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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103화 (103/385)

야안 103화

33. 저주받은 숲

휘이이잉.

눈보라에 동굴 안을 밝히던 모닥불이 세차게 흔들렸다.

하얀 갈기 털이 인상적인 두 필의 야쿤은 모닥불의 따뜻함에 녹아 어느새 잠이 들어 있었다. 그 야쿤에서 멀지 않은 곳에 두 사람이 자리했다.

그들은 각자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한 명은 천천히 검을 내려치는 등의 수련을 하고 있었고, 한 존재는 은은한 붉은빛을 뿌리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두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은은한 붉은빛을 뿌리며 호흡을 하던 사내가 빛을 거두며 눈을 떴다. 사내는 마치 조금 전 붉은빛에 영향을 입기라도 한 듯 붉은 머리에 선홍빛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라진은 정령의 호흡을 하기 전과 같은 모습으로 검을 휘두르고 있는 친우의 모습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저같이 수련을 하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낼 수 있었겠지.’

라진은 이 추위 속에서도 땀을 흘리며 수련하는 야안을 보며 그가 처음 자신에게 검기를 보여주었던 지난날을 회상했다.

라진은 밤새 술을 나누었던 이 눈앞의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첫인상도 좋았지만, 이 사내는 시간이 갈수록 마치 오래전에 잃은 형제를 찾은 듯한 기분을 가지게 해줬다.

그는 이것이 책에서나 보았던 친구라는 존재에게 가지는 감정임을 알 수 있었다.

참으로 유쾌한 일이었다. 마음이 절로 벅차올랐다.

그는 가문에서 귀족의 예법을 배우며 술을 마시는 법도 배웠지만, 그것은 그저 술을 평가하는 귀족들의 유희 과정을 배우는 것이었을 뿐이다.

아니, 유희 과정이라 하지만, 그것은 귀족들 간의 재미없는 교류를 위해 벌이는 것으로 라진은 내내 이 술은 어떻게 마셔야 하고, 이것은 어디에서 생산되는지 등에 대해 배우느라 술을 즐기지 못했다.

아니, 그때 이후 술이라면 그다지 내키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이 사내, 베론 야안이라는 이 사내와 술을 마시면서 왜 수많은 문학의 거장들이 술을 찬양하였는지 알게 되었다.

이 친구와 함께라면 저잣거리의 싸구려 퍽을 마시더라도 금주의 달콤함을 알 것 같았다.

그것은 그도 다를 바가 없었는지, 쓰러진 여관 주인을 그의 방에 데려다 눕히고 그가 자신의 방에서 다시 술자리를 만들었다.

술을 먹은 열기를 식히려 창을 여니 달빛에 그을린 하얀 눈이 그들을 반겼다. 벌써 퍽 한 통과 위스키 세 병을 비운 그들은 이제 서로가 농을 나눌 만큼 가까워졌다.

“하하, 정말 술을 좋아하는군.”

야안의 말에 라진은 손을 저었다.

“아니, 집에 있을 때 어쩔 수 없이 마신 이후에는 입도 대지 않았네. 한데, 오늘은 마치 달콤한 꿀보다 더 달군.”

“그래? 그거 기쁘군. 좋아, 그럼 내가 아주 귀한 술을 먹게 해주지.”

야안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옷 속에서 공간 주머니를 꺼내어 올해 수확한 포도주를 꺼냈다.

라진은 야안의 공간 주머니에 눈에 이채를 보이다, 이내 그가 꺼낸 포도주에 고개를 살짝 꺾으며 말했다.

“처음 보는 상표인데, 어디 것인가?”

그의 말에 야안이 웃음을 흘리며 마개를 따 그의 잔에 부어주며 말했다.

“고향에서 가져온 와인이네. 올해 수확한 것이지. 혹시나 하여 몇 병 챙겨 왔는데, 다행이네. 자네와 함께 잔을 기울일 수 있으니 말일세.”

“호~ 자네 영지에서. 그것참 기대되는군.”

그러며 야안이 채워준 와인의 향을 맡던 그는 한 모금 마시고 잠시 향을 음미하다 감탄을 보였다.

