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58화
18. 윌 백작
다음 날, 야안은 테리를 제외한 수하 다섯 명과 하인 넷을 동반해, 오우거 가죽 두 장과 와인 한 상자를 들고 주인장에게 물어 알아낸 라덴의 집으로 걸음을 움직였다.
과연 지금 실세라 할 수 있는 자의 수하답게 라덴은 여타 귀족의 저택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규모의 저택에 살고 있었다.
저택에 있는 하인들만 50명에 달했고, 저택을 지키는 정예병도 30명에 달했는데, 그 수준이 소드 하급 유저 인지라 성의 군인 중에서도 정예병을 소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시기가 어수선한 만큼 자신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몰래 병사들을 빼돌린 것처럼 보였다.
그 위세가 높다 하더니 그를 만나기는 성을 넘어설 때보다 더 까다로웠는데, 욕심이 많은 자의 수하들답게 야안은 그 과정에서 적잖은 돈을 건네주어야 했다.
귀족이라 하지만 타지 왕국의 소속이고, 작위도 남작도 아닌 준남작이니 이와 같은 권력자의 영역 앞에서는 그의 권세가 통하지 않았다.
야안의 검사들은 이들의 행태에 저도 모르게 검을 뽑아버리려 했지만, 야안이 손을 젓자 이내 자신의 감정을 내리눌렀다.
라덴의 직위 또한 야안의 왕국에서는 준남작에 달하는 것이었으나, 야안은 시골 영지의 가신이고 그는 지금 세가 많이 약해졌다지만 백작가의 가신이다. 그 배경만 보아도 자신은 여러모로 밀리는 구석이 있기에, 야안은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곧 인내심을 가지고 찔러준 뇌물이 효과가 있었던지, 해가 중천을 지날 때쯤 접객실에서 자신을 보고자 한다는 라덴의 대답을 얻어내었다.
마크 남작가의 연회장만큼이나 큰 규모의 방을 지나 다시 작은 거실을 하나 지난 뒤에야 그는 접객실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눈빛이 날카로운 전형적인 군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야안은 그에게 이미지 마법을 걸어 자신의 첫인상을 좋게 하였는데, 이후 진실의 눈으로 읽어보니 그는 자신을 약간 귀찮은 자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그로서 이자가 상당히 까다로운 입맛을 지닌 자임을 알게 된 야안은 자세를 낮추고 먼저 인사하였다.
“반갑습니다. 저는 마일드 왕국의 마크 남작가의 총관을 맡은 베론 야안이라 합니다. 오늘 고명한 백작가의 가신이신 라덴 경을 만나 영광입니다.”
크게 귀족가의 예를 보이며 인사를 하는지라 라덴 또한 조금 전보다 호감을 보이며 인사를 받았다.
“반갑습니다. 윌 백작가의 가신 라덴이라 합니다. 마일드 왕국이라면 비록 가깝게 자리한다고 해도 한 달이 걸리는 먼 거리인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직설적인 그의 화답에서 처음 느낀 것처럼 타고난 군인임을 알고 야안은 말을 돌리거나 끌지 않고 본래의 목적을 말했다.
진실의 눈으로 본 그는 떠도는 사람들의 얘기와 달리 물욕이 심한 자가 아니었다.
그가 뇌물을 받는 것은 고생하는 수하들을 챙기고, 또한 어려운 백작가에 재물을 바치기 위함이었고, 겉으로나마 호화롭게 살며 세인의 관심을 이끄는 것은 그가 모시는 주군의 평판을 생각한 행동이었다.
그는 자신의 주군이 더럽지만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을 대신해 스스로 명예를 더럽혔는데, 그의 우선순위로 오직 주군에 대한 충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주군이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들 따위는 하지 않을, 전형적인 기사도를 알고 행하는 인물이었다.
아직 초급 익스퍼트 수준밖에 되지 않은 무인이었지만, 그 실력을 떠나 그의 충성스러운 마음은 존경받을만 했다.
그런 것을 알기에 그는 가져온 재물을 그에게 건네주기보다는 윌 백작에게 바치기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저희가 윌 백작님께 바치는 작은 성의입니다.”
