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79화
17. 1,000의 의미
“그만! 여기서는 내가 맡겠네!”
어느새 바람처럼 달려온 붉은 노을의 일갈에 리트담은 악귀의 현상을 한 채 피를 흘리며 웃었다.
“70배!”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비축했던 주술의 힘이 그 한 번의 일갈과 함께 터져 나왔다.
육망성의 주술로 인해 힘이 배가 된 그것은 일순간 리치왕 케르몬의 오망성이 금이 가기 시작했고, 붉은 노을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하아아압!”
‘끼아아아악-’
붉은 노을의 일갈과 동시에 그의 오른 주먹에 힘이 터지며 금이 간 오망성이 악령의 비명을 지르며 깨어졌다.
“이놈들!”
다가오는 붉은 노을에 리치왕 케르몬은 당황을 감추지 못한 듯 크게 일갈을 터뜨린다.
그는 그제야 리트담의 수를 깨달았다. 리트담이 노린 것은 애초 자신에게 피해를 주거나 시간을 버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그가 원한 것은 리치왕 케르몬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 그는 목숨이 끊겨도 부족함이 없는 상황까지 자신을 몰아친 것이다.
그리고 그 도박은 멋지게 성공하였다.
‘휘이이익-’
붉은 노을이 그 거대한 힘이 일렁이는 황금의 손으로 바란탄에 불타오르던 어둠의 망토를 찢듯이 벗겨내 버린 것이다.
애초 바란탄의 마법 자체가 초인에게 큰 힘을 못 쓰는데다 사마의 존재를 견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붉은 노을이 바란탄에 힘이 약해진 어둠의 망토를 벗겨 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모든 톱니바퀴가 정교하게 맞아떨어지면 그토록 기다리던 한 번의 기회가 왔다.
그리고 야안은 준비하고 기다리던 그때를 놓치지 않았다.
전설의 검에 자리한 뇌전의 기운은 지난 붉은 노을이 뱀파이어의 수장 악마 리켄을 지웠을 때보다 더 강렬하게 빛을 발휘하고 있었다.
온전하게 모든 비밀을 풀은 뇌전의 정화의 힘이 일어난 것인데, 그 거대한 힘에 대기 전체가 크게 뒤흔들렸고, 1km 반경에 자리한 모든 존재가 낙엽이 바람에 휘말리듯 덧없이 날려 쓰러져갔다.
그리고 야안의 모습이 시간의 연속성을 뛰어넘으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야안이 펼칠 수 있는 가장 신묘하며 가장 강력한 심연의 일격이 드디어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 힘의 정체를 알았던 리치왕 케르몬은 마법을 퍼부으며 뒤로 도망치려 했지만, 그로서도 야안이 펼친 심연의 일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마법이 부딪히는가 싶으면 어느새 야안은 그 뒤에 있거나 그를 넘어서 있었던 것이다.
“이질적…….”
리치왕 케르몬은 왜 자신의 주인께서 그를 보고 이질적인 존재라 했는지 그는 마지막 순간에 깨달았다.
곧, 야안의 전설의 검에 자리한 뇌전의 정화의 힘이 검은 뼈만 남은 그의 몸을 꿰뚫었고, 이내 거대한 뇌전이 천지를 뒤흔들어댔다.
‘콰가가가강-’
뇌전은 리치왕 케르몬을 지운 것으로도 모자라 발광하듯이 주위의 삿된 불사의 군단을 그대로 태워버렸다.
그야말로 그 힘은 격이 다르다. 하늘 밖의 하늘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지만, 그것을 끝으로 야안은 한계 이상의 힘을 발휘한 대가로 힘없이 털썩 떨어지게 되었다. 다행히 가장 가까이에 있던 붉은 노을이 몸을 띄워 그 거대한 손으로 야안의 육신을 받았다.
아직 리치왕 케르몬이 남긴 불사의 군단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었지만, 이미 그들의 수장이 죽은 이상 이 전쟁은 연합군의 승리라 할 수 있다.
붉은 노을은 이 위대하고 고귀한 자의 무게가 이토록 가벼울 수 있다는 것에 오는 몰아치는 격정에 몸을 떨어댔다.
다행히 이 위대한 존재는 의식이 있는 듯 힘없이 붉은 노을을 보며 말했다.
“저를 리트담이 있는 곳으로…….”
그 말에 붉은 노을은 그제야 그를 상기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발견한 리트담의 상태는 엉망 그 자체였다.
눈, 귀, 코, 입에서 꾸역꾸역 피가 터져 나오는 것이 그야말로 곧 죽을 징조였다. 붉은 노을은 조금 전만 해도 그 무서운 악마를 유린했던 그가 이런 모습이 되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그 거대한 무릎이 그 앞에 무너져 내렸다.
