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26화
“음. 정령에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야안의 중얼거림에 카르샤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마음에 드시면 입찰을 하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본래 저 같은 혼혈은 인간 노예보다 상당히 비싸기는 하지만 그 자존심이 워낙 강한 터라 실제 입찰을 하는 이들이 없다 들었습니다. 아마 어렵지 않게 저 아이를 데려올 수 있을 것입니다.”
카르샤의 말에 야안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긍정했다. 그 자신이 농노 출신이라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이 같이 사람을 물건 다루듯이 사고파는 행위에는 꺼림이 있었다. 그래도 본래 자신이 쓰이려는 생각이 여타의 자들과 다른 터라 그것이 그나마 그의 마음의 부담을 줄여 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늦은 시간이 되었을 때쯤에야 노예 경매장이 시작되었다.
노예의 숫자는 낮에 본 것보다 배는 많았고, 입찰을 하러 온 이들의 숫자는 노예의 배 이상에 달했다.
야안은 그런 노예 경매장을 바라보다, 이내 무재가 뛰어난 이제 13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를 볼 수 있었다.
그 무재가 능히 테리와 비견될 정도였는데 입술이 꽉 깨문 모습이나 그 날카로운 눈빛을 본다면 그 자존심이 대단해 보였다.
놀라운 점이라면, 아이는 이미 상당히 어린 시절에 기초적인 수련을 마친 상태였고, 작지만 마나 또한 지니고 있었다.
검으로 초인의 경지에 오른 야안이었기에 굳이 진실의 눈을 펼치지 않아도 한눈에 알 수 있었는데, 야안은 가르칠 만한 녀석이라는 생각에 예정과 달리 그 아이 또한 입찰을 하였다.
다행히 자신 이외에는 입찰을 하려는 이는 없었다.
그 아이의 가슴에 자리한 붉은 띠 때문인데, 이 붉은 띠는 한 번 팔렸다가 반송되었다는 표시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붉은 띠가 자리한 노예는 대부분 사고를 치거나 다루기 힘들다는 것을 말하기에 그런 아이를 굳이 사려는 사람을 없었다.
이 여자아이가 그 미색이 나쁘지 않음에도 벌써 몇 번째 팔리지 않은 탓인지 노예 경매인도 금방 이 아이를 금방 내려보내려다 야안이 입찰을 하자 무섭게 그 아이를 팔아 버렸다.
아이는 자신을 산 야안을 무섭게 노려보다 곧 노예 관리인에게 거칠게 끌려갔고, 다시 다른 노예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십 일곱 번째가 되어서야 인간의 노예가 아닌 혼혈 노예가 모습을 보였다. 손재주가 좋다는 하프 드워프부터 시작해, 그 일솜씨가 좋은 하프 라토스 등이 모습을 보였다.
그렇게 스무 번째가 넘어간 뒤에야 그 하프 엘프 아이를 볼 수 있었다.
매서운 눈으로 주위를 살피는 그 아이에 입찰을 하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사내라지만 보기 힘든 하프 엘프이고 또한 그 미색이 좋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야안은 마법 물품을 팔아 가진 돈이 여력이 되는 터라 입찰에서 상당한 금액을 주고 그 아이를 데려올 수 있었다.
경매가 끝난 뒤에야 입찰을 한 손님을 위해 마련된 방에서 카르샤와 기다리던 야안은 곧 두 아이를 만나게 되었다.
상당히 세상에 치인 듯 눈에는 불신이 가득한 터라 야안은 이미지 마법을 펼쳐야 했다. 그럼에도 여자아이는 그 적개심의 수위가 약간 낮아졌을 뿐이다.
다만 하프 엘프인 남자 아이는 그나마 그 경계가 낮아진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야안은 이 두 아이에게 진실의 눈을 펼쳤다. 우선적으로 이 아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왜 이들이 이렇게 되었는지 그 근원을 알아야 했다.
여자아이의 이름은 제인.
