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41화
47. 유피테르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이번 장마는 다른 때보다 길어 질 듯하다. 강을 옆에 둔 영지라면 걱정을 해야 할지 모르지만, 한동안의 무더위에 지쳐 있던 마크 영지는 그 경우가 달랐다.
메마르다시피 한 우물과 물 대기가 어려웠던 농지에 풍족할 정도로 내리는 비는 축복과도 같았다.
하지만 가득 찬 습기에 힘들어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마 속에서도 공사는 진행되어야 하는지라, 공사를 담당하는 관료들은 인부들에게 자잘한 음식과 술을 풀어 주면서 한편으로 안전을 강화하여 미리 불화를 막았다.
그나마 다행히도 야안의 수련장으로 쓰이는 폐쇄된 동굴은 마법 때문인지 습기의 영향은 없었다.
이른 새벽에도 끝없이 내리는 비에 치적거릴 정도로 대지는 젖었지만, 그 밑에 자리한 동굴 속은 그런 밖과 달리 십 년 전과 똑같은 환경을 보유하고 있었다.
야안은 그 중심에 앉아 호흡을 다듬고 있었다. 운기가 아닌 뇌전의 정령 호흡을 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정령의 호흡을 내뱉던 야안의 안색이 밝아졌다.
“깨어나셨습니까?”
야안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 행동은 기이했지만 이내, 그의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그의 말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마음에서 일어나는 소리 같았다.
“미안하오. 예상한 것보다 많은 시간을 소비하였구려.”
“아닙니다. 지난번 그대가 도와주지 않으셨다면 악마를 멸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때의 일로 그대의 기운이 허비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야안의 말에 뇌전의 정령은 기분이 좋은 듯 목소리가 밝아졌다. 자신의 몸에 거하게 되어서인지 몰라도 야안은 뇌전의 정령의 기분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을 듯했다. 그것은 그 뇌전의 정령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리 이해해주니 다행이오. 약간이나 의식 너머로 그대의 사고를 살펴보았소. 준비하시겠소?”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안은 뇌전의 정령이 제 뜻을 알고 계약의 준비를 하자는 말에 그는 감사의 말을 표하였다.
곧, 스승님께서 가르쳐 주신대로 정령의 언어로 계약의 언령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언령을 만들기 시작하자, 뇌전의 정령 또한 언령을 만들기 시작했고, 곧 그 두 언령이 부딪히며 의식이 시작되었다.
그 의식을 통해서 뇌전의 정령과 야안은 지금까지 서로의 감정만이 아닌 그의 생각하는 것 또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의식의 끝에 이르러 야안의 몸의 중심에서 강력한 뇌전이 일어나더니 그를 감쌌다. 야안의 검기로도 무너지지 않았던 동굴이었지만, 그 뇌전에는 크게 동요한 듯 천장에서는 후두둑 거리며 균열이 난 돌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또한 넓은 동굴 속의 대기가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는데, 그 힘의 파동이 극에 달했을 때 야안의 입에서 두 개의 언어가 동시에 일어났다.
그 하나는 정령의 언어였고, 하나는 인간의 언어였다. 그중 정령의 언어는 그저 요란히 대기를 떨게 하며 사라졌고, 오직 인간의 언어만이 더욱 크게 동굴 속을 울리기 시작했다.
“아리스 님께서 정하신 태초의 법칙에 따라 그대와 계약을 맺는다. 거룩한 언령의 힘으로 그대에게 이름을 선사하니 그대를 유피테르라 말하리라.”
야안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야안의 머릿속으로 뇌전의 정령이 받아들였다.
“언령의 힘에 이르러 그대와 함께할 것을 맹세할 것이니 그 이름 유피테르의 이름을 받아들이겠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대기를 일렁이던 힘의 파동이 사라지고, 야안을 휘감던 뇌전 또한 그 자취를 감추었다.
하지만 계약의 여운 때문인지 야안은 쉽사리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잠시 말없이 눈을 감다 이내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것이 정령의 힘인가?”
단순히 계약만을 하였을 뿐인데 그는 놀랍게 진화된 자신의 육체에 말문을 잃어야 했다. 먼저 힘과 민첩이 매우 늘어나게 되었다. 단번에 각 15가 늘어나게 되었으며, 또한 뇌전신공의 습득률이 완성을 보였다.
