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129화 (129/385)

야안 129화

야안은 잠시 배를 바라보다,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 바다로 뛰어들었다. 가벼운 새처럼 바다에 떠다니는 판자들을 밟아 움직이더니, 어느새 물에 잠겨가는 배로 들어섰다.

“역시나.”

그의 생각대로, 배 안에는 살아 있는 자가 있었다.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연기를 마셨던지 상태는 위험해 보였다. 야안은 그에게 ‘리젠’을 펼치고 힐과 마케를 연달아 펼쳐 위험에서 벗어나게 한 뒤 이내 그를 안고 다시 판자들을 밟으며 배로 돌아왔다.

타닥. 쿵.

혼자가 아닌, 사람 하나를 업은 채 움직인 것임에도 용케도 그 높이가 10미터에 달하는 배를 몇 번 디디지 않고 배 위에 올라선 야안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신기라 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 애초 200미터에 달하는 바다를 헤엄치는 것이 아니라 판자를 밟아 뛰어간다는 것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워낙 말이 없고, 언제나 무언가에 바쁜 야안이라 그의 정체를 잘 모르던 배의 선원들과 경비대 선장은 몹시 놀랐다.

“저분 또한 예사로운 분이 아니셨구나.”

선주에게 마일드 왕국의 준귀족이라는 말을 들었던 선장은 정체를 숨기는 이일지 모른다 생각했다.

저 같은 무위를 지닌 이가 준귀족이라니 우습지도 않은 이야기다. 어쩌면 마일드 왕국 출신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최소한 저들과 척을 지는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

아직도 힘을 보이지 않은 이들이 반이 넘었다.

못해도 앞서 사람들 못지않은 실력을 지닌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저런 떠오르는 잡생각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선주인 밀리가 했던 것처럼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유야 어쨌든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목적지를 가진 자들이고, 보호를 받는 입장인 것이다. 더구나 그동안의 행동들을 본다면 결코 악인들은 아니었다.

이들 덕분에 저주받은 숲의 부족에 대한 안 좋은 편견들이 상당히 희석되기도 했다.

“아, 대륙 사람으로 보였는데, 이자도 해적이었군요.”

어느새 다가온 밀리의 말에 야안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생김새가 대륙 사람과 유사한 그는 무척이나 성실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정신을 잃었음에도 해적 같지 않은 분위기가 그에게서 나왔다.

귀 뒤에 자리한 아가미가 아니었다면 포로로 잡힌 이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

신성 마법으로 부상을 고쳐준 덕분인지 정신을 잃은 그의 안색은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편해 보였다.

이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 고민하는 가운데 야안이 그에게 진실의 눈을 펼쳤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사정을 알게 된 야안이 말했다.

“이자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의 말에 다른 이들은 반대하지 않았다. 구해 온 것도 야안이었고, 그 과정에서 보여준 힘은 능히 그를 감당할 수 있었다.

다만, 베르뎅이 다가와 야안에게 말했다.

“음, 교화하려 그러시는가?”

“네, 살펴보니 악인 같지 않군요. 교화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야안이 신관임을 모르지 않았기에 베르뎅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신가? 거두시려 하거든 나에게 데려오시게. 이자, 정령술에 재능이 있군.”

베르뎅의 말에 야안이 놀라며 물었다.

“정령술의 재능 말씀이십니까?”

“그러하네. 물 계열인 듯하군. 그 재능이 제법이네. 아무래도 그 멀머던의 후손이라는 영향을 받아서인가? 보기 드물게 뛰어난 편일세.”

야안은 아직 하급 정령 비기너도 수습하지 못하는 단계라, 그 같은 것을 알아보는 눈은 없었기에 놀라다 이내 끄덕였다.

“일단, 그의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지요. 신경 써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아니네. 정령사로서 재능이 있는 후배를 끌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다행히 정령석을 가져온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기쁘네.”

조금 전 야차 같은 손속을 쓴 자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넉넉한 마음이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야안은 그 말을 남기고 자신의 방으로 그를 데리러 들어갔다.

이후, 전장의 뒷정리를 하던 선원들은 정말 요즘같이 바다를 항해한다면 정말 이 일도 할 만한 거라 농을 흘리곤 했다.

제코는 어린 시절의 일들을 상기했다.

어린 시절 창녀였던 어머니를 부끄럽게 여기던 일. 어머니와 자신을 버린 이름조차 모르는 아버지를 원망한 일.

힘이 없어 성병에 걸려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에게 변변한 약도 못 해 드린 일. 그리고 어머니의 유언을 저버리고 해적이 된 일.

비참하게 죽어가는 약탈당한 선원들을 어쩔 수 없다며 모른 척 고개를 돌린 일. 등 수많은 죄책감이 그를 괴롭게 했다.

그의 눈은 핏대가 터져 붉게 변했고, 쥐어진 손바닥에서는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의 그 같은 고통은 이카스티스를 통해 생겨난 것이었다.

야안은 이카스티스에 괴로워하는 그를 살펴보았다. 다행히도 자신이 진실의 눈을 통해 본 것 이상으로 이자의 사람으로서의 됨됨이가 뛰어남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그의 어머니의 영향 덕분이었다. 아무리 타고난 성정이 뛰어나도 환경이 따르지 못하면 사람의 성정은 악에 물들기 쉽다.

