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276화 (276/385)

야안 276화

야안에 대한 그의 신뢰는 높았다.

그것을 무엇이라 이야기해야 할까? 아니,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다. 현재 말 그대로 절망적인 적을 눈앞에 두었음에도 그의 그 신뢰가 흔들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자신에게 얻은 지난 경험을 통틀어 보아도 이처럼 누군가를 신뢰한 적이 있던가?

그와 함께하면 과연 전투에서 이런 기량을 발휘한 적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로 모든 기량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것을 느낀 것은 자신만이 아닐 것이다. 그와 함께 싸운 엘프들도, 거인들도, 모롤타도, 카사도, 드워프들도 그러했다.

그의 동료의 한 축이 되어 전쟁에 나설 때면 적당한 긴장감과 함께 모든 기량을 펼칠 수 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 전쟁은 지금쯤 뒤로 밀리기 시작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지금 넘쳐나는 기량을 간신히 억제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간신히 억제하며 저것의 정체를, 저 어둠의 망토의 약점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때에 모든 것을 쏟아 부을 것이다. 그것이 설령 내 목숨일지라도.

리트담이 느끼고 이종족들이 공감하는 이 기량의 정체는 야안의 리트담의 저서에서 얻은 제왕지기였다.

이 제왕지기는 동료와 자신의 힘을 전투에서 자신의 100% 발휘하게 하는 일종의 권능과도 같았다.

만약 리트담의 저서가 다른 자의 손에 들려졌고, 그가 그 같은 경험을 한다 할지라도 야안 같이 제왕지기를 얻을 수는 없었다.

이는 야안은 이방인의 혜택을 보는 자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애초 이 세계의 NPC들에게 통용되는 인과의 법칙과 이방인의 인과의 법칙은 달랐다.

이 권능은 눈앞의 리치왕 케르몬의 권능과 같이 절대적이라, 그 수에 제한되지 않는다. 야안이 인정하고 그도 야안을 인정할 때 나타나는 권능이었다.

그 말을 반대로 한다면 그만큼 그간의 시간 동안 야안에게 마음을 열고 인정한 이종족들이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는 말이 된다.

이 권능의 혜택을 본 자들로 인해, 지치지 않는 불사군단을 상대로 지금도 한 치의 물러섬이 없었으니.

불사왕 케르몬의 마법의 여파로 수많은 생명이 허무하게 죽어나갔고, 야안은 그들의 죽음 속에서도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이미 전투에 앞서 그는 이 정도의 상황은 마음을 잡은 뒤였다.

애초 이런 존재들을 상대로 죽는 이가 없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설사 모두 전멸하여도 지금의 상황은 이해가 가능하다.

애초 이들이 겪는 전투는 드래곤들이 나서야 하는 전투였고,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니.

고강한 하이엘프들에게 붙은 초인의 힘을 발휘하는 리치들의 수만 다섯에 고위 현자 비기너에 달하는 리치들이 다시 다섯이었다.

정령을 마스터한 하이엘프들이었지만, 역시나 그들을 뒤덮은 어둠의 망토에 의해 큰 피해를 주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었다.

비록 리치왕 케르몬의 어둠의 망토에 비해 그 권능이 미약한 편이었으나, 그래도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전력의 상승이 이루어졌다. 이는 방어를 생각하지 않은 공격에 그 모든 저력을 퍼붇을 수 있음을 말하니.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람, 땅, 물의 세 상위 정령들의 조합이 큰 힘을 발휘한다는 것에 있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들이라 할지라도 힘을 발휘하기 어려울 터이다.

다른 4명의 초인 엘프들 또한 초인의 힘을 발휘하는 리치 각 하나와 고위 현자 비기너의 리치 둘이 붙었다.

앞서의 하이엘프들이 그러했듯이 그들 또한 쉽게 승기를 잡기에 어려웠다.