이는 뇌전에 면역력이 생기고 그 기운을 본래 자신의 기운처럼 여기게 되면서 생기는 변화였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다. 뇌전신공을 운기 하는 시간 또한 줄어들게 되었다.
놀라워하는 야안에게 뇌전의 정령이 말을 걸었다.
“유피테르라. 좋은 이름이네. 위대한 의지를 지닌 자의 이름이라…….”
야안과 계약을 하게 되면서 이름에 대한 지식을 공유하게 된 유피테르는 이번에 얻게 된 이 이름을 마음에 들어 했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유피테르.
그는 고대 대현자 테무드의 동료 중 하나였다. 대륙의 위기였던 고대 시절에는 수많은 영웅이 탄생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유피테르는 바람의 종족이라고도 불리는 샬란 족의 마지막 왕자로 그는 죽음의 지배자의 세력에 동족의 멸망을 본 최후의 샬란 족이기도 했다.
동족의 복수를 위해 수많은 위기를 넘어 고련을 끝낸 그는 결국 바람의 정령 상위 마스터에 올라섰다.
당시 문헌에 따르면 그가 움직이면 폭풍이 불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한다. 그만큼 그는 대현자 테무드조차 선뜻 등을 맡겼을 정도로 신의가 있고, 강력한 전투력을 보유한 자이기도 했다.
야안은 고대 영웅 중 그에 대한 이야기를 상당히 좋아한 편이었다.
비록 인간은 아니었지만,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대현자 테무드와 함께 죽음의 지배자와의 전투에서 마지막을 같이 한 자인 그의 이야기는 앞으로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 자신에게 큰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를 기리어 야안은 뇌전의 정령에게 이 이름을 부여했다.
다행스럽게도 뇌전의 정령은 그에 대한 이야기와 야안이 느끼는 감정을 읽어 내 그 이름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잠시 자신의 이름에 대해 만족을 보이던 유피테르는 야안에게 충고하였다.
“이제, 뇌전의 정화의 봉인을 풀어도 될 것이네. 하지만 오늘은 참게나 하루 정도는 이 힘에 익숙해 진 다음에 일을 벌이는 게 안정적일 것이네.”
야안 또한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라 그의 충고를 선선히 받아들였다.
“알겠습니다.”
그런 유피테르의 사고는 확실히 하급 정령의 것으로 보기 어려웠다. 능히 상급 정령의 사고를 보인다 할 수 있었다.
야안의 생각을 읽은 유피테르는 아쉬운 말을 꺼내야 했다.
“본래 아리스 님께서 나에게 주신 권능으로 지금 이 같은 사고를 할 수 있으나, 단편적인 기억이 문제이네. 나는 많은 기억을 상실하였네. 하지만 이 또한 그대가 경지에 오른다면 찾을 수 있는 것이 되겠지.”
유피테르의 말에 야안은 이미 로지와의 대화를 통해 짐작한 바 있는지라 머리를 저었다.
“이미 그것에 대해 짐작한 바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야안은 그에게 묻고자 한 바를 물어보았다.
“제 생각을 읽으시니 묻겠습니다. 혹시 야루스 산맥의 본래 이름을 아십니까?”
야안의 머릿속에 그려진 그 야루스 산맥의 위치를 알았던 유피테르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기이하다는 듯 어투로 답했다.
“이상한 일이네. 무언가 그것에 대해 막고 있군. 이것은 나의 기억의 상실과는 무관한 일이야. 기묘한 일이네.”
하지만 유피테르의 그 말과 달리 야안은 그것으로도 충분히 만족했다. 그의 말은 지난 부족과의 가설 중 하나가 맞았음을 입증하는 것이니 말이다.
“그것이면 충분합니다.”
유피테르는 야안의 답에 곧 그의 생각을 읽더니 이내 야안의 말에 동의하였다.
“확실히 죽음의 지배자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지. 정말 문제로군.”
단편적인 기억 속에서 해답을 찾는 듯 잠시 말을 끊던 유피테르는 이내 말을 이었다.