올해로 13살이었다. 그녀는 푸른 매 용병단의 한 용병의 딸이었다. 딸이라고 하지만, 실상 그 용병은 그녀를 자식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한 시골 마을의 싼 맛에 산 나이든 여인에게서 태어난 자식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 불행은 그처럼 태어나기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그래도, 그녀는 6살이 될 때까지 그녀의 어머니의 보살핌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워낙 어린 시절부터 몸을 함부로 굴린 탓에 그녀의 어머니는 결국 그해 겨울 질병이 악화되어 죽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녀는 거친 용병들 사이의 심부름 따위를 하며 살아남아야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록 아는 것이 없는 시골의 여인에 불과했지만, 이 거친 환경에 아무리 여자아이가 어리더라도 무사하기 어렵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애초 머리를 짧게 치게 하고, 얼굴에 재를 덮어 지저분한 사내아이로 키웠는데, 다행이라면 제인은 상당히 영리하여 어머니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잘 알아 그것에 맞게 처신하였다.
그녀는 오래전 죽어버린 아버지가 있었던 이 용병단을 증오하면서 또한 동경하였다.
아직 어린 자신에게 없는 힘. 오직 힘이 자리한다면 더 이상 다른 이의 더러운 비위 맞추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판단을 내리었고, 그간 몰래 빼돌린 돈으로 마을의 아이들에게 글을 배우며 그 물밑 작업을 시작했다.
한 번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용병들의 그 단순한 검로 따위는 이미 머릿속에 다 집어넣은 상태였다.
물론 비기라고 할 수 있는 검로의 경우는 은밀히 각자 수련을 하던 터라, 약삭빠른 그녀라 해도 알지 못했지만 사실 그런 것을 수련할 시기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기초 검식이나 몸을 수련하는 수련 검식을 펼쳤다.
글이 막히지 않을 때쯤에야 그녀는 푸른 매 용병단 중 가장 난폭하면서 또한 어리숙한 용병에게서 마나 수련법을 훔쳐 배울 수 있었다.
멍청한 노예의 자식이 알면 무엇을 알 것으로 생각하고 방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다행히 그 용병의 마나 수련법은 제대로 완성된 형태의 것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면이나 안정성에 있어 뛰어난 점이 있어 어린 그녀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마나 수련법을 익힐 수 있었다.
다만 용병의 마나 수련법은 단순하고 안전한 대신 큰 힘을 낼 수 있는 구조가 아니라는 게 흠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아쉬운 마음에 새로운 마나 수련법을 알아보려 했지만, 그 같은 비법을 다시 알아내기란 어려움이 컸다.
11살이 되었을 때, 사달이 났다.
성장이 시작되면서 조금씩 몸의 굴곡이나 얼굴의 형태가 여자아이로 바뀐 것이다. 이 때문에 눈썰미가 좋은 한 용병이 그녀를 의심했고, 결국 그녀는 자신의 생일을 며칠 앞두고 여러 용병들에게 범해지고 말았다.
아직 초경도 오지 않은 어린 여자아이에게 거칠기만 한 용병들의 성행위는 고통 그 이상의 것이었다.
그녀는 매번 하혈을 해야 했고, 더러운 용병들의 배설물에 몸이 뒤덮여야 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용병들에 그녀는 몸이 부서질 것 같았지만, 다행히 그간의 수련이 그녀를 버티게 했다.
‘이대로는 비참한 삶뿐이다.’
사랑하지만 또한 한편으로 증오하는 어머니의 삶을 뒤를 따를 뿐인 것이다.
그녀는 탈출을 시도하기 시작했고, 오랜 밑 작업 끝에 12살이 되었을 무렵 탈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탈출에 성공했지만, 어린 계집아이가 세상을 떠돌며 할 수 있는 몇 되지 않았다. 결국, 한 노예 상단에 붙잡히고 말았고, 그녀는 한 성도착증의 사내에게 팔려나갔다.
사내는 여자가 고통의 신음을 흘리는 것으로 흥분을 하는 자였다. 그런 자는 푸른 매 용병단에도 있었기에, 그녀는 결코 수많은 고문 속에서도 신음을 흘리지 않았다.
결국 몸 여기저기가 크게 상처가 났을 때쯤에야 그 성도착증의 사내는 그녀를 포기하였다. 마치 죽은 물고기를 보는 듯한 그녀의 눈에서 흥미를 잃고 만 것이다.
몸 여기저기가 상한 터라 예전에 팔았던 노예 상단에 되팔았을 때 상당한 손해를 봐야 했지만, 그는 그 돈과 더불어 새로운 여자아이를 사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했다.
