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51화
그들의 입장에서는 그렇게까지 할 이유가 없었기에 부르케산이 물었다.
“어째서인가? 다른 대륙에 있는 베론 제국이 그 같은 일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군.”
진정 궁금하다는 부르케산의 물음에 야안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이유는 있습니다. 이 대륙의 난세가 빨리 끝이 나야 하는 절대적인 이유가 말입니다.”
야안은 그렇게 말하며 인벤토리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수근 거렸다. 부르케산 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대주술사의 놀람은 다른 이들에 비해 더 컸는데, 야안이 행한 일에 대해 그 연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부르케산은 저도 모르게 크게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그것은 어떻게 한 것인가? 주술이나 마법 따위가 아니도다. 격이 다른 힘이 존재한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내가 느낀 그대 힘의 본질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이것을 꺼낸 이유는 저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게 야안의 기나긴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아리스 님에 의해 축복을 받아 이방인이 되었던 사실부터 천년을 거슬러오게 된 사연. 죽음의 지배자의 등장. 이종족의 멸망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그에 대응해 자신이 건설하려는 왕국 등.
그 모든 이야기가 끝이 날 때까지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너무도 웅장한 스케일의 마치 전설의 시대의 신화의 이야기 속의 주인공이 자신의 눈앞에 있으니 긴장감에 그들의 손아귀에는 땀이 흥건했다.
차려진 음식이 식었을 때쯤에야 야안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그렇게 이야기를 마친 야안은 부르케산에게 조금 전 인벤토리에서 꺼낸 준비한 신검을 내어 주었다.
“이것은 칸에게 바치는 저의 작은 성의입니다.”
신검의 위세는 대단한 터라 저마다 눈을 두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부르케산은 이에 눈을 두지 않고 잠시 생각을 하다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며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나오라.”
이에 눈매가 날카로운 젊은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그가 바로 마토론산과 후계 자리를 두고 다투는 4왕자 페로톤이였다. 이번에 초원으로 이전의 꾀를 부린 이기도 했다.
그는 나이가 든 것 말고는 그 외양이 마토론산과 흡사하여 이들이 형제임을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페로톤은 칸의 지명에 서둘러 망토자락을 펄럭이며 칸의 앞에 나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칸은 신검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더니 그에게 신검을 앞으로 내밀며 명했다.
“너에게 명한다. 너의 일족을 꾸려 가휘지께서 이끄는 왕국에 합류하라.”
그 말에 페로톤의 눈빛이 어지러워지다가 이내 신검을 받으며 고개를 숙였다.
“명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명을 받아들이는 아들의 모습에 칸은 크게 입가에 호선을 그리다 야안의 자리에 앉아 그에게 술을 건네며 말했다.
“가휘지 그대 덕분에 걱정스러운 일을 덜었군. 고맙소.”
야안은 그간의 상황을 어느 정도 들었던 터라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고는 고개를 숙였다.
“칸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하하하. 위대한 영웅이 하시는 일인데 의기와 명예의 종족인 우리 종족이 힘을 보태지 않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구나 우리 종족이 그처럼 비참한 몬스터로 변모된다니 모르면 모르되 막을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바를 다 해야겠지.
북을 쳐라. 보기 드문 영웅께서 오셨는데 환영을 해야 할 것 아닌가?”
곧 요란하게 차려입은 태양종족의 여인들이 모습을 보이며 요란한 북소리에 춤을 추기 시작했고,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술자리는 끝이 났다.
이들 태양 종족들은 드워프들만큼이나 독한 술을 즐겼지만, 이미 초인의 경지에 오른 야안은 취기를 느끼지 못했다.
새로이 환골탈태를 겪게 되면서 육체는 한층 더 성장하였던 탓인데. 저마다 그런 야안에 큰 호감을 느꼈다.
이들은 많은 술을 마실수록 호기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저마다 다투어 술을 따라주느라 거하게 술을 마신 야안이었다.
