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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280화 (280/385)

야안 280화

무로딘 산맥에 자리한 세계수는 이전과 달리 동행자와 함께하고 있었다.

보름 전 굵은 뿌리 주위에서 동행하게 된 그자는 반쯤 퇴색된 세계수의 잎사귀들로 감싸듯이 자리했다.

신령스러운 세계수의 힘에 보호를 받았기 때문인가? 사내의 얼굴은 혈색이 올랐고, 그 피부 또한 윤기가 흘러내린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숨을 쉬지 않아 마치를 시체를 보는 듯하다.

그때, 변화가 일어났다.

‘쓰으으읍. 하아아아-’

막힌 숨이 터진 듯 긴 호흡과 함께 그의 폐가 부풀어 올랐다. 동시에 그의 눈이 떠졌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숨을 쉬지 않은 자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의 눈은 형형롭기 그지없다.

‘여기는?’

궁금증을 띄던 그는 이내 이곳이 엘프들의 성소인 세계수의 영역임을 인지했다. 그 자신을 뒤덮은 것은 세계수의 잎이었고, 자신의 머리를 맑게 해 준 것은 세계수가 토해내는 청량한 기운이었다.

일어나니 아무것도 걸친 것이 없는 나신.

야안은 자신의 신체를 살피다 지난 전쟁에서 입은 흔적이 보이지 않음을 깨달았다. 당시 자신의 상태가 엉망이었던 것을 상기한다면 세계수의 힘이 회복에 큰 도움이 되었을 터이다.

신성 마법의 엘린과 성수가 같이 하지 아니하고서는 회복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

용솟는 듯한 힘에 주먹을 꽈악 쥐던 그는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 불사 군단의 기운에 중얼거렸다.

“전쟁은 승리한 것인가?”

얼마의 시간이 흘러간 것일까? 정보창에서 보름의 시간을 잠든다 했으니 그로부터 보름이 지난 것일까?

야안은 잠시 고개를 내젓고는 이내 인벤토리를 열어 옷을 꺼내 걸쳐 입었다.

누군가 이곳으로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기운은 그가 잘 아는 사람의 것이기도 했다.

‘휘이익-’

한줄기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것은 한 인영을 이룬다.

리트담이었다. 그는 야안의 의식에 주술의 인을 펼쳐 둔지라, 그가 깨어나자마자 단번에 이처럼 달려온 것이었다.

“불편한 곳은 없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야안은 미소를 보였다. 그것은 그가 리트담에게 묻고 싶었던 이야기였기도 했기 때문이다.

“괜찮습니다. 당시의 상태를 생각한다면 아무리 세계수의 정기를 받았다 해도 이렇게 회복되기는 어려웠을 것인데, 리트담 님께서 힘을 써 주셨는가 보군요. 감사합니다.”

그 말에 리트담은 큰일 날 소리를 들은 듯 크게 손을 저어대며 말했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야안 님이 아니셨다면 저는 이미 죽었을 목숨입니다.”

야안은 그런 리트담에 다시금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제가 무엇 한게 있겠습니까? 아리스 님께서 보살펴 주셔서 그런 것이지요.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 모르겠군요.”

부활과도 같은 소생을 하였던 만큼 야안의 걱정도 무리가 아닌지라 그는 작게 목례를 보이며 대답했다.

“오히려 신체뿐만 아니라 녹아내렸던 뇌 또한 완벽한 회복을 보였습니다. 그저 놀라울 따름이지요.”

“정말 다행입니다.”

진심 어린 야안의 안도에 리트담은 목메었다. 그의 말에서 야안 또한 자신이 그에게 마음 쓰는 것 못지않게 그 또한 자신에게 마음을 보인다 생각해서였다.

그는 그런 감정이 어색한 듯 고개를 털다, 품속에서 야안의 마법 주머니를 꺼내어 주었다.

“야안 님의 검과 옷이 안에 들어 있습니다. 사실 이 때문에 급히 온 것인데. 그 인벤토리라는 것에 여유의 옷이 자리한 모양이십니다.”

“하하. 마음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쟁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의 말에 리트담은 그 거칠고 지독했던 전장을 상기하며 이야기를 꺼내었다.

