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95화
“이야기한 것을 찾아주겠는가?”
“음, 범위가 좀 넓긴 하지만 이 정도야 뭐. 어렵지 않네.”
그 자신감이 대단해 오만해 보이기까지 한 유피테르는 이내 형화화 한 몸을 퍼뜨리며 허공에서 사라졌다.
야안만이 이 영지에서 유피테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알고 있었는데, 그 또한 유피테르의 믿기 힘든 그 능력에 감탄을 자아냈다.
“바람의 상위 정령사나 가능할 일이건만. 역시 대단하군.”
그가 유피테르에게 부탁한 일은 다름 아닌 이곳 대영지에 자리한 암시장을 찾아 달라는 것이었다.
암시장은 그 고객도 정해져 있고, 그 열리는 곳도 다르며 접선지의 형태 또한 번번이 변형돼 찾기가 어렵다.
또한 그 물건들은 최소 2배에서 5배까지 그 가격이 치솟는데, 그럼에도 이런 암시장이 유지되는 이유는 이곳에서는 대부분의 모든 물건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야안은 이 암시장에서 적당한 수준의 신분을 얻고자 했다.
제국의 귀족은 둘로 나누어진다.
단승 귀족과 세습 귀족이 그것인데, 일반적으로 단승 귀족도 귀족으로 쳐주나 귀족들 사이에서는 세습 귀족만을 인정하는 추세이다.
이는 단승 귀족과 달리 세습 귀족은 제국에 큰 공헌을 하는 자에게만 내려지는 탓이다. 또한, 세습 귀족에게 내리는 귀족패라는 영광스러운 것이 그 공헌을 빛낸다.
제국의 귀족패는 마법도 마법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이한 용액이 발라져 있어 복제하기가 불가능했다.
또한 신분 조사도 어렵지 않아, 몰락한 귀족의 후예가 모습을 보여도 며칠 지나지 않아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쉽게 판가름할 수 있었다.
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그 신분사회가 철저하였다.
하지만 그렇다 하여 여타의 다른 나라처럼 그 신분사회가 불합리하지는 않았다. 굶어죽어도 명예를 지켜야 하는 것이 귀족이었고, 그 내외는 몰라도 겉으로나마 정당치 못한 일에 발을 들인 것은 대대적인 가문의 망신이었다.
하기에 제국의 평민들은 귀족들에게 여타의 나라처럼 불합리한 피해를 보지 않았다. 물론 많은 제재를 받는 만큼 귀족들에 대한 대우는 확연히 다르다.
죄를 지어도 큰 죄가 아니라면 직접적인 벌을 받지 않았고 나라에서는 일정 수준의 품위유지비가 지원되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같은 대회에서만 해도 얻을 수 있는 규모가 달라진다.
용병이라면 그저 돈을 얻는 것으로 끝일 것이지만, 귀족이라면 그 액수는 배가 될 것이고 얻기 힘든 명예 훈장이나 영지를 얻은 일도 아니다.
야안이 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귀족의 신분을 얻으려는 것에는 이와 같은 이유가 있다. 신분을 숨기기 위한 것도 있으나, 그는 이 점을 잘 이용하여 레필 공작에게 다가가 기회를 노리려 한 것이다.
여하튼 이런 이유로 야안은 암시장을 찾고자 했다.
자이한은 이미 지난 여정에서 유피테르의 그 놀라운 힘에 감탄한 터라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놀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 해가 저물 때쯤 되어서야 영지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피테르가 다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손가락으로 야안의 이마를 쿡 찍어주더니 이내 사라졌는데, 야안은 그것으로 유피테르가 찾은 암시장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마치 그 자신이 겪은 일처럼 또렷한 수준이라 그는 잠시 감탄하다, 이내 자이한을 보며 말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이곳과 멀지 않군. 내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어 보이네.”
“중앙 내성 쪽과 가까운 모양이군.”
“그러하네. 치안이 대단한 내성 쪽과 가까운 것을 보면 이곳의 암시장은 샤린 백작 가도 묵인한다고 보아야겠지.”
“음~ 그렇겠군. 규모는 어떠한가?”
“유피테르 그가 알려준 것만을 보아도 대단하네. 여타의 자작 가 규모와 비슷하네.”