“그래, 내 생각이 맞다 면 자네는 그 악마가 말한 드래곤을 만나야 할 것이네. 오직 그 존재만이 그 대답을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네. 그리고 그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 죽음의 지배자가 걸어둔 저주도 풀어지겠지.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그대는 최소 초인과 맞설 정도의 힘을 가져야 할 것이야.”
초인. 현 대륙의 수많은 강자 중에서도 아홉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다. 아니, 부족의 붉은 왕이 그와 같은 경지에 있다 생각한다면 이제 열 명의 존재라 하겠다.
그 희귀한 숫자만큼이나 올라서기 힘든 경지이기도 했다.
그것은 막연하다는 생각을 넘어서 마치 불가해의 경지라 느껴질 정도였다. 야안은 수련을 하면서 조금씩 강해지며 그런 그 생각은 더욱 굳어져 갔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어째서 최소 초인의 힘을 갖추어야 하느냐? 에 말에 유피테르의 답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나의 생각이 맞다 면 그 드래곤은 저주를 받았을 것이네. 그로서 사마에 물들어 있을지 모르지. 그대는 드래곤과 싸워야 할 것이며, 그 전투에서 일정 시간 동안 살아남아야 할 것이네.
그 일정 시간 속에서 드래곤의 공격을 막을 수 있다면 정기 어린 드래곤인 만큼 사마의 힘을 물리며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지. 미리 말해두는바 최소 그대와 최초 계약을 하였을 당시 가장 강한 그 존재 정도는 되어야 할 것이야.”
계약 당시 가장 강한 존재. 그것은 바로 로뎅 스승님을 말함이었다.
그렇게 말하던 유피테르는 이내 그 경지가 인간에게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알고는 잠시 고민하며 야안의 상태를 살피더니 무언가를 발견한 듯 흥미로워하며 말했다.
“자네를 살펴보니 나의 전 계약자가 지녔던 그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군. 그래, 그 힘이라면 어쩌면 초인의 벽을 넘지 않아도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활로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네.”
전 계약자라면 주술에 대한 것을 말함이 분명했다. 야안이 물었다.
“주술이 활로를 찾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음~ 그것을 주술이라 부르는 가보군. 그러하네. 물론 주술 이전 지금의 검과 마법의 수준을 한 단계 넘어서야겠지.”
그것은 당연한 말이었다. 상급 익스퍼트에 들어섰다지만 아직 몇 달 채 되지 않았고, 그것은 마법 또한 그러했다.
유피테르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야안은 짐작했다. 못해도 검으로는 검의 구를 완전히 자신의 통제 아래에 내려다 두어야 할 것이며, 또한 마법으로는 중급 현자 마스터를 넘어서야 할 것이다.
사실 그렇다 하여도 초인과 맞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 부분을 주술이 메꿔 준다 하니 야안은 리트담의 저서를 긴 시간을 들여 탐독해야 할 것이다.
일순간 어두워졌던 야안의 낯빛이 밝아졌다.
물론 그 같은 경지에 오르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불가해 같은 초인의 경지를 생각한다면 현실감이 있는 대안이었다.
유피테르와의 계약과 그와의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아침이 찾아왔다. 야안은 한 차례 뇌전신공을 운기를 끝으로 수련을 끝낸 후 동굴 밖을 나섰다.
마크 자작은 야안이 이번에 뽑은 농노 2,200명 중 뽑은 400명의 병사들에 대한 평가는 후한 편이었다.
비록 잘 먹지 못해 몸집은 작은 편이었지만, 그들의 나이가 아직 십대 후반임을 본다면 개선할 여지가 있었다.
확실히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이제 한 달이 막 지난 지금 눈에 보일 정도로 그들의 체력이나 신체가 향상되고 있음을 본 것이다.
육식을 비롯해 여러 곡식이 제공되고, 기초적인 체력 훈련을 시작한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변화가 왔으니 시간이 지난다면 충분히 그가 원하는 수준의 신체 조건을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카람 백작 가와의 첫 전투 이후 본격적으로 그들과의 전쟁을 시도하는 입장에서는 병력의 정예화는 그가 목표로 하는 것이었다.
