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94화
하지만 마크 영지는 예전 야안이 말했듯이 최종적으로는 백작가 규모까지 영지를 확장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최소 규모라도 그렇게 만들어 놔야지, 마크 자작이 카람 백작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영지 확장 계획은 변수가 없는 한 10년을 두고 이루어질 것이다.
야안은 이번에 데려온 농노들을 보름에 걸쳐 재능에 따라 분류했는데, 운 좋게도 그들 준천재에 달하는 이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준천재는 야안의 스승처럼 한쪽으로 기운 천재를 말한다.
암기 분야나, 계산 등 한쪽으로 재능이 기운 존재인데 엘룬이라는 이 농노는 야안의 스승 마론처럼 암기 능력이 매우 뛰어났다.
이 능력은 현자의 길을 걷는 자에게는 저주스러운 일이었지만, 행정직 종사자들에게 축복과도 같았다.
행정을 배우는 데 필요한 사전 지식의 양도 그러하거나와 하루에도 수많은 문서의 내용을 기억하고 처리해야 하는데 이 같은 능력이 있다면 그저 스쳐보는 것만으로도 일을 끝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같이 한쪽으로 기운 이들은 그 능력이 한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그 분야에 한해서면 웬만큼 뛰어난 천재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외에도 행정에 재능이 있는 자 다섯 명을 더 뽑아냈고, 그 외 대장장이 일과 목수 일에 재능이 있는 이 열 명 정도를 뽑을 수 있었다.
엘룬은 어안이 벙벙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 팔려 와 고생한 탓에 그는 자신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기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있었는데, 이 같은 능력은 똑같은 일만을 하는 농노의 신분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오히려 튀어 보일까 걱정이었다.
농노는 어리석어야 가치가 있다. ‘왜’라는 의문을 가지는 농노는 폐기 처분 대상이다. 그런 농노는 농노들 사이의 물을 흐리며 일의 능률을 떨어뜨리는 탓이다.
엘룬은 아주 어린 시절, 농노 선배 중 한 명이 그런 식으로 튀어 보이다 두들겨 맞아 죽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의 충격으로 그는 자신의 능력이 눈에 띌까, 쥐 죽은 듯 살았는데, 이번에 마크 영지의 농노들을 살피러 온 총관에게 자신의 능력을 들킨 것이다.
외모는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눈빛을 보는 순간 엘룬은 말문을 잃었다.
자신이 꼭꼭 숨겨둔 비밀도 이자 앞에서 밝혀지는 것이 아닌가 걱정했기 때문인데, 빌어먹게도 그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엘룬은 크게 탄식하였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상태를 안다는 듯 총관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을 터이니 말이야. 그나저나, 준천재는 발견하기가 쉽지 않은데 정말 운이 좋았어. 그래, 이 정도 재능이라면 한스가 가르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재밌는 사제가 될 것이다.
스승은 연산 능력이 뛰어나고, 제자는 암기 능력이 뛰어나니 그 둘이 같이 행정을 맡는다면 앞으로 발전된 마크 영지라 해도 쉽사리 꾸려나갈 것이 분명했다.
‘성인이 된 선물로는 과한가?’
올해 성인이 된 한스에게 제자를 맡겨, 가르치며 여러 가지를 배우기를 기원했다.
최근 들어 일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 덕분에 미숙한 관리들은 이제 제 몫을 하는 관리로서 성장하였다.
야안은 그들에게 다섯 명의 수재도 맡길 생각이었다.
이들은 아직도 효율적인 해결방안을 찾기 위해 조를 만들어 회의를 하는지라, 다섯 명의 수재들을 따로 맡겨 가르치는 것보다 그들이 자신 있어 하는 분야를 각각 맡겨 가르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실상 올해에 뽑은 행정 능력의 인재 일곱 명을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었고, 보고에 따르면 그 효과는 뛰어났다.
그들 일곱 명도 스승들을 본받아 조를 짜며 회의를 하는 열성을 보인 것이다. 언제나 그러하듯 좋은 스승에는 좋은 제자가 있는 것이다.
