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28화
42. 2전장으로 II
고대 시절 해상 왕국으로 이름 높았던 그들은 죽음의 지배자에 의해 오염된 바다 생물체들과 싸우다 전멸했는데, 그들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쉽사리 힘을 모으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바다의 몬스터들과 싸워준 덕분에 배를 몰아 움직일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해적인 커크 선장은 수하들에게서 상당 규모의 배가 온다는 말에 크게 반겼다.
“크하하! 그래, 몇 톤쯤 되어 보이더냐.”
보통 사람들보다 덩치가 세 배는 될 듯한 그답게 목소리도 동굴 속에 들어선 것같이 크게 울렸다.
커크의 말에 보고하던 이들 중 얼굴 한쪽에 크게 화상을 입은 수하가 말했다.
“700톤은 넘어 보였습니다.”
“호오~ 그럼 대상단이라는 말인데, 음.”
대상단은 담이 큰 커크 선장도 건드리기 꺼려지는 면이 있기에 그는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그 정도 규모의 대상단이라면 보통의 준비가 아니고서는 항행을 나가지 않음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용병들의 규모가 줄어들었음을 생각한다면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한 도박이다.
‘뭐~ 정 안 된다 해도 상당 부분의 재물을 받을 수 있겠지.’
물속 전투에서 워낙 강한 존재들이기에 부딪히면 이기든 지든 손해를 보아야 하는지라, 해적 쪽의 세력이 밀리는 경향이 보이면 일반적으로 어느 정도의 금액을 주는 것으로 해결을 보는 것이 관례였다.
이번 전투에 수하들이 얼마나 피해를 볼지 모르지만, 여차하면 물에 뛰어들어 도망치면 될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커크 선장은 우람한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자, 일하러 가보도록 하지.”
뎅뎅뎅.
그의 말을 들었던지 여기저기서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가 타고 있던 500톤짜리 거선에 돛이 펴지기 시작했다.
검은색에 회색의 해골 모양이 그려진 돛은 으스스한 느낌을 주며 바람에 펄럭였다.
낄낄거리며 여기저기서 대낮부터 술과 도박을 하던 해적들은 종소리에 이내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나 자신의 위치로 움직였는데, 그 움직임이 상당히 능숙했다.
곧 그가 탄 500톤의 거선 옆에 자리한 300톤짜리 배에서도 돛이 펴지며 분주한 움직임을 보였다.
이들 해적은 그 숫자만 해도 300에 달하는 대규모의 해적선이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하급 유저 이상의 실력자들이었다.
특히 흔들리는 배 위에서의 전투에 매우 익숙한지라 그 이상의 실력을 보이는데, 중급 유저라 해도 하급 유저에 달한 해적을 상대하는 데 큰 어려움을 느껴야 했다.
말하자면 일반적인 대용병단의 저력의 반 이상에 달하는 세력이다. 특히 커크 선장은 해적 중에서도 드물게 익스퍼트에 든 자라 바다 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웬만한 대용병단도 꺼리는 저력이었다.
이 같은 저력을 지닌 해적들이 상선을 습격하니, 이름 있는 용병단들조차 꺼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상선을 묶을 갈고리가 달린 줄 달린 석궁과 더불어 상선의 도주를 애초에 막기 위해 굵은 줄이 달린 여러 개의 노를 재기 시작했다.
노에 달린 줄은 워낙 굵은 것으로 상급 유저라 해도 쉽사리 베어낼 수 없어 보였다. 일단 찍히면 도망은 포기해야 할 일이다.
두꺼운 팔뚝으로 노를 재는 일을 끝낸 뚱뚱한 해적이 자신만큼이나 덩치가 좋은 해적에게 물었다.
“이봐! 이번에는 몇 톤짜리야?”
“정찰 애들에게 듣기로 700톤이 넘는다더군.”
“상선이 700톤? 음, 좀 위험하겠는데.”
“킥킥, 듣기로 요즘 이름 있는 용병 새끼들이 다 전장에 끌려갔다는데, 까짓것 못 할 것도 없지. 배에 계집이라도 있으면 좋겠군.”
