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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59화 (59/385)

야안 59화

그래, 두려웠다. 저 같은 모습에서 어릴 적의 보잘것없었던 자신이 떠올라 두려웠다. 아니,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마치 과거의 자신과 같은 몰골을 한 그들의 죽음을 그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는 이 현실이 너무 두려웠다.

왜 아리스께서는 이처럼 차마 쳐다보기 힘든 현실을 세상에 보이셨던가? 왜 그들을 구제하지 않으시는가? 왜 이들에게 고통만을 줄 뿐 희망을 주지 않으시는가?

스스로 아리스의 은총을 받았다 생각하는 야안으로서는 이 믿기지 않는 현실을 크게 슬퍼하였다. 거대한 은총을 받은 자신 때문에 이들이 이처럼 불행한 현실에 처한 것이 아닌가 싶어 죄책감마저 느낄 정도였다.

그렇게 일어난 번뇌는 야안을 크게 어지럽혔지만, 그도 이내 뇌전의 정화로 잠잠해졌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어제 스스로 수십 번이나 되뇌었고, 테리가 이야기하였듯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가난은 저 강성하고 부유한 제국에서도 처리하지 못하는 문제이지 않던가? 고작 귀족도 아닌 준귀족의 신분인 자신이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려는 듯 그는 다른 문제로 마음을 돌렸다. 어제 이곳에 도착한 뒤에야 떠오른 이번 퀘스트 관련의 내용이었다.

[고대 거인족들의 비사

고대에 존재하였다는 이 거인족은 키가 5미터에 달하고 무게가 1톤에 달하였다. 생김새는 인간과 유사한 형태였고, 그들의 몸은 금속 같은 단단한 물질로 이루어졌다.

그들은 태초 정령들의 정기를 받아들인 금속에서 탄생했다고 하는데, 신화시대에서부터 존재한 긴 역사를 가진 존재들이라 그 신비성은 떨어진다.

이들은 광석 따위를 먹고사는데 그들은 광석의 불순물을 흡수한 뒤 나머지를 뱉어내며 성장해 나간다. 그들이 뱉어내는 잔여물은 매우 뛰어난 정제된 금속들이었고, 이 때문에 드워프족과 그 친분이 두터웠다 한다.

그들은 죽음을 향해 달려갈수록 새로운 생명의 씨앗들이 몸속에서 자라나기 시작하는데, 마지막 숨을 거두고 시일이 흐른 이들의 육체에서 어린 거인들이 그들이 남긴 잔여물을 흡수하며 성장하게 된다.

그들은 그 거대한 덩치와 무게에 맞게 매우 뛰어난 전투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일반적으로 인간들의 초급 기사와 맞먹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힘의 차이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지는데, 계급이 올라갈수록 전투력은 크게 상승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계급의 의미는 인간들과 달라 지도자를 빼고는 평등함과 책임감 앞에서 공평하게 나누어지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계급이 높아질수록 오직 자신이 지켜야 하는 사명감이 커지는 것 말고는 다른 계급의 거인들과 차이는 없었다.

이들 거인족은 매우 정의롭고 호쾌한 종족이었다.

죽음의 지배자가 모습을 보일 때 가장 선두에 나서 그가 이끄는 군대와 싸웠는데, 만약 그들이 이 전쟁에 조금이라도 늦게 참전했다면 인류의 문명은 석기시대 수준으로 떨어져 버렸을 것이다.

대륙의 평화를 위해 가장 앞장서 싸웠던 거인족인 만큼 그들에 대한 이야기나 전설이 많이 남아야 했지만, 현재 그들과 관련된 자료를 찾을 수 없다. 이곳 탈리아 왕국의 외진 영지에서나 그들의 이야기와 유사한 민화가 내려올 뿐이다.

이 모든 것은 죽음의 지배자가 그들에게 내린 하나의 저주 때문이다.]

당시 고대 거인의 비사를 알게 된 그는 잠시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지금 대륙을 지배하는 인간들은 고대의 거인족들에게 큰 빚을 진 것이다.