그나마 검을 든 붉은 나비의 경우는 다른 초인 엘프들보다 나았다. 그가 이룬 경지가 다른 엘프들보다 앞선다는 것도 있지만, 검의 종주로서 의외로 기본적인 마법의 원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니, 기괴한 어둠의 마법이라 할지라도 그는 검의 종주로서 잘 대처하고 있었다. 더구나 지난 전쟁에서도 그러했지만, 이번 전쟁에서도 그의 기량은 최고조에 달해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초인 리치를 돕던 두 고위 리치 중 하나를 멸해 버릴 수 있었던 그는 그 기세를 바탕으로 몰아붙여 갔지만, 어느새 합류한 고위 리치로 인해 다시 백중세로 돌아갔다.

아니, 고위 리치 하나가 더 그에게 붙었으니 그는 기회를 찾기 전까지 방어에 치중해야 할 것이다.

붉은 노을은 분노하고 또 분노했다.

십만에 달하던 거인들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어느새 9만도 채 되지 않게 되었다. 함께 한 병력의 십 분의 일이 이 전장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들의 그 죽음은 전사로서 찬양받을 명예로운 것이었지만 붉은 노을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분노의 대상은 적이 아닌 바로 그 자신의 무능함에서 일어났다. 238년의 시간을 살아오며 스스로 노력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 그대로 준비된 전사였고, 훌륭한 지도자였다. 그것은 지금의 거인의 왕인 붉은 대지가 인정한 것이었고, 백만에 달하는 거인 전사들이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 돌아보며 한탄했다. 왕족이라는 명예에 취해 그 자신이 오만했던 것이 아닌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자신은 지금보다 더 발전한 모습을 않았을지. 그는 한탄하는 것이다.

그 맹렬한 회한 속에서 터져 나오는 분노는 무시무시한 것이었지만, 그것으로도 그는 만족하지 못했다.

그만큼 눈앞의 적들은 강했다.

마나를 이용한 거인의 방어술은 위대하다. 특히 대전사들의 마나 방어술은 검강이라 할지라도 쉽사리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데드인 죽음의 사기 따위가 그들의 육체를 위협했지만, 다행히 그들의 구조상 그 사기는 거인들에게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의 일백의 죽음의 기사들의 힘은 그 위대한 대전사들을 충분히 압도할 만한 성질의 것이었다.

대전사의 숫자는 겨우 스물 정도였으니 이 다섯의 죽음의 기사를 한 명의 대전사가 막아야 한다.

그야말로 초인을 뛰어넘는 전력이었다. 야안의 제왕지기의 영향을 받은 그들이라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벌써 2명의 대전사가 큰 상처를 입었고 그 외에도 많은 대전사들이 무리한 마나의 운용으로 크게 지쳐가고 있었다.

마나와 함께 하는 그들의 육체의 강도가 뛰어났기에 그나마 지금 버티는 것이었지만, 만약 다른 종족이었다면 버티지 못했을 터.

그 위기는 상급 전사들일수록 더욱 위태로웠다. 2,000에 달하는 상급 전사들이었지만, 오백의 상급 익스퍼트 경지에 자리한 죽음의 기사들과 어보미의 존재는 이들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나마 카사 종족과 모롤타 종족들이 거인들의 양옆을 받치고 있었으니 지금처럼 버티는 것이었지. 그것이 아닌 거인뿐이었다면 이미 전세는 크게 밀려났을 것이다.

그랬다. 의지가 꺾일만한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 고고한 자존심을 가진 붉은 노을이 비탄에 빠질 만큼. 끝없이 화산처럼 분노할 만큼 비탄의 연속이었다.

그때 그 일이 일어났다.

분노라는 거센 풍랑 속을 가르던 그의 정신이 크게 열리고 그의 붉은 육체가 갈라지며 그 속에서 눈부신 황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랬다. 그는 전장의 중심에서 벽을 넘어서고 있었다.

오직 왕의 혈족에게만 허락되는 위대한 전사의 경지에 발을 딛고 있었다. 그것은 긴 거인족의 역사에서도 없었던 일이다.

보통 300년이 지나 전대의 왕으로부터 빠르게는 50년 길게는 100년을 두고 가르침을 받아야 가능한 경지를 그는 스스로 힘으로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의 변화를 눈치채는 자는 없었다. 그와 가장 곁에 있던 대전사들마저 저마다 힘겨운 상황에 처해 있어 주위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또한 그 맹렬한 분노에 빠져 스스로 상태를 모르다 이내 목 근처에 자리한 그의 핵이 갈라져 진화의 순간에 올라선 뒤에야 그는 깨달았다.

