이 있어, 자리를 잡는 데 약간의 시간이 걸린다. 평평한 지형이라면 그럴 필요가 없지만 이처럼 길이 좁고 변칙적인 산악 지형에서는 주위의 지형지물에 따라 그 검진도 변형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미리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야안이 미리 경고해 그 시간을 벌어 주었으니 테리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잠시 모닥불을 보며 생각에 잠기던 그가 인기척에 고개를 돌려보니 주군이 그의 옆에 자리했다.

야안은 어린 나이에 짧은 시간 동안 대원들의 지지를 받고 대장의 책임을 잘 수행하고 있는 그를 기특하게 여겨 말했다.

“그래, 오늘 만난 몬스터들은 지금껏 만난 몬스터와 차원이 다르지 않던가?”

테리는 공감했기에 작게 묵례를 하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들 하나하나가 마치 숙련된 병사를 보는 것 같더군요. 만약 총관님께서 오방 검진을 만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여러 목숨이 날아가 버릴 뻔했습니다.”

수하의 말에 야안은 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네. 하지만 자네들이 앞으로 상대해야 할 몬스터들은 이런 것들이지. 아니, 예전에 야루스 산맥에서 내가 본 몬스터들에 비하면 이것들은 아주 저급한 존재들이야. 자네가 만난 오크들은 그곳에서 만난 전사 오크들의 식량거리일 뿐 그 이상의 존재도 아닐세.

그들 하나하나가 자네와 비슷한 실력을 지녔고, 그들이 타고 다니는 회색 갈기 늑대들은 조장과도 치열한 혈투를 벌일 수 있는 실력이지. 더구나 오크 전사가 그 회색 갈기 늑대를 타고 다닐 때면 그 일격 하나하나가 매섭네. 일시적으로나마 중급 유저가 상급 유저의 힘을 내네.”

거기까지 말하던 야안은 잠시 예전의 일을 상기하다 말을 이었다.

“알겠나. 그런 존재들이 최소 1,000단위로 나누어져 마을을 형성하고 그들의 지도자는 우리 마일드 왕국에서도 100명밖에 되지 않는 기사급의 실력을 지녔지. 그 밑에 1,000의 전사 외에도 오늘 우리가 상대한 오크들이 1만에서 2만에 달한다네. 이것이 한 오크 족장이 이끄는 세력일세. 한데 여기서 끝나지 않네.

이런 오크 족장들을 다스리는 대족장이 있지. 나는 그를 멀리서 본 적이 있네. 그 존재는…… 그 호도칸급의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네. 최소 상급 익스퍼트 기사와 그를 받칠 만한 뛰어난 정예병이 없다면 상대하지 못할 것이야. 회색 갈기 늑대의 우두머리 위에 탄 채 전장을 휘젓는 그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지네. 그래, 그러하네. 우리는 앞으로 이런 존재들과 싸워야 하네. 지금 자네가 겪는 이것은 그때를 위한 작은 발걸음에 불과해.”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먼 곳까지 바라보는 주군의 생각에 테리는 말문을 잃었다. 이분은 어디까지 보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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