술자리가 끝나자 밖에서 기다리던 시녀가 야안을 준비한 처소로 데려다 주었다. 앞서 가는 시녀를 보던 야안은 그간 느낀 점이지만 이들 태양종족의 여성은 남성과 달리 인간의 여성체와 상당히 흡사했다.
미적인 기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짙은 피부톤과 더불어 골격이 크고 그 신장이 상당하다는 것에 있다.
그간 보았던 평균 여성조차 야안이 비스듬히 올려보아야 했는데, 그것이 상당히 이질적이게 느껴졌다.
성에 자리한 귀빈실을 자신의 거처로 삼게 되었는데, 이름 모를 부드러운 몬스터의 가죽이 깔렸거나 창에 커튼이 달려있는 등 나름 신경을 쓴 듯한 흔적이 여기저기 보였다.
모처럼 맞는 손님이 인간이라 그에 맞춘 듯 보였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한쪽에 놓인 침대와 몇 가지 가구만이 다였는데 워낙 내어준 방이 넓은 탓에 한적해 보이는 것은 여전했다.
사방이 석변으로 되어 있는데다 동물의 기름으로 붙인 횃불이 켜진 한적한 방 한쪽을 보자면 연무장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이도 나름 좋군.”
어차피 초인의 벽을 넘어선 뒤부터 잠은 더 줄여진 상태였다. 숙취도 없었고 그간 이동하느라 제대로 검을 수련하지 못한지라 잘 되었다 싶었다.
심상으로 검을 익히는 것도 수련의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처럼 검을 잡고 수련을 하는 것만큼은 못 되었다.
인벤토리에서 전설의 검을 꺼내어 든 야안은 검식을 잡고 펼쳤다. 삼재검식에서부터 이십사수검법, 붉은 실을 펼치는 야안의 그 검에는 뇌전검법의 오의가 자리한 터라 삼재검식도 초일류의 검이 되었고, 아무렇게나 휘젓는 검에도 거암의 무게가 자리했다.
이후 뇌전검법을 펼치기 시작했는데 3초식에 들어서게 되면서 이제 검강에 념을 담는 것이 상당히 자연스러워진 상태였다.
마치 얇은 실이 검에 둘린 듯 검강을 조절한 것만으로도 신기이건만 거기서 끝이 아니라 검강을 완전히 통제한 덕분인지 기세가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
이전의 야안이었다면 그가 일으킨 검강에 곳곳에 자리한 횃불들은 이를 이기지 못해 꺼지고 단단한 석벽도 얇은 종이처럼 갈라졌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제 자유스럽게 초식을 펼쳐도 조금의 변화도 일지 않은 덕분에 야안을 누군가 본다면 그저 검 한 자루를 들고 검식을 연습하는 것으로 착각할지 모른다.
“후우~ 역시. 전설의 검으로는 한계가 있군.”
본래라면 검의 기세마저 지우고 자신의 기세도 지워내야 했다. 한데, 전설의 검의 존재감이 워낙 크다 보니 겨우 검강의 기세만을 지워내는 게 고작이었다.
더 할 기력은 충분히 있었지만 야안은 이쯤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자신의 방으로 곧 손님이 도착할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의 주술로 몸을 간단히 씻은 야안은 손님을 기다렸다.
“실례가 아니라면 들어가도 되겠는지요?”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는 그에 야안은 직접 문을 열어 그자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가휘지의 숙면을 방해한 것에 사과드립니다.”
“괜찮습니다. 어차피 잠도 오지 않았으니.”
야안의 방에 방문한 이는 다름 아닌 페로톤이었다. 후계자의 자리에서 지고 칸에게서 일족을 갖추고 야안을 따르게 된 그는 그 술자리에서도 별다른 말없이 자작을 하였을 뿐이다.
가장 먼저 술자리를 벗어난 것도 그였다.
