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99화
검 자체가 무겁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기운의 유동이 그렇다는 말이었다. 또한, 단순하다는 것은 검법의 체제가 쉽다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변화 중 반을 지우고 그 변화에 들어갈 힘을 남은 변초에 싣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의 검법은 리게 움직여 제압하는 것을 최고로 쳤기에 이 같은 검법이 유행하였다.
그에 비해 라인의 검은 현재 제국의 검을 대변하는 검이었다. 가볍고 화려하며 그 일격이 매우 날카로웠다.
라인의 검법 또한 오랜 전통 속에 다듬어진 것이었지만, 사실 문명이 가장 꽃피던 고대 시절 유적에 얻은 잭슨의 검법에 비해 손색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라인에게는 그 검법의 차이를 메우고도 남을 경험이라는 것이 그에게 있었다.
야안은 그 대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귀빈석의 한자리에 앉아 그들을 살피다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그 모습은 마치 보지 않아도 그 결과를 아는 듯했다.
황자 피르망은 그런 그의 모습을 유심히 본 터라 흥미롭다는 듯 야안에게 물었다.
“왠지 그대는 이 대전의 결말이 어떻게 끝이 날지 알고 있는 듯하오.”
황자의 물음에 야안은 잠시 망설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그러한가? 그런 그대는 누가 이길 것으로 보이는가. 나는 라인이 이길 것으로 보네만. 그대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
황자 피르망의 물음에 야안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잭슨 그가 이길 것 같습니다.”
의외의 대답이라 피르망은 잠시 놀라다 이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럼, 나와 내기를 하지. 내가 이긴다면 그대에게 하나의 부탁을 하고 싶네. 대신 그대가 이긴다면 향후 그대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도록 하지. 어떤가?”
“받아들이겠습니다.”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야안에 황자 피르망은 웃음을 흘렸다. 안목이 높은 그의 수호기사의 판단 또한 라인이 이길 것으로 보았기에 이번 내기는 자신의 승리로 끝이 날 것으로 확신한 모습이었다.
잠시 대전을 정리하는 시간이 오가고 두 위대한 검사가 자신을 정비하는 시간이 끝이 나자, 검술대회의 마지막 대전이 시작되었다.
‘와아아아-’
수만 명의 시민들의 함성과 북소리는 그 위대한 두 검사가 모습을 보이는 순간 점차 고조되어 갔다.
그리고 그들이 거대한 비무대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자 그 크고 놀라운 함성은 점차 줄어드는 북소리와 함께 잦아들기 시작했다.
이후 그 두 사람이 자신의 검을 꺼내고 자세를 잡자 이내 그 넓고 거대한 경기장은 조금 전의 그 거대한 함성이 거짓인 마냥 사라지게 되었다.
여타의 인사도 말도 없이 검의 구를 형성하며 점차 범위를 넓히기 시작하던 그들은 곧 검의 구의 영역이 부딪히기 무섭게 그 둘의 신형이 흐릿해지더니 이내 거리를 격하고 요란하게 부딪혔다.
‘콰가강.’
라인의 수십 발의 검기는 모든 것을 베어버릴 듯 날카로웠지만 단순한 형태를 띤 잭슨의 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리고 잭슨의 무겁고 패도적인 검 또한 라인의 화려한 변화를 띤 그의 검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들의 검이 추구하는 길이 상극이었기에 대전의 형태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매우 격하게 흘러갔다.
이번 대전에 참가한 다른 대전자들 또한 그들의 결전에 숨을 죽이고 쳐다보았고, 시민을 통제하고 호위를 하던 병사들 또한 그 꿈에서도 그리기 어려운 격전에 잠시 자신의 일을 잊고 말았다.
다만 초인의 경지에 오른 야안만이 그 자리에 있는 이들과 다른 시선으로 살펴볼 뿐이다.
그는 뛰어난 검사인 라인을 만나서야 자신의 숨겨진 모든 검의 오의를 풀어놓는 잭슨의 검을 크게 눈여겨 보았는데, 이는 아직 미완성적인 면이 자리한 자신의 검법을 보완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상당한 부분이 아닌 극히 일부에 불과했지만, 사실 그것으로도 그에게는 큰 도움이 되었다.