“상선에 잘도 계집이 있겠다. 미친 상인들 같으니라고. 이상한 풍속 때문에 계집을 태우지도 않으니.”
여자와 같이 상행을 하면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는 속설 때문인지 아무리 대규모의 상인들도 여자들을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 그들은 음식이든 시중이든 모두 사내만 고용했다.
아무래도 긴 여정 중에 사내가 득실거리는 상행에 여자가 몇 있으면 이런저런 사고가 나지 않을 수 없기에 그런 속설이 도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직위가 낮은 해적들은 자신들한테 별 이득도 없고 고된 싸움을 해야 하는 상선을 반갑게 여기지 않았다.
“젠장, 먹을 거라도 있으면 좋겠군. 어이, 신입. 보이면 말해.”
그 말에 이제 막 성인이 된 듯한 어린 해적이 어쩐지 불편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알겠습니다.”
“새끼, 벌써 몇 달째인데 저렇게 어리바리하냐.”
불편한 마음으로 답한 어린 해적은 이내 선배 해적의 말에 몸을 움츠렸다.
이 어린 해적은 이곳 해적들과 달리 그 겉모습만큼은 여타의 대륙 사람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 이유는 그가 대륙의 여자와 해적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기 때문이다.
제코는 20년 전 해변 도시를 습격해 잡아 온 여인의 자식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이들에게 있어 혼혈은 아주 보기 드문 존재이다.
일반적으로 대륙의 여자들과 해적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생긴다 해도 보통 기형아인 경우가 많은데, 제코는 드물게 태어난 혼혈임에도 그런 기형적인 모습은 없었다.
오히려 체력 면에서는 이들 해적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근골이 좋았고, 머리도 뛰어난 편이었다.
더구나 귀 옆에 달린 아가미도 여타의 해적들보다 더 발달하여 물속에서 장시간을 격렬하게 전투를 벌일 능력을 지녔다.
아직 열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벌써 중급 유저에 들어섰는데, 흔하게 구할 수 있는 엉터리 마나 심법으로 그 같은 경지에 오른 것을 생각하면 그의 재능이 비상함을 알 수 있다.
그처럼 천부적으로 뛰어난 해적의 재능을 지녔지만, 그의 심성은 해적과는 맞지 않았다.
이는 그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저주받은 자식이라는 혼혈이라는 점과 누가 자신의 아버지인지 몰라 어린 시절 어머니와 대부분 시간을 보낸 그였기에 여타의 해적과는 다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본래 귀족가의 시녀로 일했던 만큼 여타의 평민들보다 지닌 지식이 많았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원수 같은 해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 해적에게 몸을 팔아 번 돈으로 아들을 교육시켰다. 결국 성병에 걸려 비참하게 죽을 때까지도 아들에게 누누이 경고했다.
“절대 해적 일만은 하지 마라. 그들은 오크만큼이나 더럽고 비열한 족속들이다.”
거친 숨을 내며 결국 그 말을 유언으로 남긴 어머니의 뜻을 따라 제코는 해적이 되지 않고자 했지만, 해적들만이 사는 곳에 태어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되지 않았다.
배가 있어야 해적의 본거지에서 나갈 수 있는데, 일거리가 없어 배를 얻어 탈 만큼의 돈을 벌지 못했다.
결국, 그는 오랜 시간 고민 끝에 커크 선장의 배에 올라탔고 이들과 함께하다 기회가 되면 도망치기로 했다.
하지만, 과연 자신이 그런 기회를 얻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지 그는 확신하지 못했다. 해적 일은 그가 생각한 이상으로 더럽고 비열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간 그는 두 번이나 해적질에 동참하게 되었는데, 몬스터만큼이나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그들의 행위에서 역겨움을 감추기 어려웠다.
덕분에 뛰어난 실력이 있음에도 해적들 사이에서 겉돌기 시작했고, 결국 그 지닌 무위와 달리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다.
그는 이번에는 대상단이라는 말에 이번에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갈지 걱정이 들었다.
“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이 원통하구나.”
