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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104화 (104/385)

야안 104화

눈보라는 라진이 말한 대로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그쳤다.

눈 때문에 길이 사라지긴 했지만, 대충 이곳이 어디쯤인지 짐작했기에 그들은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해 길을 더듬으며 나아갔다.

야쿤들은 오랜만에 동굴을 벗어나 눈길을 걷는 것이라 흥분되는 듯 발걸음이 경쾌했고, 덕분에 그날은 예상 거리보다 더 멀리 갈 수 있었다.

위에 구멍이 난 간단한 형태의 천막을 지어낸 그들은 구멍 아래에 모닥불을 피워 몸을 녹였다. 야쿤들도 노곤해했는데, 야안은 피곤해하는 야쿤들에게 마케를 펼쳐 편안한 휴식을 취하게 해주었다.

확실히 겨울이라 그런지, 산맥을 지나고 있음에도 두 차례만 몬스터들을 마주했을 뿐이라 마음이 편했다.

그 두 번도 몇 되지 않은 오크 정찰대를 만났을 뿐이라 큰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야안에 의해 다듬어진 정령술을 시험하기에 좋은 연습 상대였기에 반갑기까지 했다.

당시, 라진은 다듬어진 불의 구슬 형태의 위력에 깜짝 놀랐는데, 이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두 마리를 잡았기 때문이다.

오크가 비록 소형 몬스터라 하지만, 항마력이 있기에 정령술의 힘도 물리적인 공격에 비해 약한 편인데, 단 한 번 단창에 거대한 힘이 실려 날려지듯이 당해버리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직 미완성인데 이런 위력을 보였으니, 완성되고 나면 능히 대형 몬스터에도 통할 것 같았다.

천막이 좁았기에 야안은 심상으로 이미지를 만들어 수련하였고, 라진은 하루라도 빨리 불의 구슬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야쿤들은 천막에 머리 하나만 넣은 상태로 그 추위 속에서도 잘도 잠을 이루었는데 상당히 편안해 보였다.

라진은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졌지만, 그래도 영 만족하지 못한 수준이라 미간을 찌푸리다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야쿤들이 얄미워 풍성한 털을 잡아당겼고, 야쿤들은 그 큰 눈을 끔뻑끔뻑하다 다시 잠이 들었다.

야안은 식사 시간이 되어 심상에서 벗어나다 라진의 그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것참. 가만있는 야쿤들은 왜 괴롭히는 건가? 어지간히도 심심한가 보군.”

야안의 말에, 라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녹인 물을 야안에게 건넸다.

“얄밉잖아. 주인은 이처럼 고생하는데 말이야.”

“하하하, 그 사람. 갈수록 농이 느는군.”

그렇게 식사를 하며 그들은 색색거리는 야쿤들의 숨소리를 배경 삼아 담소를 나누었다.

그렇게 그들은 이틀을 더 이동한 끝에야 변경백인 도리안 백작 영지에 도착했다.

이른 시간에 도착하였기에, 아직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그들은 이 겨울에도 상행하고 있는 이들과 가까운 곳에 모닥불을 지펴 성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야안은 주위의 상인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그 규모나 호위들의 실력도 대단한 것이 거의 대상단 수준으로 보였다.

아무래도, 도리안 백작 영지에서만 거래되는 저주받은 숲의 부족의 특산품인 푸른 눈동자 보석을 비롯해 희귀한 약초 등을 거래하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특히 이들이 구매하려는 푸른 눈동자 보석은 솜씨 좋은 보석 장인을 만나면 다른 보석과는 차원이 다른 아름다움을 보이기에 이를 통해 큰 인맥을 엮거나 대단한 수입을 벌어들일 수 있었다.

