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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57화 (57/385)

야안 57화

오늘 같은 치열한 전투를 그저 작은 발걸음으로 치부해 버리는 주군의 모습이 너무도 커 보였다. 아니, 주군이 커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스스로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주군과 같은 시선으로 세상을 보겠다. 반드시 주군의 검이 되고 방패가 되고 말리라.’

어느 늦은 밤,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한 사내의 불같은 의지가 가슴속에 들어서던 순간이었다.

우랄 산맥에 들어선 지 이틀이 되던 늦은 저녁. 그놈들이 모습을 보였다.

그동안 여러 몬스터가 그들을 힘들게 했지만, 이번에 나타난 이들만큼 압도적인 존재는 없었다. 오우거들이었다.

그것도 하나나 둘이 아닌 다섯이나 되었다. 상위 포식자이고, 그 성정이 흉포해 쉽사리 무리를 이루지 못하는 점을 미루어볼 때, 이같이 다수의 오우거가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주 드문 일이었다.

야안은 하인들에게 말과 마차를 묶어 쉽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여타의 몬스터들과 달리 오우거의 살기는 여러 면에서 훈련된 전투마가 아니면 견디기 어려웠다.

말들의 동요를 생각해 그런 조처를 한 야안은 수하들에게 오방 검진을 펼치라 말하고는 그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약간 빠른 걸음에 불과했던 그의 움직임은 점차 빨라지더니 50미터 앞에서 돌진하는 오우거들을 향해 날듯이 달려갔다.

야안의 목표는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크고 흉터가 많은 오우거였으나 그전에 가장 앞서 있던, 그들 중 덩치가 두 번째로 작은 오우거가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4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존재의 움직임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다.

그 크고 거대한 손은 닿는 순간 머리든 사지든 찢어버릴 것 같았지만, 뜻한 바를 이루지 못했다.

야안의 검이 어느새 오우거의 손바닥을 반으로 찢어놓았고 동시에 몸을 한 바퀴 회전하며 거대한 몸무게를 버티던 왼쪽 발목을 끊어놓았다.

“크오오오.”

오우거는 하늘이 무너질 듯한 굉음을 터뜨리며 무거운 먼지바람과 함께 쓰러졌고, 야안은 마치 바람에 휘날리는 낙엽처럼 어느새 그들의 시야를 벗어나 가장 뒤에 자리한 우두머리 오우거와 마주쳤다.

그 오우거는 머리 두 개는 더 키가 컸으며 다른 오우거보다 한 배 반가량 근육이 두꺼웠다.

야안은 그런 존재를 만남에도 검기를 일으키지 않았다. 지금 그의 극도로 단련된 육체만으로도 상대하기 충분하였고, 또한 이 상대를 통해 그를 고민케 하던 그 한 번의 일검이 우연히라도 재림하기를 바란 탓이다.

“크오.”

야안을 바라보던 오우거의 흉악한 노란 눈이 야안의 한 점 흔들림 없는 눈과 마주치는 순간 오우거는 짧은 신음을 흘렸다.

야수 특유의 감각이 눈앞의 이자가 상당히 위험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오우거는 이해할 수 없었다. 분명 껍질은 그가 보아온 인간들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결국 단순한 지능과 맛있는 먹이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그의 판단을 그르치게 하였고, 물러서지 않은 채 거대한 나무 몽둥이로 먹이를 내리쳤다.

하지만 그의 먹이는 일순간 모습을 감추었다. 어디로 간 것인가 궁금해하는데, 이내 먹이가 자신이 휘두른 나무 몽둥이 위로 올라가 있음을 보았고, 그는 몽둥이를 들어 떨어뜨리려 했지만, 그 이전에 먹이가 반응을 했다.

야안의 몸이 몽둥이를 타고 올라가더니 이내 오우거의 눈 하나를 베어냈다. 동시에 어깨를 타고 넘어간 그는 옆구리를 베어냈고, 오우거가 고통을 표시하기도 전에 그의 어깨 근육을 찔러 끊었다.

오우거가 고통이 심한 팔로 그를 잡으려 하자 어느새 반대편으로 몸을 날린 야안은 그의 옆구리와 등, 갈비뼈를 찌르고 자르며, 베어냈다.

마치 숙련된 상급 유저 여러 명이 팔방에서 검을 찌르고 빠지듯이 그는 홀로 4미터에 달하는 이 거대한 괴물을 요리했다.