현재 마크 자작가의 전력은 나프롬 자작 가를 몰락시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나라 밖의 전쟁이 끝이 난다면 그때까지 그들을 고립시켜 약화된 나프롬 자작 가를 함락할 것이다. 물론 교활한 나프롬 자작 이었으니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가 어떤 식으로 발악을 하던지 나프롬 자작 가의 몰락은 확실시되었다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폭정으로 영지민들의 지지를 잃었으니 그것만으로도 나프롬 자작이 가야 할 길은 가시밭길이라 할 수 있었다.
인재. 그것은 마크 자작이 가장 반기는 것이었고 그 가치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야안으로 인해 그는 깨달았다.
전대의 총관인 매틀 요한이 왜 자신의 불안을 넘어서라도 야안과 같은 인재를 잡으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 한 명이 내놓은 결과를 보아라. 얼마나 놀라운가? 마크 자작은 매번 그 질문을 스스로 하며 그에 대한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야안의 정치적 감각 또한 대단한 것이지만 그의 안목은 그것을 뛰어넘는 바가 있었다. 또한 아리스 님을 따르는 신관답게 그의 인품은 고매했고, 그 때문인지 몇백 년간 제대로 된 인재를 보기 힘든 마크 영지에는 인재가 끊이지를 않았다.
한스부터 시작하여 그의 제자인 엘룬을 비롯한 수많은 관료와 익스퍼트 초급에 올라선 챈들러와 테리 외 뛰어난 무재를 지닌 기마병들은 앞으로 마크 자작 가의 폭발적인 성장을 할 수 있게 되는 근원이기도 했다.
이번에 야안이 여정에서 돌아와 데려온 제코라는 인재는 확실히 놀라운 바가 많았다.
테리와 어린 나이인 이 인재는 그 검 또한 상급 유저에 올라서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재라 할 수 있건만, 그는 3전장에서도 마크 자작이 단 한 번 보았을 만큼 희귀한 존재인 정령사였다.
비록 제코가 이제 막 정령과 계약을 한 하급 비기너 정령사였지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정령사의 잠재력을 생각한다면 그의 가치는 앞으로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것이 분명했다.
그간 그가 찾은 수맥으로 이제 마크 영지는 한동안은 물 부족 현상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듯했다.
또한 지난 론의 상행의 성공이 이어지면서 영지에 돈이 돌기 시작했다.
몇 년에 걸친 공사들로 일꾼들은 숙련된 모습을 보이었고, 그로서 조금씩 공사에 대한 노하우가 쌓여 그 공사 기간이 줄어들게 되었다.
마크 자작은 아직 챈들러가 미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의 짝이 될 만한 여인을 찾는 중이었다. 하지만 본래 신분이 남작 가의 자제임을 알았기에 이 시골 영지에 그의 짝이 될 만한 여인은 사실 찾기 어려운 점이 많았다.
비록 그 나이가 사십 대 후반에 들어선 중년이었지만, 익스퍼트에 들어선 덕분인지 외관으로도 서른 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론 그 신체적 능력은 여느 이십대 젊은이들을 크게 상회하였으니, 사실 그의 나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야안과 상의 끝에 지난 전쟁에서 잃었던 가신의 딸 중 한 명과 혼사를 치르는 게 좋으리라 판단 내렸다.
줄 가문의 줄 라임이라는 여인이었는데 아버지와 그의 오빠가 전장에서 죽은 뒤 사실상 가문의 대가 끊어질 걱정에 놓여 있었다. 가문이 망하자 자연 혼사 길이 막혀 벌써 스물다섯의 나이에도 혼인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준 귀족이라 하나 귀족가인지라 평민과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어머니의 말에 그녀 또한 그 의견을 받아들이었다.
이 점에 대해 평소 안타깝게 생각한 마크 자작은 야안의 그 의견에 크게 반기었다.
본래 무가의 가문인 만큼 그녀는 무인의 아내가 어떻게 처신을 잘해야 하는지 잘 알기에 챈들러의 안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다 할 것이다.
어머니의 미색이 고운 터라 줄 라임 또한 미색이 고운 편이었다. 시골 가 귀족 특유의 수수함이 자리했는데, 주군과 야안의 뜻에 선을 본 챈들러는 그 외모와 더불어 강단 있는 성격에서 예전 어머니를 보았던 터라 마음을 주게 되었다.