라덴은 야안이 건네주는 물건을 살피며 눈에 이색을 띠었다. 야안이 가져온 오우거 가죽이 둘이었는데, 그중 하나는 오우거들 가죽 중에서 보기 힘든 덩치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덩치를 지닌 오우거는 무리를 짓는 것이 보통이라 사냥하기가 까다로웠다. 설사 그 혼자 남게 된다 해도 상급 소드 유저가 다섯은 되어야 잡을 수 있는 터라, 이 들어보지 못한 남작가의 가신이 보인 성의는 놀라운 것이었다.
더구나 지금껏 만난 상인들이나 귀족들과 달리 자신에게 뇌물을 주기보다는 백작에게 직접 바친다 하니 라덴은 이자가 자신이 비리를 행하는 속사정을 읽어낸 자일지 모른다 생각했다.
듣기로 이자의 영지와는 그간 교류가 없었고, 그가 이곳에 와서도 어제 하룻밤의 시간밖에 없었으니, 라덴이 생각할 때 이자는 둘 중 하나였다.
‘아주 무능한 자, 아니면 아주 유능한 자일 것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환영할 일이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여러모로 관계를 맺기가 꺼려진다. 그 누구도 아직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사정을 알아차렸다는 것에서 이미 자신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이가 아니었던 탓이다.
그래 봐야 작은 남작가에 불과하니 위대한 윌 백작가에 큰 피해를 줄 수 없을 것이지만 그래도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인물이란 것 하나만으로 그는 불편한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이 오우거의 상태를 보니 잡은 이들의 실력을 알 수 있겠습니다. 수하들의 솜씨입니까?”
수염을 길러 나이가 들어 보인다지만 그래도 스물을 갓 넘은 듯한 야안의 외모에 그가 자신 같은 익스퍼트 경지에 오른 자라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같은 일은 대단한 힘이 담긴 무언가를 섭취하거나, 타고난 재질이 아주 극상에 달하는 자가 좋은 가문의 지원과 뛰어난 스승의 지도를 받았을 때나 탄생하기에 이같이 시골 남작 영지의 가신이 가질 실력은 아니라 생각했다.
이는 야안이 중급 현자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자신의 기세를 숨길 수 있는 경지이기에 더욱 그러했는데, 야안보다 높은 경지가 아니라면 그의 실력을 알기 어려울 것이다.
또한 야안이 우두머리 오우거를 잡을 때 검기를 흘리지 않았던 것 또한 그의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렇습니다. 우랄 산맥을 건너오는 중에 그들을 맞이하였지요. 총 셋이었으나, 훌륭하게 저희 수하들은 그들과 싸워 이겨 내었습니다.”
오우거가 셋이라는 말에 라덴은 잠시 눈가를 찌푸리더니 이내 작게 묵례를 보였다.
“죽어간 검사들에게 애도를 보냅니다. 그들은 아주 용감하였군요.”
미리 알아본바 검사가 스물밖에 되지 않는 그 병력으로는 그들을 다 상대할 수 없기에 하는 라덴의 어긋난 추측이었지만 야안은 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이 가져온 포도주 한 상자를 그에게 건네었다.
“저희 마크 남작가가 윌 백작가와 거래하려는 물품입니다.”
라덴은 이미 수하들에게서 포도주를 가져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설마 그 거래 물건이 포도주인 줄은 몰랐기에 잠시 말문을 잃었다가 이내 포도주 한 병을 꺼내 살피더니 말을 이었다.
“흠, 포도주라. 이것은 마크 남작가의 문양 같은데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이미 제3전장에 이 포도주를 진상해 올린 적이 있는데, 당시 반응이 아주 좋았습니다. 지금 저희 왕국에서도 작년부터 거래되고 있는 물건입니다.”
그 말에 라덴은 잠시 야안을 노려보다 다시 고개를 돌려 포도주를 살피며 말했다.
“우리 탈리아 왕국에서 이런 기호품이 비싸게 거래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 거래되는 물건에도 급이 있게 마련이지요. 윌 백작가는 싸구려 와인 따위는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백작가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 일인 것이니 양해 부탁하며 아쉽겠지만 이 거래는 없는 것으로 하지요.”