“좋군. 내 여러 곳의 고급 와인을 마셨지만, 그에 못지않은 와인일세.”

공작가에서 마셨다는 와인이라면 고급품 중에서도 그 등급이 뛰어난 것일 터이지만, 야안이 건네준 것은 그 와인과 견주어도 크게 밀리지 않았다.

야안은 라진이 공작가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의 찬사에 한쪽 팔을 크게 벌리며 다른 한 손으로 가슴에 손을 올리고 작게 고개를 숙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런, 그 같은 평가를 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라진은 야안의 과장된 예법이 우스꽝스러워 크게 웃음을 흘렸고, 그 또한 야안과 같은 장난기 어린 예를 보이며 인사했다.

“흠, 아닙니다. 오히려 이 같은 와인을 맛보게 해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장난이라는 것을 제대로 쳐본 적이 없는 라진은 너무 정숙하게 예를 차려 재미란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모습에 야안은 배를 잡고 웃어야 했다. 그는 한참을 웃음을 흘리다 겨우 그치며 말했다.

“하하하, 이런 점에서 자네와 난 비슷하군. 어쩜 그렇게 재미없게 농을 하는 것인가? 우리 부인에게 자네를 한 번 보여주고 싶군.”

자신과 라진이 나누는 재미없는 농담들에 크게 질려 하는 멜리나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해 그는 다시금 웃음을 흘려야 했다.

라진은 야안이 부인이 있다는 말에 눈에 이색을 띠며 물었다.

“벌써 결혼을 하였다는 말인가? 겨우 스물하나밖에 되지 않았을 것인데.”

“결혼만 했을까? 세 살배기 아들도 하나 있네.”

아들까지 있다는 말에 라진은 놀랐다. 야안 정도의 나이에 그 같은 실력자라면, 혼인할 시간도 없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그 예상이 빗나갔다.

“세 살배기 아들까지라면, 성인이 되고 바로 혼인을 치렀나 보군.”

“그러하네. 아무래도 시골 영지 출신이다 보니 일찍 치렀지. 그러는 자네는 혼인한 여인은 없는가?”

야안의 말에 라진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없네, 사정이 좀 있어서 말일세.”

라진의 그 말에 야안은 단번에 그의 사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공작가의 자식이라 해도 스물세 번째 서열이었고, 그마저도 외가는 체만 왕국이 미개인이라 치부하는 저주받은 숲의 부족이었다.

머리가 정상인 귀족이라면 그에게 딸을 내주지 않는 게 당연한 일이다.

야안은 애써 화제를 돌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고, 라진도 그런 야안의 마음 씀씀이에 기뻐하며 다시금 친분을 나누었다.

어느새 동이 트고 있었다.

한나절하고도 반나절을 같이 술을 마시던 그들은 잠시 눈부신 붉은 해를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은 듯 잠시 콧소리를 울리던 라진에게 야안이 말했다.

“이번 여정 말일세. 우리끼리 가는 게 어떤가?”

그 말에 라진이 눈을 빛내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불가능하네. 기사 정도의 실력을 지녔으면 모를까? 겨우 상급 유저 두 명으로는 딱 죽기 좋네.”

그의 말에 야안이 빙그레 미소를 머금는다. 그리고 햄을 자르던 칼을 쥐어 검기를 일으켜 나무 그릇을 잘라냈다.

“이런 실력을 말하는가?”

야안이 쥔 작은 칼이 닿지도 않았는데 나무 그릇을 잘라내자, 라진은 잠시 말없이 그것을 바라보다 자신의 뺨을 쳤다. 그리고 고개를 두어 번 저으며 말했다.

“이런, 내가 취기가 도는 모양이네. 조금 전 어이없는 꿈을 꾸었어. 자네가 그 칼로 검기를 일으키더군, 하하하.”

라진의 그 반응에 야안이 미소를 보이며, 다시 칼에 검기를 일으켜 그들이 비운 포도주의 병을 정확히 반으로 갈라냈다.

“꿈이 아니네, 친구.”

야안의 말에 라진은 한동안 미간을 긁적이며 말을 잇지 못했다. 꽤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는 술이 다 깨었다는 듯 맑은 눈빛으로 야안에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혹시 자네,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 것인가?”