몇 분 되지 않아 무릎의 인대를 베어내어 무릎 꿇게 하더니 이내 그 자리에서 몸을 뛰어 세 바퀴를 휘돌아 철판만큼이나 두껍고 질긴 오우거의 목을 단숨에 베어냈다.

피 보라가 터지며 오우거의 목이 허공에 뜨는 모습은 장관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벌인 모습에 관심이 없는 듯 조금 전 자신이 자른 발목을 끌며 동료들과 합류하는 오우거에게 다가갔다.

그 요란한 전장에서 마치 산책을 하는 것 같은 여유를 보이며 야안은 오우거의 뒷목에 검을 찔러 넣은 뒤 천천히 빼내었다.

뇌가 파괴되어 작은 신음조차 내지 못한 채 오공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오우거를 지나친 야안은 수하들과 오우거가 벌이는 전투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뼈를 깎는 듯한 지독한 수련이 빛을 발하는 듯, 그들은 4미터에 달하는 오우거가 셋임에도 쉽사리 밀리지 않았다.

방패들을 모아 비틀어 거대한 힘을 막아서며, 그 방패 사이로 찌르며 빠지는 공격들로 이미 오우거들의 곳곳은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아직 이들의 경지가 낮은 탓에 치명타를 주지 못해, 전투는 길게 이어질 것 같았다.

야안은 그들의 곁에서 이들의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잠시 물러섰다. 위험하면 바로 개입할 것이지만, 아직은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30분이라는 시간이 지나 드디어 한 마리의 오우거가 요란한 울음소리를 내며 쓰러졌고, 그 뒤를 이어 방패로 두들겨 맞아 한쪽 갈비뼈가 함몰된 오우거 또한 사방에서 찌르는 검에 뇌수가 터지며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남은 한 마리 또한 10분을 끈질기게 반항을 하더니 이내 눈이 뽑히고 손가락이 잘려나가며 방패에 이가 다 부러지고 나서야 요란하게 뒤로 쓰러졌다.

“우오오오!”

이야기로만 듣던 그 무시무시한 오우거를 셋이나 자신들이 잡아내자 그들은 사기가 치솟았다.

온몸에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차원이 다른 전투로 여기저기 상처도 입었지만, 크게 대수롭지 않았다.

“아주 훌륭하다. 아직 하루 거리가 남았다지만, 무엇이 두려운가? 우리는 승리하지 않았는가.”

야안은 지난 몬스터 토벌전을 통해서 사기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았기에 때를 놓치지 않고 수하들을 독려했다.

과연 그의 의도답게 사기가 더 높아져 그들은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았고, 곧 오우거들의 가죽을 벗기고 잔여물을 태워 정리한 뒤 그곳에서 한 시간을 더 가서야 자리를 잡았다.

가볍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더 이상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무구들을 손질하거나 자신이 부족했던 것들을 연습했고, 야안은 돌아다니며 마케나 힐을 펼쳐 그들의 부상이나 지친 몸의 회복을 도와주었다.

시간이 흘러 잠시 수면을 취하는 이들도 있었고, 모닥불 당번을 맡은 이들도 있었으며, 조금 전 전투에서 펼친 자신의 검을 그리는 자들도 있었다.

야안은 그들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곳에 앉아 마지막에 오우거의 뒷목을 찌르고 빠졌을 때를 생각했다.

그때는 크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지난번에 느꼈던 그 일검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마치 부드러운 흙 속을 찌르고 빠진 듯 이번에도 별다른 반발력을 느끼지 못했다.

‘무엇이 달랐던 것일까?’

다시 하라고 하면 하지 못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다른 것일까?’

당시의 모든 상황과 처음 느꼈을 때의 그 일검은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인가? 굳이 하나 꼽자면 그 두 개의 상황이 모두 의식하지 않았을 때 벌어졌다는 것이다.

의식하지 않은 것이라면 무의식과 관련이 깊은 걸까?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야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무의식적인 차원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자신이 이처럼 집착할 리가 없다.

무의식적으로 벌어진 일이라도 자신의 제6감각은 이것이 의식적으로 가능하다고 확신을 준다.

잠시 말없이 고민에 빠졌던 야안은 이내 어지러운 심정을 잊으려는 듯 수면에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다시 이틀이 지나서야 그들은 윌 백작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 이후 몬스터들에 세 차례의 습격을 받았는데, 이때 하인 두 명과 대원 세 명이 다치게 되었다. 다행히 위험할 정도로 심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동안은 무리하지 말고 안정을 취해야 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군. 자, 서두르자. 곧 해가 지겠다.”