전사 중 최하가 초급 익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서는 무력을 지닌 자들이라 할 만큼 강력한 종족들이었으니 그들이 보인 활약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세상에 그들이 있었음을 아는 자가 자신 혼자뿐임을 알게 되자 야안은 혼란스러움에 저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사라져버린 종족에 대한 그 안타까움을 넘어서 오직 의문만이 그의 뇌리를 강타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들과 관련된 모든 이야기와 전설들이 지워질 수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죽음의 지배자라지만 어떻게 그 같은 일을 할 수 있는 것인가? 아리스 님께서 만드신 세상을 유지하는 절대 법칙을 그분의 영향력 아래 있는 자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가?

그에 대한 수많은 것이 의문이었다. 단순히 사라진 것이 아닌 존재 자체가 있었다는 사실을 지워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아 끝없는 의문만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그 거대한 의문을 풀어낼 방법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이번 전설의 반지 퀘스트로 고대 거인의 수장을 깨워 그에게 물어보는 것뿐이다.

그들이 잠자고 있는 곳은 이곳 영지와 관계가 깊었다. 수하들을 시켜 알아본 결과, 그곳은 지금은 폐쇄된 구리 광산이 있었던 곳이라 했다.

아무래도 그곳에 비밀의 방이 자리한 듯했는데, 그곳에 가보아야만 알 수 있을 모양이다.

구리 광산은 이곳과 반나절을 걸리는 외지에 자리했기에, 야안은 탐색의 목적으로 오늘 밤 움직이기로 했다.

현재 윌 백작으로 새롭게 올라선 윌 14세는 오늘 종숙부가 가져온 새로운 거래에 크게 불만을 터뜨렸다.

“하~ 겨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타국의 남작가 따위가 우리와 거래를 원한다니. 얼마나 우리 윌 백작가가 우습게 여겨졌으면 이러겠소? 한때 탈리아 왕국의 10대 귀족이었던 우리 윌 백작가가.”

자신의 아버지와 윌 영지를 수호하던 위대한 기사들의 죽음은 윌 백작가에 막대한 피해를 줬다. 그 기사들만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비록 군세가 약화되었어도 타지의 귀족들이 저자세로 자신의 밑에 복속될 것을 자청할 것이다.

한데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아버지와 기사들이 죽어나가자 백작 휘하에 있던 귀족들이 하나둘씩 떨어져 나갔고, 그 때문에 자금의 유동성에 크게 타격을 입고 말았다. 그들이 빠져나감으로써 시장이 죽어버린 탓에, 물품을 구입하는 데 큰 어려움이 생겼다.

다행히도 자작이신 윌 로이스 종숙부께서 영지에 버티고 있기에 쓰러지지 않은 것이지 만약 로템 종숙부마저 전장에 나가 전사하였다면, 이미 윌 백작의 오래된 숙적이던 라툼 후작가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이번 피난민들도 라툼 후작가의 작품이었다. 후작가는 피난민들에게 한편으로는 소문을 퍼뜨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강한 위협을 하여 그들을 윌 백작가로 몰았는데, 그 과정에서 3,000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죽어나갔다.

현재 자신의 영지 사람들도 다루기 힘든 윌 백작가로서는 그들을 받아들여도 문제였고, 또한 받아들이지 않아도 문제였다.

로템 종숙부의 인도 아래 결국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지만, 그로 윌 백작가가 받고 있는 피해는 상당했다.

귀족은 명예로 먹고사는 자인 만큼 고위 귀족은 더욱 그러했는데, 이번의 일로 윌 백작가의 명예에 큰 흠집이 생겼으니 지금 윌 14세는 자괴감에서 헤어 나오기 어려웠다.

피난민을 수습하지 못한 대귀족이라는 오명은 그 능력에 의문을 가지게 했으니 가문의 명예는 둘째 치더라도 세간에서 그 자신의 평가는 최악이었다.