그나마 야안이 라덴에게 밉보이지 않았기에 그같이 점잖게 거절하는 것이었다. 야안은 그의 말에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오해하신 모양이군요. 저희 마크 남작가의 와인이 비록 역사가 짧지만, 그 맛은 어느 고급 와인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습니다.”
라덴은 야안의 말에 잠시 눈썹을 꿈틀거리다 이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것은 단 한 번 마개를 열어보면 아는 일이니만큼 상대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저토록 자신이 있다면 남작가에서 만든 와인치고 상당히 질이 높은 것이겠지. 하지만 백작가가 취급하는 고급 와인의 기준에는 떨어질 수밖에 없어.’
그만큼 고급 와인을 생산하는 것은 어렵다. 오랫동안 터를 가꾸어야 하고, 수많은 연구가 있어야 한다. 역사가 길수록 와인의 맛이 좋아지는 것에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이제 막 생산하기 시작한 그들의 와인 맛이 뛰어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일이다.
그는 그렇게 기대 없이 마개를 열었고, 잠시 후 와인 병에서 흘러나오는 향에 깜짝 놀랐다.
맛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을 만큼 풍부한 향이 흘러나왔다. 라임의 향과 신선한 허브 향, 꿀의 달콤한 향이 어우러져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쉽게 보기 힘든 와인임을 짐작하게 했다.
깜짝 놀란 그는 대기하고 있는 하인을 시켜 와인 잔을 가져오게 했는데, 투명한 형태를 띤 둥근 형태의 귀한 유리잔이었다.
예전 어느 상단주에게서 선물을 받은 것인데, 이 잔에 와인을 따라 마시면 저급의 와인도 풍기는 향이 달라질 만큼 와인 애주가에게는 귀한 보물 같은 물건이었다.
그는 실을 뽑듯이 와인 잔의 3분의 1만큼 채웠는데, 그 유리잔에 비치는 와인의 색에 감탄을 터뜨렸다.
“하~ 좋군. 예전 연회장에서 마셨던 와인만큼이나 빛깔이 좋아.”
빛깔에 감탄하던 그가 와인 잔을 한 번 돌리자 이내 그가 느낀 그 짙은 향기가 더욱 풍성해지는 것을 느꼈다.
잠시 그 향기에 취한 듯 눈을 감던 그는 조심스럽게 와인 잔을 기울여 마셨는데, 과연 자신이 상상했던 그 맛이 나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높은 경지에 오른 자일수록 오감이 예민해지는 만큼 그의 혀는 전문가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준할 만한 미각을 지녔기에 그 퍼져가는 와인의 맛에서 쉽사리 벗어나질 못했다.
몇 분이 지나서야 와인을 여러 번에 나눠 마신 그는 조금 전과 같은 미소로 자신을 바라보는 야안에게 사과의 말을 올렸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예사로운 인물이 아닌 것을 알고 경계하느라 그대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아주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어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저 같아도 경계를 하였을 것입니다. 라덴 경께서 이같이 좋게 보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요. 부디 백작님께 좋은 말씀 드려주시기 바랍니다.”
야안의 말에 그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이 같은 거래는 우리 윌 백작가에서도 크게 환영할 것입니다.”
“그럼, 저는 라덴 경을 믿고 기다리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의 말에 야안은 작게 묵례를 하고 접객실을 벗어났다. 접객실 밖에서 불안하게 기다리고 있는 수하들의 모습에 야안은 미소를 보이며 크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이야기가 잘되었다. 걱정하지 마라.”
그제야 걱정이 가신 검사들은 앞서 가는 야안을 따라 라덴의 저택을 나섰다.
야안은 말이 통하는 자와 거래의 첫 시작을 하였다는 것에 크게 만족했다. 물꼬가 트였으니 이제 일의 사정이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걱정했던 부분이 어느 정도 해소되자 애써 잊으려 했던 어제 본 난민들의 모습이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못 먹어 핏기없는 얼굴을 한 그들의 모습은 그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떨리고 두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