자연 이를 얻기 위한 상인들의 경쟁은 치열했고, 덕분에 도리안 백작 영지는 외지 쪽, 저주받은 숲을 상대해야 하는 곳임에도 북적거리는 상인들 덕분에 큰 시장이 운영되어 상당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곧 나팔 소리가 울리며,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이미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고, 문이 열리자 검문소에서 검사를 받으며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야안과 라진은 아무래도 상단의 규모가 크다 보니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그들이 성문을 지난 뒤에 움직이기로 했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상단 행렬이 끝이 보일 듯하자, 그제야 모닥불을 끄고 재를 땅 안에 파묻은 뒤 눈을 먹고 있는 야쿤들을 타고 움직였다.

도리안 백작가에 들어선 그들은 상단이 왔다는 소식에 입구부터 시끌시끌한 시장의 모습을 구경하며, 가까운 곳에 자리한 규모가 있는 한 여관에 방을 잡았다.

아직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기에, 음식을 주문하고 방에 짐을 풀고 내려온 그들은 오랜만에 따뜻한 음식들을 먹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군. 야안 네가 준비한 그 전투식량이란 것도 맛이 나쁘지 않지만, 그래도 역시 음식은 이래야 해.”

“하하, 당연하지. 그건 어디까지나 전투를 위한 힘을 얻기 위해 먹는 식량이라고. 이런 음식과 비교하면 안 되지.”

“음~ 편리성이나 휴대성에는 확실히 뛰어나지만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어.”

실없는 농을 흘리며 빵을 수프에 찍어 먹는 라진에 야안은 고개를 저어댔다.

잠시 담소를 나누다, 저주받은 숲을 어떻게 지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고, 라진은 음식을 치우게 하고 맥주와 간단한 안주를 시킨 뒤 빈 테이블에 지도를 꺼내 보였다.

“역시 백작성에 오니 좀 알겠더군. 지금 우리가 여기에 있으니, 우리는 서쪽으로 보름 거리를 움직이고 다시 서남쪽으로 7일을 지난 뒤 그곳에서 하얀 까마귀 부족과 접선해야 해. 어머니 서신의 내용이 맞는다면 아마 이 부근에서 못해도 하루 거리 안에 부족의 영역에 들어설 수 있을 것이야.”

하얀 까마귀 부족은 대부족 중 하나로, 체만 왕국과 물물 거래를 맡은 이들이었다. 붉은 눈 부족 바로 밑의 부족으로 왕국으로 친다면 대귀족의 반열에 달하는 큰 세력을 가진 자들이다.

라진은 그곳에서 자신의 정령의 힘을 보여주어 그곳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뒤, 어머니가 남긴 책 속에서 붉은 눈 부족 출신을 뜻하는 그림을 보이면 된다.

이후, 하얀 까마귀 부족의 족장에게 자신의 직위를 인정받은 뒤 그들의 도움을 받아 한 달 거리에 있는 붉은 눈 부족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야안은 이미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기에, 라진의 이야기를 들으며 날짜와 거리를 재었고, 곧 술과 안주가 나오자 서로 잔을 부딪치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한데, 그 로오통이라는 식물이라 했던가? 그것을 구해야 하지 않아? 저렇게 상인들이 많은 것을 보면 그 로오통이라는 물건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야.”

야안의 말에 라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마, 로오통은 구하기 어려울 거야. 그게 체만 왕국의 손에 들어갔다가는 이들은 다시 숲에 들어서려 할걸. 그렇게 되면 부족이나 이들 체만 왕국도 부질없는 희생만이 일어날 테니 그런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도 저주받은 숲의 부족들은 아무리 막대한 이익이 있다 해도 그것을 거래하지 않을 거야.”

로오통은 저주받은 숲에서만 서식하는 식물로 인간에게는 해가 없으나, 이곳 몬스터들은 끔찍이 싫어하는 냄새를 풍긴다.

그렇기에 웬만큼 굶주린 몬스터가 아니라면 로오통을 지닌 인간들을 습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도 예외는 있었다.

바로 인간의 숫자가 일정 이상이 넘어가면 로오통의 향이 급격히 줄어든다는 것이다. 인간이 맡을 수 없는 인간 특유의 향기가 로오통의 향과 중화되면서 생기는 현상인데, 로오통의 양과 상관없이 그때부터 점차 향이 사라지다 결국 몬스터들에게 그대로 노출되는 것이다.