본래 남작 가의 자제였고, 또한 기사라는 사실에 그녀의 어머니는 매우 반기는 눈치였다. 줄 라임 또한 전쟁에서 잃은 자신의 아버지와 오라버니처럼 듬직한 챈들러에게 호감을 보인 터라 그 혼사는 시원하게 이루어졌다.
혼인은 이번 겨울 초에 하기로 했다.
그전까지는 나프롬 자작 가를 봉쇄하거나 새로운 신병을 훈련하는 등 바쁜 탓이다. 현재 군의 핵심인물인 챈들러인만큼 그의 부재는 큰 편이었기에, 군사를 움직이기 힘든 겨울에 혼인을 하기로 한 것이다.
그렇다 해도 혼사를 준비하는 등 격식을 차리는 일을 생각한다면 반년이라는 시간은 사실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전에 론과 티애의 혼례가 있었던 덕분에 마크 자작은 자신의 수하들의 계속되는 혼례에 크게 기뻐하는 눈치였다.
최근 테리와 제코의 대련이 번번이 많아지고 있었다.
단순히 검만으로 따진다면 테리가 상당히 뛰어난 편이나, 정령과의 계약을 통해 그 신체적 능력이 크게 상승한 뒤 제코의 검은 이제 막 상급 유저에 올라섰지만, 그 신체적 유리함을 통해 그 승부가 쉽사리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상급 유저에 끝자락에 있는 테리였다지만, 제코의 검 실력과 불쑥 튀어나오는 정령의 힘을 상대하기에는 까다로운 바가 있었다. 다만, 그가 익히고 있는 이십사수검법은 본래 중급 익스퍼트까지 통용될 만큼 명가의 반열에 오른 검법이었기에 그 같은 막상막하의 대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가끔 일을 일찍 마친 한스는 그들의 대련을 지켜보면서, 그들을 치료해주거나 했다.
‘캉, 파악-’
요란하게 검이 부딪히면서 테리가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은 제코가 이내 압축한 물의 구를 터뜨리면서 승리하게 되었다.
덕분에 온몸이 흠뻑 젖은 테리는 거칠게 물을 털어대며 투덜거렸다.
“정말이지, 너는 상대하면 할수록 까다롭군. 정령사라는 게 원래 그런 것인가?”
그의 말에 제코는 부끄러운 듯 머리를 긁적였고, 한스는 웃음을 흘리며 그의 몰골을 닦을 천을 건네주며 말했다.
“하하. 설마, 제코가 특별한 것이지. 정령사가 검을 저처럼 다룬다는 말은 난 듣지 못했어.”
그러며 땀을 흘리는 제코에게도 천을 건네주며 자잘한 부상에 힐과 마케를 펼쳐 주었다. 제코는 한스가 야안의 제자라는 말을 들었기에, 어려워하는 면이 있었다.
“아, 매번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주인을 모시는 제자라 그런 모양인데 한스는 그런 제코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니까? 스승님께서 이미 너도 제자로 보시고 있어. 다만, 네가 불편해할까 봐 말을 아끼시는 것이지. 그래도 네 마음은 이해할 것 같아. 저 녀석도 비슷한 마음일 걸.”
그 말에 테리 또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두 주군을 모실 수 없기에 표현하지 않지만, 야안을 향한 충성스러운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마크 자작이 보기 드문 주군의 상임을 알고 있지만, 야안 또한 보기 드문 주군의 상이며 그 이상으로 존경받을 성자임을 아는 바이다.
아니, 그 이전 고작 농노에 불과했던 그 자신을 알아봐 주고, 자신의 재능을 이끌어 준 은인이었다. 사내라면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인간이라면 절망 속에 잠기었던 자신을 빛으로 인도해준 존재를 선망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셋 다 야안을 흠모한다는 점을 가진지라, 그들은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각자 우선으로 하는 분야는 달랐지만, 그 나이가 비슷했고, 그 성정 또한 조화가 잘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한스는 제코의 치료를 마치고, 대체로 약한 상처를 입은 테리의 치료를 해 준 뒤 함께 연무장을 벗어났다.
술을 좋아하는 제코에 의해 그들도 술맛을 알아버린 터라 매번 노을 속에서 유유작작 술을 즐기곤 했다.
나흘 뒤에 테리가 출정을 나서야 하는 탓에 그들의 술자리는 쉽사리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