이물의 힘을 빌렸다 해도 겨우 스물한 살밖에 되지 않은 야안의 나이를 생각한다면 정상이 아니다.

아무리 뛰어난 천재에 이물의 힘을 빌렸다 해도 야안의 나이에 그 경지에 들어설 수는 없다. 배 속부터 검을 수련한 이라면 모를까?

검을 수련한 지 20년도 채 되지 않아 익스퍼트에 올라선 경우는 찬란한 문명이 꽃피던 고대 시절에서도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놀람을 이해한 야안은 미리 생각한 변명거리를 말했다.

“그럴 리가, 내가 늙어 보이는가? 이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스승님으로부터 물려받은 괴이한 수련 방식 덕분이지.”

그러며 복수면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라진은 잠을 그처럼 줄여 수련했다는 야안의 말에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그 말은 하루에 한 시간 반 정도의 수면을 취하며 그 시간마저 수련을 했다는 뜻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이던가?

하지만 그것이 아니면 야안이 보인 경지가 말이 안 되는지라 라진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믿음을 가지게 되자 라진은 야안이 겪었을 그 고행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해 이 천재에 대해 감동이 일어났다.

노력하는 천재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구절을 책에서 읽었을 때 별다른 공감이 가지 않았는데, 실제로 그 같은 이를 옆에 두어보니 그 구절이 어떤 의미인지 절절하게 다가왔다.

라진은 야안이 숨기던 사실을 알려주자, 그 또한 질세라 자신의 힘을 보여주었다. 비록 계약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아 투박한 형태를 이루고 있었지만, 정령의 힘을 그에게 보여주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라진은 손을 뻗어 어른 머리만 한 불덩어리를 생성했는데, 이내 그것을 넷으로 나누더니 화살 형태로 만들었다.

그리고 쌓아놓은 눈을 향해 창밖으로 이를 날렸다. 곧 치이익 하며 요란한 소리가 나더니 쌓아놓은 눈의 반이 녹아내린다.

야안은 처음 보는 정령의 힘을 흥미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마법과 같은 마나를 이용한 점에서는 같았지만, 라진이 계약한 정령이 불의 정령인 만큼 애초부터 순도 높은 불의 기운만을 모아 쉽사리 대기에 자유로운 형태로 불을 만들어내는 그 기이한 방법에 야안은 한눈에 정령사의 무서움을 알았다.

마치 검사와 현자의 중간 형태를 보는 듯했다. 어떻게 보면 가장 어정쩡하지만, 전투 경험이 많은 정령사가 이를 효과적으로 펼친다면 매우 무서운 적이라 하겠다.

불을 저처럼 자유롭게 다룬다면 쉽사리 그 공격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미리 방어하는 형태로는 막을 수 없으니 다가가 미리 쳐부수는 형태로 정령의 힘을 없애야 할 것인데 라진의 검술이 좀 더 보완된다면 대형 몬스터라 해도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라진은 야안의 놀라는 모습에 미소를 보였다.

“외가의 핏줄에서 얻은 힘이지. 경지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다듬어야 할 부분이 많지만 이만하면 이 여정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범상한 신분이 아님에도 소탈한 미소를 보이는 친우의 모습이 점점 마음에 든 야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정령사와 동행이라, 든든해지는군.”

“하하, 나만 할까? 앞으로 여정이 기대될 정도이네.”

잠시 예전 그때를 회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던 라진은 어느새, 수련을 마치고 자신의 앞에 다가온 야안의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뭐 재밌는 일이라도 생각났는가?”

마른 헝겊으로 땀을 닦아내며 자신을 바라보는 야안에 라진은 고개를 저었다.

“별일 아니네. 자, 드시게. 미리 만들어 놓았네.”

그러며 눈을 녹인 물에 전투식량을 타 걸쭉해진 음식을 야안에게 건네었다. 야안은 아직 따뜻한 전투식량을 섭취하며 동굴 밖을 바라보았다.

“도통 그치지를 않는군.”

“벌써 이틀이나 지났으니, 내일 중으로 그칠 것이네.”

라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야안은 야쿤의 성긴 털을 쓰다듬었다.