이런 실정임에도 윌 로이스 자작은 실익을 추구했다. 명예도 살아남아야지 있는 것이었다. 지금 자신을 집어삼키려는 라툼 후작가에 맞서려면 하루빨리 영지를 재정비하여 군세를 키워야 했다.

윌 로이스 자작이 있기에 라툼 후작가도 윌 백작가를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그의 뛰어난 전술 능력을 알기에 전 백작인 윌 13세도 안심하고 핵심적인 병력인 기사들을 대부분 데리고 전장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런 예를 본다면 그는 수성에 한해서는 윌 가문에서 최고의 지휘관이라 할 만한 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그라도 자금의 유통이 어려워지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 저조한 자금의 유통 때문에 병사들을 다스리기 어려워졌다.

그들이 영지에서 패악을 부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지금 그들에게 줄 월급도 모자란 시기라 그들에게 벌을 주어 다스리는 데는 큰 무리가 있었다.

그러던 찰나, 그의 수하이자 이제 백작가에 두 명밖에 남지 않은 기사인 라덴에게서 희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바로 타지의 영지에서 고급 와인을 거래하러 왔다는 것이었다. 기호품 장사 중에서 가장 많은 이문이 남는 것 중 하나인 고급 와인의 거래는 이 탈리아 왕국의 소수의 귀족만이 그 끈을 잡고 있었다.

윌 백작가는 이 고급 와인 대신 고급 담배를 수입하여 거래했는데, 이번에 떨어져 나간 귀족 중에 이것을 맡고 있던 자가 거래를 들고 다른 10대 귀족 밑으로 가버린 탓에 지금 자금력에 큰 구멍이 생겨 있었다.

만약 이 고급 담배 수입이 잘 이루어졌다면 지금의 상황까지 오지 않았으리라.

그런 실정이니 고급 와인을 거래하고 싶다는 세력은 그에게 크게 기쁜 일이었다.

다만 이후 라덴이 그는 남작가의 사람이고 마크가라는 듣도 못한 가문이라 하여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가 건네준 와인을 마신 뒤에는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다른 고급 와인에 비해 풍미가 떨어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지금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채 거래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이득인지를 그는 알 수 있었다.

아주 이름 높은 고급 와인은 그야말로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였고, 그것이 아니어도 유명한 고급 와인은 직급이 높을수록 사들여야 했다. 손님을 맞이하거나 연회장을 열 때 내놓는 와인의 가치로 능력을 평가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비싸기만 한 와인을 올리는 것은 격이 떨어지는 일이다. 그 내놓은 와인의 향과 맛에 주인의 안목이 평가될 정도이니 자칫 비싸기만 하고 격이 떨어진 와인은 오히려 조롱거리가 될 뿐이다.

한데 이 와인은 아직 그 누구도 먹어보지 않은 와인이었으니 이 와인을 거래함으로써 떨어진 윌 백작가의 위신을 올릴 기회였다.

더불어 알려지지 않은 거래인 만큼 좋은 가격으로 그들과 거래할 수 있으니 여러모로 좋았다.

예전이었다면 이런 와인을 들고 왔다 하더라도, 타국의 시골 영지에서 만들어 내었다는 것만으로도 거절하였을 것이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진 만큼 이보다 더한 호재는 없었다.

그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아 불만을 토해 내는 가주에게 다시 조언했다.

“이것이 그 남작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만약 그가 이 와인을 우리와 거래하지 못한다면 저 오만한 라툼 후작가가 그 이익을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되면 그들의 공세가 더욱 거세지는 실정에 이르게 되니 반드시 그들과 거래를 해야 합니다.”

윌 14세는 종숙부의 말에 피곤하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지금까지 그러하였듯이 종숙부께서 알아서 하시오.”

그러며 그가 건네는 와인을 거들떠보지 않은 채 회의장을 나섰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윌 로이스 자작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토록 영민하신 분이. 그렇게 충격이셨던가?’

그 누구보다 성정이 밝고 영민한 백작의 모습을 알기에 그의 실망감은 컸다.