리치왕 케르몬이 죽은 뒤 불사 군단은 그 중심을 잃었지만, 여전히 강력한 전력을 이루고 있었다.

초인에 달한 리치는 여전히 아홉 모두가 건재했고, 고위 익스퍼트의 현자 또한 스물이나 자리했으며, 그 외의 리치들의 숫자는 오백이나 자리했다. 죽음의 기사의 숫자도 일천에 달했고, 스케렐톤 또한 십오만이 자리했고, 어보미도 이천이 넘었다.

그야말로 현 분열된 제국의 오대 세력 중 두 곳의 전력과 비등했던 것이다.

하니 승기를 잡았다고는 해도 피해가 없을 수가 없었다. 불사 군단 특유의 그 끈질긴 전투 능력은 상식을 뒤 넘는 수준이었으니.

리트담이 야안으로부터 회복을 한 것은 정말 천만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만약 부활하지 않았다면 연합군은 20% 피해를 더 입어야 했을 것이고,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었을 것이니.

그 이유는 야안이 정신을 잃으면서 그가 보인 제왕지기의 권능도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에 연합 종족은 절정에 달하던 기력이 꺾이며 전력이 크게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래도 승기를 잡은 덕분에 그 기세가 대단해 불사군단을 밀어붙이는데 어려움은 없었다.

그나마 거인족의 입장에서는 붉은 노을이 건재한지라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전장을 휩쓸고 있었다.

야안과 리트담의 그 고귀한 희생에 마음이 동해서일까?

붉은 노을은 더 이상 분노에 몸을 맡기지 않은 채, 진정한 위대한 전사의 힘을 보이며 날뛰었다.

마항력이 뛰어난 거인족 특성답게 그는 초인 리치 아홉 중 셋을 가루로 만들어 버리었으며, 그가 이끄는 거인 전사들은 오백의 리치를 절반으로 만들었으며 이천이 넘은 어보미들을 대지에 때려눕혔다.

그야말로 거인전사들 다운 힘이라 하겠다.

엘프 초인들은 자신을 견제하던 리치들이 전사들에게 가루가 되어 사라지자 드디어 그 강력한 정령의 힘을 전장에 퍼붓기 시작했다.

마치 천지가 개벽하듯 한 현상이 전장에 벌어졌다. 스케렐톤들은 타고 찢어지고, 부서지더니 이내 또한 압사당해 버리었다.

카사족 전사들은 수장 아톤을 중심으로 마치 거대한 불새가 움직이듯 날개짓을 하며 그 주위를 쓸어담았으며, 모롤타 전사들은 하나의 거대한 창이 되어 그들을 중심으로 질주하며 모든 것을 박살 냈다.

그 모든 일에는 드워프들의 강력한 화력지원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드워프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전장을 꾸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드워프들의 포신은 그들을 깨부수는데 염두를 두는 것이 아닌 이들의 진형을 일그러뜨리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승기를 가져가는 전장에 리트담이 있었다.

그는 단신으로 남은 초대형 몬스터 급인 죽음의 기사 스물과 상급 익스퍼트 급의 기사 삼백을 상대한 것이다.

거대한 강철의 괴물들이 모습을 나타냈고, 수십 개의 거대한 손이 대지 위로 보였으며 불길과 바람이 그들 사이를 찢어 놓았다.

그가 크게 한 걸음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압력이 이들을 압박했고, 그가 손을 내 흔들 때면 그들 중 하나가 지워져 나갔다.

꼬박 하루 밤낮을 전투를 벌였고, 그렇게 최종적으로 남은 자는 리트담 하나였다. 상성이 좋았던 것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 말도 안 되는 저력을 홀로 상대했다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었다.

당시 그의 전투를 보던 용감한 모롤타 종족의 왕 카부사는 그를 보며 전귀(戰鬼)라 말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물론 그 치열한 전투로 인해 리트담 또한 정상은 아니었지만, 그 정도의 부상은 탈인의 경지에 오른 그에게 치명적인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부러지고 탈골된 뼈는 순식간에 아물었으며, 찢어진 창자 또한 무서운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했다.

암흑 기운에 영향을 받아 썩어나가던 육체 또한 죽은 살이 떨어지고 새살이 나는데 그 과정이 너무도 빨라, 성수를 이용한 신관에게 회복을 받는 착각을 들게 한다.