당시에 머릿속이 복잡해 탓인지 눈빛이 흔들리던 그는 마음이 바로 섰는지 그 눈빛이 맑았다.
술에 강한 것인지 큰 항아리 하나를 홀로 비웠음에도 그에게서 술기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와 야안은 방에 자리한 몬스터의 가죽 위에 마주 걸터앉았고 다시 야안에게 예를 보이던 페로톤이 말을 꺼내었다.
“처음에는 칸의 그 명령에 가슴에서 불길이 일어났습니다. 하나 시간이 지날수록 진정 내가 되고 싶었던 것은 칸이었던가에 대해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휘지의 지난 행적들을 떠올리며 저는 스스로 환멸을 느꼈습니다.
또한 그제야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지요. 오래된 아집에서 비롯된 권력에 대한 욕망의 길이 접히니 제가 진정 원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가식에서 일어난 것일지라도 역사에 명예로운 자였다는 평을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표한 페로톤은 이내 자세를 바꾸어 군신의 예를 보였다.
“그런 속물적인 저이지만 부디 그렇게 되길 이끌어주실 수 있겠는지요.”
종족을 초월한 사내의 진심이 담긴 말에 야안의 가슴이 절로 울렸다. 야안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물론이네. 부족한 나이나 그대가 명예로운 자였음을 역사에 남기도록 돕겠네.”
야안의 그 말에 페로톤의 눈가에서 한줄기 물기가 긴 호선을 그리었다.
“그 말만으로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명하시면 불길이라도 뛰어들겠습니다.”
그의 뜨거운 충정에 야안은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의 얼굴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술 한 잔 더 하시겠는가?”
평소라면 그러지 않겠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취할 때까지 마시고 싶은 밤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의 시간이 지났다.
이제 태양종족에서는 야안을 모르는 이가 없었다. 이는 열흘 전, 그들의 칸인 부르케산과의 대전에 의해서였다.
이 친선대련은 열기가 크게 고조되기 전에 멈추어져 승자도 패자도 없었으나, 부르케산이 스스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함으로써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전사가 야안을 달리 보게 된 것이다.
대전사들이야 야안의 실력을 짐작하고 있었던 터라 칸의 패배를 예상했었지만, 전사들에게서 그것은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큰 충격이었다.
칸이라는 이름은 그들의 또다른 자존심이었고 명예였다. 한데, 그것이 꺾였으니 어찌 충격이 아닐 수 있겠는가?
그로 인해 전사들의 반응은 세 가지로 나뉘었다. 야안을 크게 두려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크게 분개하는 이도 있었으며, 그가 부족의 가휘지로 있다는 것에 크게 자랑스러워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강자로서 그를 존경하는 마음은 누구나 똑같았다.
칸을 꺾었다. 는 의미는 그만큼 컸던 것이다.
어느 정도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자 페로톤은 그때부터 자신의 일족을 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계의 자리에서 떨어진 자신이 만족할 일족을 꾸리기 위해서는 주군으로 모시게 된 야안의 이름값이 필요했다.
다행히 용맹한 전사들이 페로톤의 설득에 움직였고, 페로톤은 아우론이라는 대전사를 중심으로 삼백의 전사와 주술사 다섯, 그리고 그런 그들이 보호해야 할 가족 이 천이 함께하게 되었다.
야안은 그런 그들의 선택에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진실의 눈으로 그들을 파악하며 이들을 이끌어주었다.
워낙 그 지도가 뛰어난 덕분인지 일전을 코앞에 둔 시일을 앞두고 저마다 크게 성장할 수 있었다.
비단 성장한 이는 전사들뿐만이 아니었다.
주술사들 또한 한 단계 진보하게 되었는데, 체계는 달랐으나 그 기본적인 원리는 같았던 터라 이들의 주술에 비해 몇 단계 진보한 주술을 지니고, 또한 이들이 말하는 위대한 주술사에 비교해 부족함이 없는 야안이 가르침을 받았으니 이런 변화는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