안개 낀 늦은 산속의 밤은 그 어느 때보다 험했다.

어둠과 안개가 만나니 그 찬란한 별과 달은 자취를 감췄고, 울퉁불퉁한 산길은 하나하나가 잘 만들어진 함정이었다.

그런 산속을 작은 빛에 의지해 올라서는 자가 있었다. 가슴 부위에서 일어나는 빛은 은은하게 그의 주위를 밝힐 터라 움직이는 데는 무리 없었지만, 그래도 그 사내의 움직임만큼 빠르게 올라서기란 어려운 일이다.

한 시간여를 올라서던 그는 어느 거대한 동굴 앞에서 멈추었다. 그곳은 이미 200년 전에 폐쇄된 구리 광산으로 오랜 세월 탓에 예전 수많은 일꾼이 오고 갔던 흔적조차 사라져 있었다.

“이곳인가 보군.”

그의 생각보다 길이 험했다. 아무래도 광산의 이용 가치가 끝이 나자 인간들의 발길이 끊기며 야생의 모습이 살아났기 때문이었다.

하기야 10년이면 산의 지리도 바뀔 지경인데 벌써 200년이 지났으니 이처럼 길이 험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벌써 그의 예민한 후각을 거슬리게 하는 몬스터 특유의 분비물 냄새가 났다. 입구를 무너뜨린 터라 조그만 덩치밖에 들어서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떠돌이 오크들, 아니면 코볼트 정도가 이곳에 서식을 할 것이다.

과연 그의 육감을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야안은 이내 빛의 구를 펼쳤다. 뇌전의 정화에서 나오는 빛으로는 어둠에 특화된 몬스터들을 상대하기가 어려웠다.

오크라면 크게 문제가 될 것이 아니지만, 야행성인 코볼트라면 이런 빛의 구가 그들의 시야를 저하시킬 것이다. 강렬한 빛을 만들어낸 야안은 이내 구리 동굴 안으로 들어섰다.

갑자기 환한 빛이 동굴 속을 뒤덮으며 눈을 현혹시키자, 정찰을 나가려던 10여 마리의 코볼트들이 괴성을 질렀다.

“키이익, 인간. 인간이다.”

먹이가 제 발로 동굴 속에 모습을 보이자 그들은 수에 있어 자신들이 우위임을 알고 동시에 달려들었다. 교활한 코볼트인 만큼 빠른 판단력이었고, 그 빠른 습격은 치명적이었다. 다만 상대가 나빴다. 그들에게 운이 없었다.

야안은 왼손의 검지를 내밀어 어깨를 살짝 흔들었고, 그에 가장 앞섰던 코볼트의 머리 한 부분에 큰 구멍이 났다.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가장 앞서 뛰어가던 자가 뒤로 넘어가자 잠시 멈칫했던 코볼트들이었지만, 이내 야안이 검을 들고 자신에게 다가오자 그 의문을 잊은 채 덤벼들었다.

야안의 오른손에 자리한 검은 그들을 상대하는 데 느긋한 모습을 보였다. 빠르지도 않게 그저 툭 건드리듯이 뻗었다가 이내 내려치고, 다시 베어 올리더니 이내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는 와중에 그의 왼손 검지가 그들을 가리킬 때마다 코볼트들은 죽었고, 그렇게 숨 몇 번 쉬지 않는 짧은 시간에 3분의 2가 사라졌다.

이제 겨우 여섯 마리밖에 남지 않은 믿기지 않는 현실에 어리둥절해 겁에 질린 모습도 보이질 못했는데, 그런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야안의 검은 그들의 미간을 꿰뚫고 지나쳤다.

그간 몬스터들을 사냥했던 경험이 지금의 냉정하면서도 실속 있는 손속을 둔 것이었다.

여행 도중에 익스퍼트의 경지를 완전히 수습하게 되었는데, 그 이후 처음으로 펼친 파이어 핑거의 위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되자 야안은 자신의 왼손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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