이곳 체만 왕국에서만 키워지는 야쿤은 비록 말보다는 느리지만, 추위에 강해 이처럼 눈이 많이 오는 겨울에 크게 애용되는 동물이었다. 힘도 좋고 성격이 순해 여러모로 도움이 되기에, 야쿤은 웬만한 명마만큼이나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지난 열흘간의 여정에서 야쿤의 덕을 톡톡히 본 야안이었기에 고약한 인상을 지닌 야쿤에게 여러 가지로 정이 든 상태였다.

식사를 마치고 가져온 술을 한잔하며 담소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 정도 몸이 편해지자, 대련을 시작했다.

대련이라고 하지만 사실 야안이 라진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지도 대련의 형식이었다.

라진은 야안의 충고를 들어, 불의 정령의 활용법을 크게 늘리고 있었다. 비록 힘은 약하지만 마치 손발처럼 불을 다루기에 야안은 그에게 파이어 핑거 같은 형식을 연습하게 했다.

불의 기운을 압축한 상태에서 회전을 넣는 연습을 하게 했는데, 얼마나 빠른 회전을 시키느냐에 따라 그 관통력이 달라지기에 라진은 그 같은 형태를 보이기 위해 지난 열흘을 진저리칠 정도로 고생해야 했다.

처음 한차례 그런 공격을 만들었을 때는 그의 단련된 육체도 지칠 정도로 상당한 집중력이 필요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지자 열 번 정도는 펼칠 수 있게 되었다.

야안의 주문은 날이 갈수록 까다로워져 갔다.

좀 더 가늘고 더 작게 압축하기를 원한 것이다. 그렇게 차츰 줄여나가다 보니 작은 새끼손가락 크기의 구슬 형태가 되어갔는데, 야안은 그 상태에서 회전 속도를 지금의 두 배 정도로 올릴 수 있다면, 오우거라 해도 급소를 당하면 한 번에 명이 끊길 것으로 보았다.

야안은 이 회전 속도를 올리는 일은 상당한 시간이 더 걸릴 것으로 생각했기에, 그것을 미뤄두고 만들어진 그 불의 구슬과 함께 검을 이용한 효과적인 공격 방법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야안이 가르쳐준 공격 형태는 그가 이 작은 불의 구를 만들어낸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마치 활과 검을 동시에 다루는 듯한 형태였기에, 라진이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오히려 이도 저도 안 되는 기이한 형태로 끝이 나 아니, 한 만도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검을 들어 올려. 지금이야, 구슬을 날려. 아니, 너무 늦어.”

야안은 적절한 공격 타이밍을 몸으로 기억하게 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라진은 이 지옥 같은 훈련이 후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임을 알기에 이를 악물고 야안의 방식을 따랐다.

생애 처음 사귀는 친우가 잠자는 시간마저 줄이며 만든 훈련 시간을 자신이 소비하고 있음을 알기에 라진은 야안에게 더는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꿈에서도 수련을 할 정도로 빠져들었다.

그의 그런 노력과 정령술에 있어서 천재라 할 수 있는 재질이 합쳐지자 어느새 비기너를 넘어섰고, 이제 하급 정령 익스퍼트에 달할 정도로 정령술이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정령과 계약하고 반년도 채 되지 않아 그 같은 성장을 보였다는 것을 다른 정령사가 안다면 감탄을 넘어 경악할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 정령의 기운도 바닥을 치고 육체도 한계 이상에 다다를 때까지 가서야 야안은 수련을 마쳤다.

“뭐~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야안에 라진은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헉헉, 넌 정말 수련에 한해서는 무자비하구나.”

그런 라진의 모습에 야안은 그의 등을 툭 치며 마케를 걸어주고는 말했다.

“그대로 가만히 있으면 근육이 뒤틀리니, 어서 몸을 풀어두라고.”

“으윽, 지독한 놈, 헉헉.”

라진은 마케가 걸린 이후 몸의 피로가 사그라진 느낌이라 남은 힘을 짜내어 몸을 풀어주었다.

잠시 그런 친우의 모습을 바라보던 야안은 미소를 보이다 이내 수련을 시작했고, 라진은 다시 또 쉬지 않고 검을 수련하는 야안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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