‘콰아아앙-’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를 상대하던 죽음의 기사들은 물론 그의 반경 30미터에 달하던 모든 존재가 그 폭발의 영향에 몸을 뒤로 물려야 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 폭발의 중심에서 웅장하고 맑은 거대한 기운이 저 황금빛에 녹아 터져 나오는 것을 말이다.

‘우오오오!’

그것이 위대한 전사로서, 위대한 왕으로서 올라서기 위해 이루어지는 현상임을 알았던 거인들은 저마다 사기가 들끓기 시작했다.

육체의 상처가 심각해지고 마나의 소비도 커졌지만 희망의 등불처럼 전장을 밝히는 자신들의 위대한 주군이 있으니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주춤하던 그들은 더 거세게 몰아치기 시작했고, 그 분위기는 카샤 종족을 비롯해 모롤타 종족들까지 넘어갔다.

모롤타 종족의 왕인 카부사는 자신의 앞을 막는 죽음의 기사들과 어보미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리다, 저 멀리 위대한 전사의 탄생에 입가를 올렸다.

“다음 대 거인의 왕의 각성인가. 하하하. 이제야 해볼 만 하겠군.”

붉은 노을의 기세는 멀리 있는 이곳까지 전율이 흐르게 할 정도라 그는 절로 호기가 치솟았다.

카사 연합 족의 수장인 아톤은 그 스스로 상위 불의 정령 익스퍼트였지만, 그는 스스로 푸른 불꽃을 피어 올릴 수 있었고, 그렇게 피어올린 불꽃은 상위 정령에 못지않은 화기를 품었다.

그런 종족의 특성으로 인해 그는 상위 정령 마스터에 준하는 힘을 낼 수 있었다.

카사족은 새부리 구조의 입을 가진 터라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는 그를 보고 있으면, 마치 신화시대에서나 나오는 모든 것을 불태우고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마저 불태워 그 속에서 다시 부활한다는 불사조를 보는 듯하다.

불사군단이 일으키는 사기조차 그의 불길을 이기지 못해 물러설 정도였으며, 그의 힘이 지나친 곳은 불사의 군단조차 재생하지 못했다.

이들 카사족의 전투는 자르고 깨지고 부러진다는 개념이 아닌 모조리 태워버린다는 개념의 전투를 하기 때문이다. 하니 그들과 부딪히는 불사 종족들은 재생할 수 없는 잿더미로 변할 따름이다.

그를 필두로 15개의 소부족의 족장들이 뒤를 따랐고, 그 뒤로 이번에 참전한 3,000의 전사들이 함께 불길을 이루며 움직이고 있었다.

전사 중 정령과 계약하지 못한 이들은 2명의 스켈레톤도 감당하기 어려웠으나, 정령과 계약한 전사들은 능히 넷에 달하는 스켈레톤을 감당했다. 또한, 족장들도 어보미 둘, 셋은 감당하였을 뿐이지만, 대부족이자 현재 이들의 수장인 아톤은 홀로 능히 일천에 달하는 스케렐톤과 일백에 달하는 어보미들을 상대했다.

그야말로 그가 중심이 되어 진형을 이루는 것인데, 그가 워낙 득세를 이루자 엘프를 상대로 약간의 득세를 보이던 고위 현자 비기너에 달하는 리치 10명이 그를 상대하기 위해 움직였다.

고위 현자 비기너에 달하는 리치 10명이 그를 상대하자 그 끝없이 위세를 보이던 카사족의 진형도 멈추어 섰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결국 카사족 진형은 핵심은 아톤 그였고, 그만 잡으면 카사족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만약 처음부터 리치 10명이 그를 상대했다면 그 또한 해볼 만 한 일일지 모른다. 그 또한 야안의 제왕지기의 영향을 받은 자였으니.

하지만, 이미 상당수의 불사군단을 지우느라 그 마나와 정령력을 상당 소비한 그로서는 힘든 싸움만이 남을 따름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