그 이후, 빨간 딱지를 받은 탓에 3개월을 거친 노예 상단에 끌려다녔던 그녀는 오늘에 이르러서야 야안에게 팔려 나갔다.
남자 혼혈인 바로스의 경우는 그녀보다는 덜했지만, 결코 평탄한 인생은 아니었다.
엘프였던 그의 아버지는 그 자신이 생겨났는지도 모른 채 마을을 떠났고, 부유한 집안의 자녀였던 어머니는 한평생을 아버지를 그리워하시다 집안에 의해 강제적으로 한 중년의 보잘것없는 귀족에게 팔려가듯 혼인을 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녀의 자식인 바로스는 결코 대우를 받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아니, 죽지만 않은 것도 그녀의 어머니가 몸을 던지시다피 보호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가 귀족의 첩으로 들어간 뒤 자신을 보호할 사람이 없어지자 그의 외할아버지는 이 아이로 인해 화근이 생길까 죽여 없애려 했으나, 다행히 한때 어머니를 사모했던 한 경비원이 그를 구해 주었다.
물론 직접적으로 구해준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 아이를 죽였다고 거짓을 고했을 뿐이다.
그렇게 바로스는 겨우 13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겨우 그 나이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되지 않았다.
하지만 눈에 띄는 하프 엘프라는 것이 번번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집에서 도망 친 지 열흘도 되지 않아 그는 한 상인에게 속아 노예로 팔리게 되었고, 그렇게 그는 이번 경매장에 모습을 보이게 된 것이다.
야안은 진실의 눈을 통해 이 아이들의 그 비참하고 괴로웠던 삶에 절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른들의 이기심과 어긋난 탐욕에 의해 만들어진 불행은 이처럼 끔찍하다.
잠시 말없이 그 아이를 바라보고 있는 야안에 혹시나 그가 마음이 바뀐 것이 아닌가 싶어 상인이 실실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이 아이들이 이래 보여도 꾸미고 나면 제법 미색이 고울 것입니다. 그것은 제가 보증해 드리지요.”
소나 말을 파는 듯한 그의 태도에 야안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곧 품에서 금화를 꺼내어 값을 치렀다.
“바로 데려가겠네. 족쇄는 풀어주게.”
“아, 물론 입지요. 다만 요 계집 아이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금화에 히히덕 거리며 좋아하던 그는 곧 아이들의 사지를 불편하게 했던 족쇄를 풀어주었다. 상인이 나가고 난 뒤 야안은 그들의 눈을 바라보다 곧 그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리젠. 리젠.”
조용히 읆조리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성스러운 무언가가 그들의 뇌를 휘저었고, 바로스와 제인은 희열에 떨며 그 혹사 속에 자리한 상처들이 나아지기 시작했다.
바로스는 육체적인 면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점이 있는 하프 엘프인지라 그 근맥을 끊어 일정 이상의 힘을 쓸 수 없게 만들었는데, 야안의 리젠으로 인해 그 상처가 회복되었다.
특히 제인의 경우 성도착증과 용병들의 장난감이 되어 그 망가진 육신은 크게 호전될 수 있었다.
그 놀라운 경험을 하게 한 아이들에게 야안은 다시 그레이트 힐과 마케를 펼쳐 몸의 남은 상처들을 지워냈다.
온몸을 쑤시던 고통들이 몸에서 사라지자 놀라워하는 아이들에게 야안은 물의 술을 펼쳐 지저분한 몰골인 그들을 씻겨 냈다.
곧 깔끔하게 씻어진 그들은 조금 전 그 고되고 괴로워 보였던 아이들이 아니었다. 마치 귀한 보호자 밑에서 좋은 교육을 배운 아이들처럼 보였다.
“그래, 이제 좀 낫구나. 자세한 이야기는 너희가 몸을 추스린 뒤에 하도록 하자.”
부호의 자식인 어머니를 두었던 덕분에 바로스는 어린 시절 많은 것을 배우고 들은 바가 있었던지라 야안이 자신에게 무엇을 한 것인지 대략 이해 할 수 있어 크게 놀라움을 보였다.
“시, 신관님이십니까?”
바로스의 말에 예전 어머니의 품 이후 처음 느껴보는 그 따뜻함에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거리던 제인은 놀라 야안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