“네?”
한스는 선물이라며 어린 소년을 자신에게 맡기고 가는 스승님에 얼떨떨했다.
요즘 작년에 등용된 관리들이 제 몫을 해내기 시작해, 마법 수련에 시간을 더 부여하려 했던 한스는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 순진무구한 엘룬의 눈을 바라보며 곤란하다는 듯 관자놀이를 긁어댔다.
“그것참, 이름이 뭐지?”
엘룬은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다운 사내가 자신에게 말을 걸자, 당황하다 겨우 입을 열었다.
“엘, 엘룬입니다.”
그 어리숙한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보던 한스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예전 자신이 스승님에게 저랬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분 좋은 과거를 기억하게 한 엘룬에게 그는 다가가 그의 왜소한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나는 한스라 한다. 너를 가르칠 스승이기도 하지. 앞으로 잘 부탁한다.”
“네, 네. 잘 부탁합니다.”
총관님처럼 곧고 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엘룬은 황송하기도 해 그저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사제 관계를 맺은 첫날 한스는 자신의 본래 신분에 관해 이야기하며 이곳 마크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제자에게 말했고, 엘룬은 한스가 자신과 같은 농노 출신이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 듯 내내 경악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크 자작은 기병들에게 브라운인들처럼 말 위에서 생활하게 하는 버릇을 들인 지 두 달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그 결과에 많이 만족한 모습을 보였다.
아직 자신의 기준에는 차지 않지만 기병들의 말 다루는 솜씨가 상당히 늘어났음을 안 것이다. 말과 같이 호흡하며 지내다 보니, 말이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조금씩 알게 된 덕분인데 이에는 작년 야안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짐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짐은 현재 이곳 말을 관리하고 기병을 훈련하거나 전투마를 사육하는 곳의 책임자에 자리하고 있었다.
관리직으로 따지면 하급 관리의 권한을 지닌 것이다. 짐은 처음으로 중책을 맡았을 때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마음 좋은 여러 관리가 도와주면서 이제 그 불안함이 많이 가셨다.
라몬 왕국에서 론이 데려온 스물한 명의 사육사를 밑에 두고 관리를 하고 있었는데, 말 사육사들은 상당히 비싼 노예였기에, 짐과 같은 우수한 노예가 아닌 5~10년 차 정도의 노예들 정도였다.
하지만 수준이 떨어진다 해도 그것은 라몬 왕국에서나 해당하는 말이었지, 마일드 왕국에서는 우수한 사육사들이었다.
야안은 이번에 들인 농노 중 100명을 이들의 밑에 보냈다. 비록 말은 안 하고 있지만, 마크 자작이 기병들을 밤낮없이 훈련하면서 그가 크게 힘들어하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관리해야 할 말들의 수가 더 늘어날 것이라 보았기에, 그들로 하여금 일을 돕게 하였고, 그제야 짐은 가중된 업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물론 마구간의 일을 가르쳐야 하지만, 마구간의 일은 대부분 단순 형태의 노동이었다. 그 과정에서 말과 친해지며 하나둘씩 스스로 깨닫거나 선배들이 하는 일을 옆에서 보며 배우기도 하는 것이다.
이번에 뽑은 노예들은 다들 근골이 좋고 힘이 좋은 편이라, 짐을 만족하게 했다.
현재 마구간을 관리하는 이들은 예전 노예 일을 하던 자들이라 이번에 들어온 100명의 후배를 살갑게 대하며 여러 면에서 도움을 주었다.
이는 단순히 노예로서의 공감대라기보다는 그들 대부분의 나이가 서른 중반에 달하였기에 자식뻘 되는 어린 노예들이 안쓰러웠던 마음이 더 컸다.
일이 그렇게 되자 짐을 비롯해 마구간의 인부들은 말의 상태를 알아보는 방법을 기병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그들은 그 과정에서 말을 간단한 증상들을 치료하는 방법들도 알 수 있었다.