둑이 미세한 구멍에서 시작되다 결국 무너지는 것과도 같은 현상처럼 이 작은 단서가 그렇게 되지 못하게 될 일은 없었다.
여하튼, 그 둘의 대전은 흥미롭게 흘러갔다. 처음에는 경기장에 많은 이들이 예상한 것처럼 라인 그에게로 유리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사실 그것은 당연했다. 라인 그가 상급 익스퍼트에 오른 지 벌써 17년이 넘어섰고, 그 또한 웬만한 용병들보다 더 많은 실전의 경험을 야루스 산맥에서 보인 바 있었다.
당시 오크들에게 있어 하얀 학살자로 불리었던 만큼 그의 검은 철저하게 실전에 다듬어져 있었다.
이후 그는 자신의 검이 너무 살기가 짙다는 것이 문제점이라 생각하여 십 년간 검술관에서 자신의 후예를 가르치며 중도의 검을 찾기 시작했다.
그 성과가 있어 지금 그의 검을 보면 예전의 그 하얀 학살자라 불리게 한 그 살기는 온데간데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만큼 그의 검은 성장하였으며, 그를 알았기에 황자의 수호기사 또한 라인이 이번 대전에서 승리할 것임을 단언한 것이다.
하지만, 대전이 중반을 넘어 후반으로 넘어가자 수세에 몰려 있던 잭슨 쪽으로 점차 전투의 양상이 기울기 시작했다.
그것은 정말이지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잭슨의 검은 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그 펼쳐지는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 라인의 검을 막아설 때의 검식이 반 이하로 줄어들기 시작한 것인데, 어느 순간부터는 라인의 초식이 채 다 펼쳐지기도 전에 잭슨의 검이 그 약한 부분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마치 라인의 검법을 안다는 듯한 태도였기에 라인 또한 심적인 동요가 적지 않아 보였다. 결국 검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잭슨이 라인의 검의 구를 침식하기 시작했고, 적지 않은 부상 끝에 라인에게서 승리를 가져갈 수 있었다.
잭슨은 자신의 승리를 듣자마자 정신을 잃었는데, 막상 패자인 라인은 서 있었으니 그 결론적인 모습을 본다면 승자와 패자가 바뀌어야 할 것 같아 보인다.
황자 피르망은 야안의 말대로 잭슨이 승리하자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놀라다 이내 내기를 한 야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전부였는데, 그에 황자는 저도 모르게 고인 침을 삼켰다.
‘내가 예상한 것보다 이자의 그릇은 더 클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가장 어리면서도 황제의 자리를 두고 싸우는 그답게 그는 이내 흔들리는 마음을 잡으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이번 내기는 내가 지고 말았군. 언제든 좋네. 그대의 소원이 무엇이든 들어주도록 하지.”
호쾌한 웃음과 함께 황자 피르망은 그 말과 함께 자신의 약지에 자리한 반지를 야안에게 건네어 주었다.
그것은 황자가 이번 내기를 잃지 않겠다는 약속의 증표였는데, 아무렇지 않게 내 주는 그 반지는 그 소원의 증표 이전에 그레이트 힐링을 펼칠 수 있는 영구 마법 반지라 그 가치가 대단한 것이기도 했다.
정신을 잃은 잭슨 이외의 이번 대전에 나온 모든 참가자에게 격려와 함께 상당한 상금을 내렸다.
또한 이 경기장을 보러 온 시민들에게 격려와 함께 준비한 불꽃놀이로 그들의 여운을 달래었다.
라인은 예상과 달리 자신이 지기는 하였으나, 화가 나거나 후회스러운 모습보다는 왠지 후련해 보였다.
마치 자신이 이 대회에 나선 목적을 달성한 듯 보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열흘의 시간이 지나 가을 축제가 끝이 난 뒤에야 잭슨은 부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성수와 중급 현자 마스터의 손길, 그리고 고대 유물에서 얻은 심법으로 인해 그 육체의 회복이 상당했기에 가능한 회복력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또한 마지막 삼 황자의 영광의 십 인에 들어서게 되었다.