그런데 이자는 모든 희망을 아들에게 걸어둔 어머니 덕분에 보기 드물게 바른 자로 커왔다.

고통이 클수록 그 죄악이 큰 것을 생각한다면, 그의 반응은 지난 파머가 보인 것에 비해 확실히 나은 편이었다.

야안은 제코가 마음에 들었다.

성정도 좋거니와 정령에 대한 재능을 따로 놓더라도 그의 무재는 대단한 편이었다. 어린 시절 힘겹게 검을 수련했기 때문인지 근기가 있고, 시녀였던 어머니에게서 배운 덕분에 글이나 셈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정도의 머리를 지녔다.

잘 가르치기만 한다면, 이번에 새로 개발된 바젠 강을 맡길 만한 이로 클 수 있을 듯했다. 아무래도 앞으로 영지를 확대하다 보면 바젠 강 주변의 영지 크기도 더 넓어질 것이니 배를 놓아 몬스터들을 상대할 수군을 구성해야 할지 모른다.

제코는 그로부터 한나절이 지난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그는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이카스티스를 겪었을 당시에는 그의 정신이 망가질 것 같은 고문이었지만, 그 일이 지난 뒤에는 이처럼 평안할 수 없었다.

‘분명 거대한 불이 배를 강타하며 그 충격의 여파에 몸이 뒤로 날아간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제코는 그 뒤로 충격을 받아 자신이 기절했음을 알 수 있었으나 막상 정신이 들어보니 본래 자신이 타던 해적선이 아닌 낯선 환경이라 당황했다.

미세한 울림이 있는 것이 배 안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보기 힘든 귀물로 꾸며진 방 안의 모습에 그는 자신과 너무 맞지 않는다고 생각이 들어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이곳은 도대체 어디지?”

혹시 자신이 꿈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데, 갑자기 문이 열렸다. 제코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리며 옆에 놓인 장식 하나를 무기처럼 들어 올렸다.

“이런, 벌써 깨어났나 보군.”

제코는 그렇게 자신에게 말하는 이가 어딘가 상대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감도는지라 저도 모르게 다시 발을 한 걸음 물렸다.

야안은 그런 그의 모습에 손을 저으며, 가져온 식사를 그에게 건넸다.

“배가 고플 것 같아 가져왔네. 일단 먹게나.”

야안이 건넨 것은 하얀 밀빵 안에 절인 생선과 향초를 넣은 것과 옥수수 가루를 묽게 풀어 끓인 수프였다.

제코는 검은 빵도 제대로 먹지 못하다, 생전 처음 하얀 밀빵과 뜨끈한 옥수수 수프를 보자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해선에 오른 뒤 매번 거친 음식들로 끼니를 때워야 했는데, 이 같은 음식을 보니 저도 모르게 경계심이 누그러졌다.

하지만, 지금 처한 상황을 볼 때 대놓고 음식을 받아먹기도 그런지라 그는 섣불리 야안이 건넨 음식을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야안은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이미지 마법을 제코에게 걸었고, 곧 마법의 효력이 생긴 건지 제코의 경계심이 마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야안이 왜 그가 이곳에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 주었고, 제코는 그 설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크게 몸을 숙이며 사죄하였다.

“죄송합니다. 살려주신 은혜도 모르고 이런 무례를 보이다니.”

제코의 그 반응에 야안은 미소를 보이며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아니네. 일단 이것부터 먹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세. 자네에 대해 알고 싶군.”

그 말에 제코는 배가 고팠지만, 고개를 저으며 야안에게 왜 자신이 해적이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였다.

야안은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었지만, 막상 그에게서 이야기를 듣게 되자 감흥이 달랐다.

그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야안이 물었다.

“그대는 대륙에 나가 무엇을 하고 싶은가?”

야안의 그 말에 제코는 말문이 막혔다.

막연하게 해적 소굴에서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하였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았던 야안이 물었다.

“딱히 갈 데가 없다면, 나를 따라가는 게 어떤가? 그대의 재능이라면 그곳에서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네.”

제코는 야안의 말에 크게 반겼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염치없지만 주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부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야안은 이 순박하기까지 한 제코의 모습에 낮게 웃음을 흘리다 이제 식어버린 음식을 다시 그에게 내놓으며 말했다.

“그럼, 일단 이걸로 배를 좀 채우시게. 밥 달라는 소리가 요란하군.”

야안의 농에 제코는 얼굴을 붉히며 부끄러워진 손으로 그가 건네준 음식에 손을 댔다.

예정한 날짜보다 이틀이 더 빠른 시기에 그들은 스키티 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이유 중 하나가 날씨가 예상했던 것보다 좋았던 덕분인데, 시간을 그렇게 벌게 되자 일정이 늦어짐을 걱정했던 밀리 상단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 그들은 총 세 번 해적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워낙 큰 상선이었던 탓에 그들을 상대하러 온 해적들도 커크 해적단 못지않은 규모였다.