“하기야, 그 정도가 되지 않는다면 그 같은 암시장을 유지하기란 어렵겠지. 그 정도라면 우리가 원하는 신분도 얻을 수 있을 것 같군.”
“그러길 바라네.”
그날 암시장을 찾기 위해 움직이지 못했던 그들은 그제야 노숙의 피로를 털어내고 간단한 음식과 술을 시켜 야담을 나누었다.
다음 날이 되어 이른 시간에 식사를 마친 그들은 곧 말을 타고 내성을 향했다.
야안의 검은 야쿤은 마차와 함께 마크 자작 가에 보내졌는데, 이는 앞으로 비밀리에 움직여야 할 일이 많은 그들에게 그 생김이 기이한 검은 야쿤은 너무 눈에 튀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타던 검은 야쿤만큼은 못 되지만 그래도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준말이라 이동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그들의 예상과 달리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암시장의 비밀 접선지에 도착할 수 있었는데, 이는 상당한 재물로 유명한 샤린 백작 가답게 영지의 대로가 잘 닦여진 덕분이었다.
암시장의 접선지는 의외로 은밀한 곳에 자리하지 않았다. 그곳은 상당히 평범한 한 농부의 가정집이었다.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어린 딸이 있는 소소한 가정집이었는데, 야안은 그들 중 서른 후반의 풍만한 몸매를 지닌 농부의 아내에게 5골드를 쥐여주며 말했다.
“검은 달을 찾아왔네.”
야안의 그 말에 조금 전만 해도 순박한 농부의 아내였던 여인의 눈빛이 일순간 날카롭게 바뀌다 이내 눈빛이 다시 돌아오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 말에도 야안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진실의 눈을 통해 그 접선의 방법을 알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다시 20골드를 그녀에게 쥐여주었다.
“미안하네. 검은 별을 보러 왔네.”
야안의 그 말에 그녀는 다소 놀란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이내 대충 말아 올린 끈을 풀어 야안에게 내 주며 소곤거렸다.
“물에 푸시면 됩니다.”
그 한 마디만을 말한 그녀는 이내 곧 서둘러 요란한 소리로 엄마를 부르는 자식들에게 곧 서둘러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야안과 자이한 또한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않은 채 이내 몸을 돌려 내성으로 향했다.
현재 야안과 자이한의 외모는 상당히 변한 상태였다.
야안은 본래의 모습과 달리 40대 후반의 단단한 형태를 지닌 검사의 모습이었고, 자이한은 그 나이가 이십 대쯤으로 보이는 검사로 자리했다.
한눈에 보아도 부자간이라는 것을 짐작할 정도로 그 외모를 변형시켰는데, 그 모습만이 아니라 그 기질이나 목소리 등 세세한 것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이제야 주술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을 잡은 야안은 할 수 없는 고차원의 주술로, 이는 자이한이 상당히 공을 들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초인이라 할지라도 야안의 본래 실력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야안의 실력에는 변화가 없었기에 더욱 놀라운 주술이기도 했다.
그들은 첫눈에 보아도 귀한 혈통을 이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 외모는 물론 느껴지는 기세가 귀족이라 무어라 말하지 않음에도 저마다 귀족에 대한 예를 갖추었다.
덕분에 손님을 받는 데 까다로운 콧대 높은 여관에서도 위세가 있는 귀빈 층만이 얻을 수 있는 방을 배정받을 수 있었다.
야안은 음식을 시켜 배를 채우고, 곧 자이한과 함께 그 여인이 준 끈을 물에 풀기 시작했다.
커다란 대접에 가득 물이 담긴 그곳에 끈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잉크를 떨구는 듯 요란하게 물속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곧 물 대접 위로 투박한 형태의 지도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이내 흩어지더니 곧 본래의 물색으로 돌아왔는데, 잠시였지만 야안에게 있어 그 정도의 지도를 기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이한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내 그들은 여관을 나와 해가 저물어 어둠이 찾아온 거리로 나섰다.
늦은 시간에도 뜨거운 열기가 자리한 시장을 구경하던 자이한이 야안에게 말했다.
“참으로 기이하군. 설마 본점이 내성에 있을 줄이야.”