그랬다. 겨우 중급 유저에 들어선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동참하지 않는 것이나, 죽이지 않고 제압하는 것밖에 없었다.
곧 상선이 보이기 시작했고, 그는 잠시 망설이다 이내 음란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해적들에게 그것을 알렸다.
목표를 찾았다는 종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날 야안은 다른 때와 다름없이 중급 현자 마스터의 경지를 수습하고 뇌전의 기운이 자신의 몸에 익숙해지도록 수련 중이었다.
뇌전의 정화 덕분에 중급 현자 마스터의 경지를 60%가량 수습하게 되었는데, 덕분에 최근 들어 수련 시 효과를 늘리기 위해 펼치는 ‘파토’의 시전 시간을 상당히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의 뇌전의 기운도 이제 70% 가까이 완성의 단계를 보이고 있어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무리 없이 이 기운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확실히 지금 그가 지닌 뇌전의 기운은 강력했다.
지금의 기운을 온전히 다룰 수 있게 된다면 상급 익스퍼트의 끝자락에 달한 알레한드로와도 무리 없이 겨룰 수 있을 듯했다.
이는 뇌전의 기운으로 그가 한 번에 내뿜을 수 있는 기운이 늘어난 덕분이다.
예전의 기운이 1이었다면 지금은 2~4 정도의 기운을 낼 수 있게 되었으니, 구의 발현을 자유롭게 다루게 된 알레한드로의 일격에도 맞상대할 만한 것이다.
물론 이는 단순히 검만을 들었을 때의 경우였다.
야안이 뇌전의 정령이나 마법 등을 사용한다면 능히 도칸급의 몬스터와 싸워도 밀리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뇌전의 정화의 봉인이 일부 풀린다면 홀로도 도칸급의 몬스터와 싸워 이길 확률이 80%에 달할지 모른다.
뇌전신공을 통해 다시 하나의 혈을 확장한 그는 초감각을 통해 무언가 자신이 타고 있는 상선으로 오고 있음을 알고 방 안의 기운을 가라앉혔다.
선상으로 나올 때쯤, 그의 예상대로 해적이 나타났음을 알리는 종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무시무시한 해골 모양이 그려진 돛이 일렁이는 거대한 배 두 척이 나타났지만, 배 위의 그 누구도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는 지난번 야안 일행의 압도적인 무위를 보았기 때문이다.
“저들이 해적인가?”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다 왔는지 밀가루가 옷 여기저기 묻은 베르뎅의 물음에 야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모양입니다.”
“확실히 숲 밖의 인간과는 다른 파장을 지닌 것 같군.”
그들 중 몇을 정령으로 살핀 그는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리더니 몇 걸음 앞으로 나섰다.
“이번에는 제가 나서지요.”
베르뎅은 그렇게 말하며 나서자 선박 위 선원들의 호기심 어린 눈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확실히 나무로 만든 배에는 불이 가장 위압적인 것이 사실이었다.
“뭐, 워낙 잔인무도한 자들이라 하니 봐줄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중얼거리던 그는 자신의 친우 셀리엄을 형상케 하고는 어느새 날아온 노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러자 셀리엄의 몸에서 불의 벽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큰불이 뿜어 나왔고 그 탓에 노는 그 모양 그대로 타버리더니 어느새 밧줄이 걸린 해적선까지 그 불길이 닿았다.
갑작스러운 불에 해적선 한쪽이 타오르자 그 안에 있던 선원들은 경악했다. 상상치 못한 일인 탓이다.
해상에서의 전투에서는 불을 사용하는 것을 꺼리는 데, 이는 그만큼 배라는 것이 불에 약하기 때문이었고, 또한 자신들이 사용하는 불에 당할 수 있는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처럼 압도적인 화력을 가졌다면 그 같은 일을 꺼릴 필요도 없었다.
곧 해적의 배에서도 불화살이 날아오기 시작했으나, 베르뎅이 셀리엄의 몸속에 손을 넣어 손을 휘젓자 거대한 불의 벽이 불화살들을 막아섰다.
허공에 거대한 불의 벽이 일어나며 막아서자 수많은 해적이 경악해 쏘아 올리던 활을 떨구며 그 괴이한 일을 바라보았다.