자신이 수습하기는 했지만, 부상자들의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전문적인 치료사들에게 보이는 게 가장 좋았다. 해가 지고 성문이 닫히면 하룻밤을 더 노숙을 해야 하기에 야안은 힘든 여정에 지친 수하들을 애써 도닥였다.

야안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잘 알기에 검사들이나 하인들도 힘든 몸을 끌며 말을 살피며 이동 속도를 올렸다.

윌 백작성에 가까워질수록 야안은 탄식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사정이 나쁘다는 말은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윌 백작성의 주위에는 전쟁에 고향을 잃은 피난민 2만여 명이 영지에 들어가지 못해 보잘것없는 천막 따위를 친 채 성 주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는 배고파 투덜댈 힘도 없어 지저분한 몰골로 어미의 품에 누워 있었고, 여인들은 아이를 살리기 위해, 성내를 오가는 사내들을 유혹했다.

남자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성내를 기웃거렸고, 어떤 이들은 빵을 훔쳐 갔다는 죄목으로 목이 잘려 장대에 꽂혀 있었다.

그 어디에서도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누군가가 죽었다는 통곡 소리와 시체 타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 사람 타는 냄새조차 매력적이라, 어린아이들은 그 주위를 맴돌며 침을 꼴깍댔고, 자식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싶은 어머니들의 눈에는 광기가 일었다.

만약 이성이 남은 사내들이 그런 짓을 하지 못하게 감시하지 않았다면, 저 추잡한 오크들처럼 서로의 살을 뜯고 피를 마실지 모른다.

그런 사내들도 자신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오가는 상인들에게 스스로 팔아 양식을 구하려 했는데, 신분도 증명하기 어려운 피난민들을 노예로도 사려는 자들은 없었다. 도둑들이 판을 치는 피난민들을 사들여 자신의 상행에 큰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예전이라면 그래도 사려는 자들이 몇 되었겠지만, 지금은 윌 백작가가 성의 치안도 유지하기 어려울 지경이었으니 공연히 이런 자를 사들여 그들의 심기를 건드릴 필요는 없었다.

굳이 이들이 아니어도, 인간의 목숨이 오크 가죽만도 못한 시기이니 얼마든지 좋은 가격에 노동력을 사들일 수 있었다.

2년 전만 해도 수많은 광산을 가지고 있어 왕국 연합 중에서 부유한 국가라 하던 탈리아 왕국이 이제 이 한 번의 전쟁으로 인세에 자리한 지옥으로 변하자 야안은 전쟁의 참혹한 피해를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해 눈을 돌리고 말았다.

‘아리스 님께서는 왜 이런 참담을 낳으셨단 말입니까?’

야안은 저도 모르게 묻고 또 물었다.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참담한 모습은 탈리아 왕국 곳곳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 중 한 부분에 불과했다.

권력자의 역겨운 욕심에서 시작된 전쟁의 결과물인 이 모습을 야안은 오고 가는 소상인들에게서 들었지만, 마음에 크게 와 닿지 않았다. 결국,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고, 자신과 관계없기에 그저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랬다.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 생각했다.

귀족이 있고, 평민이 있고, 노예가 있다. 애초에 불공평한 인생을 태어났을 때부터 사는 것이 인간이지 않은가?

결국 자신의 왕국처럼 전쟁으로 이득이 더 많은 나라가 있으면, 탈리아 왕국처럼 피해를 받는 나라도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것은 그들의 운명이기에 겨우 조그마한 시골 영지의 영주도 아닌 일개 가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이니 상관할 바가 아니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들의 삶은 두 날개가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와 같았다. 목소리가 있어도 울지 못하는 새와 같았다. 자유롭지만, 자유롭지 못한 피난민들의 모습은 차라리 예전 자신의 농노 생활이 너무 호화로웠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저 멀리서는 몬스터들의 습격에 몸이 통째로 뜯겨 나간 시신 조각이 여기저기 보이는 것이 윌 백작은 이들을 보호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성에 가까이 있으면 최소한 몬스터들의 습격이 적기에 이처럼 성 주위를 떠나지 않았다. 아니, 이제 기력이 없어 함부로 떠나지도 못해 그저 바보 새처럼 자신이 죽을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말문이 막힌 것은 야안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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