이들 해적단은 지난번에 큰 위용을 보였던 베르뎅이 나서 처리했는데, 그간 정령술을 배우기 시작한 제코로부터 해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터라 처음 커크 해적단에게 보인 그 일말의 자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그들에 대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더 이상 해적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 점도 일정을 단축하게 한 계기 중 하나였다.

그들은 스키티 왕국의 파랸 백작 영지에서 내려섰는데, 이곳은 체만 왕국의 칼벨라그 영지만은 못했지만, 상당 규모의 항구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재 제2 전장과도 거리가 가까운 곳이라 물류의 움직임이 어느 때보다 활발한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제2 전장까지는 20일 정도의 거리라, 전쟁의 여파 때문인지 성의 경비는 어느 때보다 단단해 보였다.

숲의 부족들은 다시 후드로 얼굴을 가리었고, 야안은 그들과 함께 움직이며 그날 하루는 간단히 짐을 정비하며 그간의 고단함을 상단이 잡은 여관에서 풀었다.

자신이 배정받은 방에서 간단히 씻고 나온 야안은 이제 대부분의 뇌전의 기운을 수습하는 단계에 다가옴을 느끼자, 슬슬 로뎅이 알려준 비법을 시도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과신하지 않으려 참고 또 참았다.

최소한 중급 현자 마스터의 경지 수습이 끝난 뒤에야 시도하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현자는 진리를 걷는 이이며 몸 밖의 기운을 다스리는 자이기도 했다.

뇌전의 정화는 결국 체외의 물건이라 그 기운을 다스리려면 지금으로서는 부족함이 많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뇌전의 정령이 의식을 되찾는다면 모를 일이지만.’

잠을 자는 그 존재가 깨어난다면 뇌전의 정령인 만큼 뇌전의 기운을 다스리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언제 깨어날지 모를 존재에 의지할 수는 없었다.

사실 뇌전의 정령이 깨어나지 않은 탓에 그들 사이에 맺은 계약은 완전하지 않은 상태였다. 로지와 그 제자들의 정령처럼 야안은 뇌전의 정령에게 이름을 선사하지 못한 것이다.

실제 정령사라는 존재의 진정한 의미는 하급 정령 마스터에서부터 시작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령이 의사를 표현하게 되며 그 스스로 정령사가 만든 정령의 터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새로운 계약을 함께한다.

처음 계약이 그 정령의 씨앗을 공유하여 받아들이는 계약이라면, 그 후의 계약은 그 씨앗이 성장한 정령과 정령사의 계약이라 할 수 있다.

한데 이 뇌전의 정령은 그 스스로 씨앗이면서도 의사를 표현하는 존재라 굳이 하급 정령 마스터까지 가지 않아도 이 두 번째 계약을 이룰 수 있었다.

이 두 번째 계약이 이루어지면 야안은 뇌전으로부터 온전히는 아니나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그렇게만 된다면 나의 기운을 좀 더 자유롭게 다룰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은 이미 로지를 비롯해 베르뎅과 라콘 또한 공감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뇌전의 정령 호흡법으로 본래의 기량 이상의 정령의 기운을 흡수하는 지금 더 이상 그 시간을 앞당기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기에 야안은 차선책으로 중급 현자 마스터의 경지를 수습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뇌전의 정화 덕분에 그는 어느 때보다 빠른 상태로 이 경지를 수습하고 있었고, 앞으로 열흘에서 보름 정도라면 그가 예상하는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고대 대현자 테무드와 그의 제자들이 하였던 것처럼, 야안은 스스로 파토를 펼쳐 수련해 나갔다.

나흘이 지난 뒤에야 야안 일행이 속한 상단은 파랸 백작 영지를 벗어나, 2전장으로 들어서는 첫 번째 문턱인 지란 자작가에 들어섰다.

오랫동안 거래를 한 케온 상단인 터라 별다른 제지 없이 문턱을 넘은 그들은 이곳에서 하루를 보내고 움직일 생각이었다.

오는 와중에 2전장에 의해 밀려 도망친 몬스터들의 부산물을 팔았던 야안은 그 돈으로 자신의 수하가 된 제코의 체격에 맞는 검을 하나 구입했다.

다행히 거래가 잘되어 백련정강을 한 검을 구할 수 있었는데, 최근 야안에게서 십사수검법을 배우며 그간 홀로 익혀 잘못된 체계를 고치고 있던 제코에게 그 선물은 대단히 기쁜 것이었다.

제코는 밤에는 베르뎅에게서 정령의 수업을, 낮에는 야안에게서 한 시간가량 검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는데 주위에 있는 이들이 절로 감탄할 정도로 수련에 매진하였다.

꾀를 부리는 것이 없고 충직하며, 이해력도 뛰어난 터라 안 그래도 야안의 새 수하라는 말에 흥미롭게 보던 타린과 오스는 가끔 그의 수련을 도와주기도 했다.

베르뎅 또한 그가 가르친 여러 제자보다 뛰어난 이해력과 재능을 가진 제코에 최소한 그와 함께 있는 시간 동안 기초는 잡아줄 수 있을 것 같아 감탄하기도 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상단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지란 자작가를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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