밖의 인간들이 그처럼 군대를 이끌고 들어오면 몬스터들이 크게 난동을 부리면서 저주받은 숲의 부족들도 마을로 쳐들어온 몬스터들을 상대하느라 큰 손해를 입게 되기에 부족들은 이 로오통이 숲 밖의 인간들에게 노출되는 것을 꺼리고 있었다.

실제로, 체만 왕국과 거래하는 하얀 까마귀 부족은 거래 당시 철저한 검사를 통해 이 로오통이 밖으로 유출되는 것을 막았고, 워낙 폐쇄적인 형태로 거래하기에 상인들도 그들이 그처럼 경계하는 이유가 그저 저주받은 숲 부족들의 특성이라 이해하고 있었다.

야안은 라진의 설명에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별수 없이 며칠 동안은 그곳 몬스터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말이군.”

안주로 나온 땅콩을 까먹던 라진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흠, 조심해야 할 거야. 네 실력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곳 몬스터들이 워낙 변이가 많다고 들었거든. 오우거도 한 끼 식량으로 삼는 초대형 몬스터도 있다고 하니 말 다 했지, 뭐.”

라진은 예전 가문에서 본 여섯 개의 팔을 가지고 5미터에 달하는 꼬리를 가진 몬스터의 그림이 그려진 것이 기억나 돋아나는 소름을 긁적였다.

하지만 야안은 이미 호도칸급의 황금 갈기 오크를 비롯해 고대 거인족을 만나고, 또한 기괴한 어둠의 종족 뱀파이어들까지 만난 터라 별 감흥이 없었다.

더구나 저주받은 숲 부족들에게서 녹색 괴물이라 불리는 그 몬스터의 약점도 들었기에 조심만 한다면 자신이나 라진이나 별 피해 없이 이길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가 본 가장 강한 자, 거인들의 왕 붉은 노을 앞에서는 그 괴물조차 피라미에 불과한지라 라진이 침을 튀기며 설명해도 야안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 반응이 기분이 나빴던 라진은 야안에게 먹던 땅콩을 내던졌다.

“나 원, 상상력이 부족한 건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건지.”

투덜거리는 라진에 야안이 웃음을 흘리며 볼을 긁적였다.

도리안 백작 영지에는 숲의 자식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다.

체만 왕국의 사람과 저주받은 숲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온 자식들을 일컫는데, 혼혈이라는 이유로 일을 구하기 힘든 그들은 자연히 뒷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다.

이들은 지닌 재능이 뛰어나 상당한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고, 돈이 될 만한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일을 했기에 영지에서도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버려 두었다.

아무래도 영지 특성상 숨겨서 해결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에 암묵적으로 그들의 세력을 승인한 것이다.

야안과 라진은 시장에서 필요 물품들을 사다 상인들에게서 그들에 대해 알게 되었고, 안내자를 고용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혼혈이라면 저주받은 숲의 길의 초입까지는 어느 정도 알 것으로 파악한 탓이다.

그들은 상인에게 들었던 것처럼 잡화품을 파는 작은 가게에 들어섰고, 긴 콧수염이 인상적인 주인에게 소개비로 1골드를 건네어 접선 암호를 주었다.

곧 상인은 품속에서 작은 피리를 꺼내어 불었는데, 세차게 몇 번 부는 것 같은데도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는 몇 번 그렇게 피리를 불더니 멀뚱히 서 있는 야안과 라진에게 손을 저으며 가게 밖으로 나가보라 했다.

곧 그들이 나서니 품종을 알기 어려운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개와 함께 열 살 정도의 어린아이가 보였다.

한겨울이라 해도 얼굴을 넝마 같은 가죽으로 감싼 기이한 아이인데, 곧 그 아이가 고개를 들자 왜 그 아이가 그렇게 얼굴을 가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 아이 또한 혼혈인 것이다. 아이는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자신들을 바라보았고, 라진이 그 아이에게 1실버를 내어주자 아이는 그제야 반기며 자신을 소개했다.