그렇게 스스로 회복한 그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장을 향해 움직였고, 다시 하루가 더 지난 뒤에야 불사군단과의 전쟁을 끝낼 수가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여기서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았다.

그로부터 나흘이 지난 뒤에야, 거인의 왕 붉은 대지에게서 소식이 있었다. 그리고 그 소식은 희소식과는 거리가 먼 성질의 것이었다.

불사군단의 등장으로 인해 무로딘 산맥으로 피신하던 몬스터들의 대이동이 있었다. 한데 하필 피해 달아나던 몬스터들이 붉은 대지와 치열한 전투를 벌이었던 벨카의 영역에 들어서게 되었고, 곧 그 아래로 흡수되었다.

이로인해 크게 몰아 붙였던 거인족들은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을 생각지 못하고 너무나 깊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붉은 대지 또한 위험을 알아 군대를 물렸고, 그 당시에 입은 피해는 적지 않았다. 이후 본래의 배 이상의 세력을 회복한 벨카는 지금도 이들과 치열한 전쟁을 같이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위대한 전사로 각성한 붉은 노을이 이제 7만이 남은 전사들을 이끌고 합류를 위해 떠났으며, 함께 했던 연합 종족들 또한 최소한의 방어 병력을 남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안은 자신이 정신을 잃은 보름 동안 그 같은 일이 있었음에 짧게 신음을 흘리며 리트담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쯤 전장에 합류하였을지 모르겠군요.”

리트담은 오늘 오전에 엘프에게서 연락은 들은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순조롭게 진형을 다지고 나아가고 있다고 하니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더구나 거인들에게서는 붉은 노을 님과 같은 또 다른 위대한 지도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사기로는 일당백이라 칭해도 과함이 아닐 것입니다.”

그 말에 야안은 다행이라 생각하며 물었다.

“하면, 현재 이곳 진형에 남아 있는 분들이 누구입니까?”

“하이엘프이신 푸른 풀 님께서 자리하시고 계시며, 제가 그분을 보조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병력 10%가 자리하고 있으나, 불사의 군단에 의해 그런 것인지 이쪽으로 진격하는 몬스터 군단의 수는 많지 않습니다.

고작 많아 보아야 오천이 간신히 넘는지라 지금의 전력으로도 충분히 방어할 수 있다 보고 있지요.”

그의 말에 야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리트담과 함께 현재 이곳 진영의 연합군을 책임지고 있는 푸른 풀을 만나러 움직였다.

푸른 풀은 야안이 무사히 깨어난 것을 크게 축하를 하더니, 곧 그는 뜻밖의 기쁜 소식을 야안에게 주었다.

불사군단 이후 한숨을 돌릴 여유가 생긴 푸른 풀은 뒤늦게 엘프들에게 내려오는 기록들을 살피다, 야안이 찾고자 했던 페어리에 대한 기록을 찾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전대의 하이 엘프였던 분이 곤란에 처한 페어리를 돕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페어리가 하나의 증표를 남겼다고 하는 기록이었다.

그리고 이틀 전에야 겨우 증표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며 야안에게 내어주었는데, 확실히 여러모로 신비한 구석이 많은 페어리 답게 그 증표라는 것 또한 기이했다.

아니, 증표라고 하니 기이한 것이지 그것이 아니었다면 기이할 이유도 없었다. 그것은 길가에 흔히 볼 수 있는 돌멩이에 불과했으니.

사실 이 때문에 푸른 풀이 고생을 한 것이기도 하다. 설마, 증표로 이 같은 돌멩이를 내줄 줄은 그도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안은 곧 그것이 흔한 돌멩이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돌멩이를 받아들이자, 그에 대한 설명이 담긴 정보창이 그의 눈을 어지럽혔기 때문이다.

[페어리의 증표.

등급 : D

페어리들이 감사의 인사로 남긴 물건이다. 페어리의 특유의 숨결이 자리한 물건이기도 하다. 특별한 효과는 없다. 다만, 이를 지니고 있으면 홀로 몸을 숨기고 수양하는 페어리들이 그대에게 흥미를 느끼고 모습을 보일 가능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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