마크 자작은 가을 수확 시기가 되기 한 달 전 마지막으로 실력 점검을 하기 위해 대규모의 몬스터 토벌을 시작했다.
이번에는 상당히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기에 많은 수의 몬스터들을 만났으나, 다행히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간의 전투 경험 덕분이었다.
또한, 마크 자작은 이번 토벌전이 영지 확장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병사들의 기량을 확인하는 자리였기에 무리하지 않은 덕분이기도 했다.
두 달이 넘는 시간 동안 훈련된 기병은 놀라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말을 다루는 솜씨가 늘어나면서 삼방검진을 아주 자연스럽게 펼치며 자작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하자, 무서운 위력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테리는 마크 자작으로부터 전술을 공부하면서, 그의 지시에 따르며 다음 지시가 어떻게 흘러갈지 감을 잡은 상태라 마크 자작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주었다.
이제 익숙해진 전투식량을 섭취하며 열흘을 1,500의 병력을 이끌며 나아가던 마크 자작은 앞서 나가던 정찰병으로부터 강을 발견하였음을 들었다.
강이라는 말에 놀라 다가간 마크 자작은 비록 강줄기의 한 자락에 불과하지만 상당한 넓이를 지닌 강을 발견했다.
그는 정찰병을 보내어 이 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조사하게 하였고, 반나절이 지나 노숙 준비가 한창일 때쯤 돌아온 정찰병으로부터 그 강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들었다.
야루스 산맥 영역으로 들어서는 강이라 하였는데 그 말에 마크 자작은 이 강이 그 유명한 바젠 강의 한 자락임을 알게 되었다.
바젠 강은 물이 맑고 깊으며 그곳에 사는 물고기들은 맛이 대단히 좋았다. 또한, 그곳에서만 서식하는 황금 잉어들은 기력을 크게 보하는 뛰어난 약이기도 했다.
아쉽게도 바젠 강은 야루스 산맥의 영역에 자리하기에 황금 잉어들은 부르는 게 값이란 말이 들릴 정도이다.
보통 마리당 30~50골드 정도로 거래되는 귀한 보양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이 강 덕분에 관개수로를 크게 건설할 수 있다는 점이 마크 영지에 가장 큰 도움이었다.
바젠 강은 수심이 깊어 댐을 만드는 과정이 힘겨울지 모르나, 일단 완성이 된다면 어머니의 젖줄과도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마크 자작은 야안으로부터 관개수로의 중요성을 들었던 터라 이 강의 출현에 대단히 기뻐했다.
그는 본래의 토벌 기간을 더 늘려 바젠 강 주위로 영역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다.
야안은 바젠 강의 강줄기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 때문에 마크 자작의 토벌이 예상 기간보다 더 길어진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지원 부대와 성벽 공사의 인력을 돌려 목책을 짓는 인부들을 늘렸다.
목책이 지어진 이후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성벽을 지어 올릴 생각인데 이곳을 가장 우선순위로 올렸다.
그만큼 바젠 강이 앞으로 마크 영지에 큰 자원이 되리라 판단한 것이다.
점차 넓혀진 포도밭이나, 밀 농사 구역 등에는 많은 물이 필요했다. 그 외에 두 배 이상 늘어난 영지민이 식수로 사용할 우물을 찾고 있으나 그 성과가 미미했고, 몇 개 되지 않는 시냇물로는 필요한 모든 물을 다 조달하기란 어려움이 컸다.
비라도 오지 않는 날에는 꼼짝없이 한 해 농사를 망치는 것이기에 이 관개수로 공사는 마크 영지의 발전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본래라면, 마크 영지와 먼 곳에 떨어진 여러 시냇물이나 호수 등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등의 큰 수고로움을 끌어안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지금까지의 공사들을 합친 만큼보다 더 큰 비용이 들 것이 분명했는데, 이번 바젠 강의 발견 덕분에 그런 수고로움을 덜 수 있었다.