“언제나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지.”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자이한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그들은 시장 끝자락에 자리한 작은 대장간에 들어섰다. 그들이 올 것임을 알았던지, 망치질을 하던 중년은 이내 하던 일을 내려놓고, 그들을 맞이했다.
“그대들이 검은 별을 찾으시는 분이시구려.”
“그러하네. 만날 수 있겠는가?”
야안과 자이한을 눈빛을 빛내며 마치 물건의 가치를 살피듯 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당연한 일이지요.”
하며 앞장서던 그는 대장간 옆에 자리한 작은 방에 들어서더니 이내 불을 켜고 벽을 여기저기 매만졌다.
잠시 후 ‘그르르릉’ 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곧 밑으로 내려서는 계단이 모습을 보였다.
계단은 의외로 투박하지 않았다. 질 좋은 목재를 사용한 것 같았다. 준비된 횃불을 앞세워 가는 대장장이 뒤로 내려선 지하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곳은 상당히 넓고 깊었다.
야안과 자이한은 내려선 지하에서 두 개의 석문을 다시 지난 뒤에야 어느 방으로 들어설 수 있는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럼 저는 이곳에서 기다리지요.”
대장장이는 그렇게 말하며 문 앞에 자리를 지켰고, 야안은 잠시 그를 보다 이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은 의외로 넓고 밝았다. 상질의 마법등잔에 의해 대낮같이 환한 그 방은 수 천 권의 책들이 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오래된 명화들이 벽에 걸려 있기도 했으며 융 제국에서 책으로나 보았던 하얀 호랑이의 가죽이 바닥에 자리해 이곳 암시장의 주인이 있는 곳임을 확인해주기도 했다.
그 방 한가운데 자리한 이는 그 나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늙은 노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듬성듬성한 백발에 검은 반점이 자리한 그 노인은 다른 이가 본다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힘없는 늙은이로 볼지 모르나, 주술로 인해 인간의 신체 구조에 대해 정통한 야안과 자이한에게 있어 그의 허실을 꿰뚫는 것은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재미있군. 분장으로 그 같은 변형을 이루다니.”
야안은 일부로 소리를 내어 말을 꺼냈고, 그의 말에 노인은 매우 흥미롭다는 듯 눈빛을 보이며 말했다.
“저를 찾는 분 중 눈치채시는 분들은 없었는데 대단하시군요.”
목소리를 듣는다면 저음의 중년의 사내로 보였다. 그 목소리는 야안과 자이한이 꿰뚫은 사내의 연령층과도 같았다.
초인의 경지에 오른 야안이 보기에 사내는 중급 현자 익스퍼트에 오른 자임을 알 수 있었다.
‘현자가 이곳의 관리자? 하기야 그 정도가 아니라면 이 세력을 꾸려 갈 수 없겠지.’
사내는 미리 준비한 의자에 그들을 안내하더니 손수 차를 다려 주었다.
“포룰렌 차입니다. 제가 즐겨 찾는 차이지요.”
포룰렌 차는 제국민들이 즐기는 차였다. 하지만 그 품질에 따라 그 맛이 천차만별인데, 유난히 포룰렌 차를 좋아하는 제국민들은 죽기 전에 상급의 품질의 차를 마시는 것을 소원하기도 했다.
암시장의 주인답게 그가 내놓은 포룰렌 차는 상당한 상질의 것이었다.
이미 여러 차례 포룰렌 차를 먹어 본 야안은 잠시 그 차를 즐기다 이내 무뚝뚝하게 말을 꺼내었다.
“신분을 원하네.”
그 말에 그의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더니 말했다.
“손님들께서 찾는 신분이 평범한 것은 아닐 테고 귀족의 신분을 원하신 모양이군요.”
그는 그렇게 말을 끊고는 이내 여유롭게 포룰렌 차를 즐겼는데, 그 태도가 매우 편안해 보였다. 상대의 패를 확인하였기 때문인데, 야안은 그의 생각을 아는 터라 자신의 허리에 찬 검을 검집 채 그의 앞에 내놓았다.
“보상으로 이것을 내놓겠네. 아마 충분할 것으로 보네.”
그 검집은 조잡한 수준이었고, 손잡이도 투박해 척 보아도 가치가 없어 보이건만 그것으로 보상하겠다는 야안의 말에 사내는 의문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