“접속자 87번입니다. 무슨 일이신지요. 일에 따라 안내할 곳이 달라집니다.”

아이의 말에 야안이 대답했다.

“저주받은 숲으로 안내할 자를 찾고 있다.”

야안의 말에 아이는 잠시 고민하다 물었다.

“저주받은 숲의 안내자라면 어디까지를 생각하십니까? 제가 아는 바라면 나흘 거리까지가 한계입니다.”

아이의 말에 라진은 크게 반색했다. 나흘 거리라면 그 안에 로오통을 구할 수 있을 확률이 못해도 40%는 될 것으로 판단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안내해 주겠느냐.”

라진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강아지와 함께 앞장서 나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길을 들킬 위험을 생각해 여덟 곳의 골목길을 넘나들었는데, 확실히 범인이라면 그 길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었다.

다만 중급 익스퍼트 현자의 능력을 지닌 야안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었는데, 오히려 그는 이런저런 골목길을 다니면서 이곳 도시의 세세한 지리까지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령의 재능에서는 천재일지 모르나 다른 면에서는 범인에 불과한 라진은 벌써 세 시간을 뱅뱅 도는지라 지금 어디가 어디인지 몰라 진이 빠지는 눈치였다.

그는 투덜거리며 야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골목으로 빠지는 아이를 따라나서다 이내 걸음을 멈추었다.

검은색으로 물든 가죽에 천을 둘러싼 혼혈 특유의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예를 차리며 야안과 라진에게 말했다.

“접속자 87번을 책임지고 있는 관리자입니다. 안내자를 찾으신다고 들었습니다.”

야안은 아이가 골목을 돌아다니던 중 여기저기에 표시를 하는 것을 보았기에 놀라지 않고 대답했다.

“나흘 거리도 가능한 이가 있다고 아이에게 들었소. 지금 가능하오?”

야안의 말에 관리자는 골치가 아픈 듯 눈살을 찌푸리다 이내 끄덕였다.

“가능합니다. 다만, 사정이 있어 고용하시려면 선금으로 70%를 내셔야 합니다.”

70%라는 말에 잠시 멈칫하던 야안은 라진을 바라보았고, 라진은 흔쾌히 거래를 받아들였다.

“좋군, 그리하지. 하지만, 실력을 본 뒤에 선금을 내겠네.”

라진의 말에 관리자는 짐작하지 못한 것도 아니기에 받아들였다. 초입이라 해도 어느 정도 실력자가 되어야 한다.

길을 안다 해도 발을 묶는 자라면 차라리 지도를 살펴보며 가는 것이 나을 것이다.

이야기를 마친 라진은 관리자에게 10골드를 건네었고, 그는 품속에서 청동으로 만든 작은 패를 꺼내 그에게 건네었다.

“내일 오전 중에 갈 것입니다. 거래를 받아들이시려면 그 패를 그자에게 건네주시면 됩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하며, 멀리에 대기하고 있던 아이를 손짓으로 불러들였고, 곧 아이는 개와 함께 쪼르륵 달려와 야안과 라진을 안내해 주었다.

나가는 길은 올 때와는 다른 길로 빙빙 돌아갔는데, 이번에는 지름길인 듯 20분도 되지 않아 그 잡화 상점 앞에 데려와 주었다.

열 살밖에 되지 않은 나이로 이 추운 겨울에 일을 하는 아이가 안쓰러웠던지 라진은 1실버를 더 건네주었다.

“힘내라.”

그러며 자신의 앞머리를 걷어 자신의 붉은 눈을 보여주자, 그 호의에 얼떨떨하다 라진이 자신과 같은 혼혈임을 알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비록 부족이 달라 혼혈의 특색은 달랐지만, 붉은 눈은 저주받은 숲의 부족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라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다만 아직 어려 그 붉은 눈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 아이는 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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