관개수로 공사는 지금보다 시장의 규모가 두 배는 더 커지고, 최소 자작가 수준의 인력이 모이면 시작하기로 했다.
그는 론에게 말하여, 내년 안에 관개수로 공사를 맡을 만한 자를 알아보라 명했다. 그의 판단으로는 2년 안에 최소 기초공사 정도는 시작할 수 있다 생각했다.
“바빠지겠군.”
벌써 가을 추수 준비로 영지는 크게 활기를 띠었다.
비료로써 늘어나는 수확량에 한계선이 온 것인지 올해는 7% 정도의 수확이 늘어나는 것으로 그칠 듯했다.
대신 감자, 옥수수, 사탕수수 등 이제 제법 터가 잡힌 밭에서의 수확량은 30%가 늘어나 더 이상 곡류의 수입은 없어도 될 것으로 보였다.
야안은 이번 가을이 끝난 이후부터는 농노들로 하여금 새로 영지에 편입된 평지를 골라 이곳에서도 밀 농사를 할 수 있게 준비시켰다.
또한, 땅이 없는 영지민을 우선으로 하여 수확의 50%를 받는 조건으로 평지를 빌려주어 땅을 일구게 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우선으로 성벽이 완성된 곳 중심으로 나누었는데, 영지 외지라 해도 성벽이 완성되어 안전한지라, 이번에 자신의 땅을 경작할 수 있다는 생각에 많은 이들이 신청하였다.
야안은 가을 이후부터 부지런히 땅을 고르게 할 수 있다면 내년에는 지금의 밀 수확의 20% 정도를 더 올릴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생각한 것보다 이곳 바젠 강의 강줄기 영역은 넓어 20일이 지나서야 마크 자작은 몬스터 토벌을 끝낼 수 있었다.
이후 병력의 20%는 그곳에 남겨 목책 공사 시 위험 요소에서 보호하게 한 마크 자작은 영지로 돌아와 가을 추수가 끝날 때까지 병력을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편으로 첩보 일을 통해 나프롬 영지에서의 상행의 투로 등을 조사하게 하거나 그들의 병력의 행보를 살폈다.
상행을 막아 돈줄을 묶고, 병력을 각개격파하여 영지를 축소하게 할 참이었다.
이번 몬스터 토벌을 통해 블랙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던 그는 2,000 병력이 넘는 나프롬 자작의 병력 따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카람 백작과 나프롬 자작의 유대 관계를 생각하면, 카람 백작의 지원부대가 문제였다.
현재 카람 백작의 병력 60%가 전장에 투입되었으나 그럼에도 카람 영지에 남아 있는 병력의 수는 1만하고도 3,000이 넘었다.
이는 카람 백작의 경쟁 상대인 티온 백작가를 견제하기 위해 남겨둔 병력이었는데, 단순히 방어적인 모습만 취한다면 그중 4,000에 달하는 병력을 나프롬 자작에게 지원할 수 있을 듯 보였다.
그 병력 중에서도 기마병 1,000이 움직일 수 있고, 카람 영지의 붉은 검이라 불리는 라테온 남작이 모습을 보일 수 있다.
라테온 남작은 카람 백작의 전 기사 단장의 아들로 10년 전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수많은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전투 경험이 많고, 그가 이끄는 붉은 물결이라는 칭호를 얻은 기병들은 긴 시간을 티온 백작가를 상대로 얻은 경험 덕분에 하나같이 노련한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라테온을 선두로 하는 돌격 형태의 전술을 띠는데, 오랫동안 호흡을 맞추어서인지 그 움직임은 그들의 이름처럼 석양에 이는 붉은 물결을 보는 듯했다.
‘이들이 움직인다면, 그때부터가 진정한 전쟁의 시작이겠지.’
그러기 위해서는 나프롬 자작가와의 전투에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했다. 그는 지난 전쟁의 부족한 점들을 하나둘씩 살펴가며 좀 더 효율적인 전술을 만들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하며 수정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