일시적으로 공격이 뜸해지자 그때를 놓치지 않은 베르뎅은 자신이 만들어낸 불의 벽을 큰 해적선에 내던졌다.
“으아아악!”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해적들이 다투며 바다에 뛰어들기 시작했는데, 워낙 떨어지는 불길이 빠른 터라 겨우 20% 정도만이 그 불길을 피했을 뿐이다.
콰가가강!
불길에 담긴 파괴력이 워낙 대단한지라 마치 거인의 손에 뜯기듯 배의 일부가 그대로 형체를 잃어 날아갔다.
또한 다시 베르뎅이 불길을 던지기 시작했고, 10여 번의 불길만으로 500톤에 달하던 거선은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곧 300톤의 배 쪽에서 항복 깃발이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그 배조차 침몰시킬까 했던 베르뎅은 그들이 그 와중에도 동료를 챙기려는 모습에 혀를 차며 손을 접었다.
하지만 우두머리는 없애야 한다 생각한지라, 그는 두목으로 추정되는, 이제 막 배에 오른 이를 향해 감응을 올린 셀피드를 보냈다.
그러자 셀피드는 날아가는 그 모습 그대로 몸이 두 배로 불어나더니 커크 선장만큼의 형체를 갖추었다.
“이 괴물 같은 놈, 죽어라.”
검기를 펼치는 커크 선장의 검에 부딪혀 불꽃의 파편들을 날리던 셀피드였지만 어느새 뜨거운 불길이 검을 든 선장의 손 가죽을 녹이더니 이내, 두 팔을 뭉개버렸다.
비명을 지르는 커크 선장을 향해 셀피드가 입으로 후하고 거대한 바람을 불자 거대한 불 바람이 일어났고, 결국 그는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몸의 반 이상이 새까만 몰골로 타버려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으아아악”
“몬, 몬스터인가? 저런 거 들어본 적도 없어.”
악명 높은 해적들 사이에서도 강자 측에 든 두목이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하고 죽어버리자 배에 있던 해적들의 동요가 극심했다.
거대한 체구를 자랑하던 커크 선장의 상체는 끔찍한 모습으로 검게 바스러져 이제 자신들의 가슴 정도 높이밖에 되지 않은 하체가 부들거리고 있었다.
이내 힘을 잃은 하체는 앞으로 넘어져 바다에 빠져버렸고, 셀피드는 잠시 해적들을 바라보다 이내 그 형체가 희미해져 갔다.
자신들을 놓아준다는 것을 안 돌격대장은 재빨리 소리쳤다.
“빨리 배 돌려. 뭐해, 이 새끼들아.”
곧 여기저기서 동료들을 구하던 그들은 이내 구원의 손길을 놓고 서둘러 배를 움직였다. 어지간히도 혼이 났던지 올 때보다 두 배나 더 빠른 속도로 해적선은 물러가기 시작했다.
“음~ 사제는 예나 지금이나 시원시원하게 싸우는군.”
라콘은 베르뎅의 전투를 안주로 삼아 술을 홀짝거리며 중얼거렸다.
500톤에 달하는 거선이라 그런지 아직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채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워낙 불길이 강성한지라 200미터 거리에 있는 이곳까지 후끈해질 정도였다.
평소 사람 좋은 모습으로 자신들을 대하던 베르뎅이 그처럼 손속이 독한 줄 몰랐던 상선 사람들은 저마다 소름이 돋는 듯했다.
그 힘도 매섭지만, 조금의 아량도 없이 적을 박살 내는 손속은 아군인 자신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줄 만했다.
“으으, 이런 날이 올 줄 몰랐군.”
선장 라토르스는 설마 자신이 원수라 여기던 해적들을 불쌍히 여기는 날이 올 줄 몰랐다. 그래도, 워낙 물에 강한 종족들이라 그런지, 그 강력한 공격에서도 70여 명의 사상자만 나왔을 분이다.
파삭, 쿠궁!
배가 두 쪽으로 갈라 쪼개지며 여기까지 불똥이 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