그는 우승자의 혜택으로 황자 피르망의 권한으로 인한 기사의 신분을 얻고 단승귀족이 아닌 계승귀족인 자작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외지이고 작은 편이지만 영지를 약속받았는데, 만약 황자 피르망이 다음 대의 황제로 자리 잡는다면 그 영지의 규모나 신분 또한 달라질 것이다.
잭슨은 영광의 십인 중 자신과 비슷한 또래인 야안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그 또한 정보통으로부터 특채로 들어선 영광의 일인이 있다는 것을 들었기에 바로 그가 그임을 알 수 있었다.
‘이자가 그 유명한 소문의 주인인가?’
칼 대용병단을 유지하려면 대귀족 못지않은 정보통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그들의 정보통에도 잡히지 않는 것이 그였다.
이름도 나이도 그 직책도 알 수 없는 마치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듯한 존재에 잭슨은 흥미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제야 그를 보게 된 것이다.
놀랍게도 그는 첫 번째 영광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대단하다는 라인을 이긴 자신조차 다섯 번째의 자리에 앉는 것에 그쳤건만, 그는 영광의 십인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에게 주어지는 첫 번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황자의 수호기사조차 세 번째 자리에 차지한 것이 고작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믿어지지 않는 일이다.
‘폰 발론? 들어 본 적이 없는 귀족이다.’
제국의 수많은 귀족의 이름을 외우던 그가 듣지 못한 이름이라면 전형적인 몰락한 귀족의 후예임을 의미한다.
몰락한 귀족의 후예가 얼마나 비참하고 허울뿐인 존재인지를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웠다.
차라리 나이가 지극한 자라면 인정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도 아니었으니.
그런 그의 시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던 황자 피르망은 작게 실소를 보였다.
“하하. 잭슨 경. 그대의 호기는 참으로 대단하군.”
잭슨은 황자의 그 말에 자신의 실책을 파악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를 하였다. 제국의 다음 대의 황위를 노리는 황자에게는 제국의 5대 용병단 따위는 어렵지 않게 지워버릴 힘이 자리했다.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그의 말에 피르망은 손을 저었다. 그리고 이내 야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다면 그대의 실력을 확인시켜 줄 수 있겠는가? 몇몇 이들 외에는 그대가 그 자리에 왜 앉아야 하는지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군.”
돌려 말한 것이었지만 피르망 또한 야안의 검을 보고 싶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이기도 했다. 야안은 그 뜻을 알았기에 승낙했다.
“물론입니다. 그 상대가 하나든 둘이든 저의 검을 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오만한 말에 분노가 치솟은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서열 2위인 스틴 백작은 물론 냉정함을 유지하던 수호기사 또한 눈살을 찌푸렸다.
황자 피르망은 야안의 그 대담한 발언에 미소를 보이더니 말했다.
“그대는 진정 지금 자신이 한 말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소신. 사내로 태어나 지금까지 헛된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단호한 야안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무인들 모두가 침음을 흘렸다.
‘도대체 저 자신감의 근원이 무엇인가?’
야안의 실력에 대해 간접적으로 알고 있는 딘 후작조차 작게 고개를 저어야 했다.
그 날 처음으로 영광의 십 인이 모였던 자리는 야안의 그 발언에 의해 일찍 끝이 나게 되었다.
곧 딘 후작은 성의 중심에 자리한 자신의 연무장으로 주군과 영광의 십 인을 이끌고 와야 했다.
땅의 정령사인 딘 후작의 연무장인 만큼 그 연무장은 상당히 넓고 튼튼하여 상급 익스퍼트에 오른 검사들의 대련의 충격 정도는 어렵지 않게 막을 수 있을 듯했다.
아니, 그 이전 딘 후작이 정령을 불러들여 중재를 한다면 가까이에서 그들의 놀라운 대련을 생생하게 지켜볼 수 있을 것이다.
곧 먼저 야안이 연무장 그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마치 산책을 나선 듯한 편안한 표정과 행동을 보이는 그는 이곳에 은은히 자리한 팽팽한 이 긴장감을 느끼지 못한 듯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