덕분에 붉은 노을의 손에서 나온 야안은 리트담이 있는 곳까지 기어가듯이 다가갈 수 있었다.
야안은 참혹한 리트담의 상태에서 그의 죽음을 짐작한 듯 고개를 저으며 절실한 마음을 담아 무겁게 입을 열었다.
“거룩하고 자애로운 아리스 님이시여. 부디 이 용감했던 어린 양을 위해 기적을 베푸소서. 이 위대한 자를 가엽게 여기소서. 이 고귀한 자를 살려주소서.”
그렇게 절실히 기도를 마친 야안은 이제 남은 40개의 스탯을 신력에 찍었다.
그리고 야안의 그 절실한 마음이 아리스에게 닿은 듯 기적이 일어났다.
‘화아아악-’
야안의 정수리에서 하얀빛이 일어난 그것은 어느새 야안의 전신을 휘감는다. 그 성스러운 빛 무리에 싸인 야안에 그와 가까이에 있던 붉은 노을은 넋을 잃은 채 중얼거렸다.
“아리스 님.”
그 성스러운 하얀빛이 절정에 다 달았을 때 그 빛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마치 조금 전의 현상이 거짓인 마냥.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생각했지만, 실상 큰 변화가 야안에게 일어났다.
[소마(soma)
신화시대의 언어로 소생을 뜻한다. 그대의 간곡한 마음이 이 잊힌 신성 마법을 불러들이었다.
* 숨이 자리한 자라면 그 상태가 어떤 상태라 할지라도 본래의 모습으로 소생케 한다.
* 이를 펼친 자는 그 대가로 보름간 죽음과 같은 무력함과 함께 잠에 빠진다.
* 일 년에 단 한 번 펼칠 수 있다.]
그야말로 지난 드래곤이 스스로 펼친 절대마법인 바호핀을 뛰어넘는다. 드래곤의 전용마법인 바호핀은 대현자 테무드도 그 반발력에 평생 몇 번 펼치지 못했던 절대마법이다.
그런 바호핀도 60%의 회복이 고작인데, 이 소마는 그야말로 숨이 붙어 있는 자라면 본래의 모습으로 소생케 한다니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아! 감사하나이다. 아리스 님이시여.’
그는 충만해진 신력을 가슴 깊이 느끼며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죽음을 향해 흘러가는 리트담의 머리에 손을 올려 중얼거렸다.
“소마.”
그 짧은 한 마디가 보여준 변화는 과연 놀라움 그 자체이다.
아니, 기적이라고 해야 할까?
별다른 빛도 아무런 마나의 흐름도 없건만, 오공에서 피를 흘리던 리트담의 안색이 변하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터져 나오던 피는 멈추었으며, 하얗다 못해 파랗게 변해가는 그의 안색에서 혈색이 돋아 올랐다.
마지막 주술을 통째로 펼치느라 그 매개체의 역할을 했던 미라의 그것처럼 보잘것없이 되어버린 두 팔은 어느새 피가 오르고 근육이 재생되며 살이 올랐다.
하지만, 가장 기적적인 것은 그의 뇌였다.
녹아내린 듯한 뇌는 이미 끝장이 난 상태였다. 그야말로 의식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기적처럼 회복되고 있었다.
인간의 영역 중 가장 신비롭고 복잡한 구조를 가진 뇌는 아무리 대량의 성수가 있고 뛰어난 신관이 있다고 해도 회복하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위대한 드래곤의 절대마법인 바호핀이라 해도 완벽한 회복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한데, 그 뇌가 마치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듯 회복하고 있었다.
한없이 안정적인 상태로 돌입했다. 전장에 나서기 전의 리트담의 뇌는 무리한 성장을 위해 이미 한 차례 혹사시켰으니, 그는 전장에 나서기 전보다 더 안정적인 뇌구조를 가졌다고 보아야 할 터이다.
그렇게 마지막 뇌의 부분까지 회복을 시킨 야안은 그 신령스러운 힘에 크게 감동받으며 뒤로 천천히 무너져갔다.
소마 그 위대한 신성 마법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 * *
야안이 의식을 잃고 뒤로 넘어지는 것을 본 붉은 노을은 깜짝 놀라 앞으로 다가갔다. 위대한 자가 허물어진 것에 놀라서였고 하여 그는 위대한 전사에 오르면서 깨달은 권능으로 야안을 살폈으나 그 상태는 그라 해도 이해할 수 없었다.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었다. 마치 잠을 자고 있는 것 같은데, 그도 아니다. 숨조차 쉬지 않으니 생명체라면 죽은 것이라 해도 무방할 일인데, 신체는 살아 있음을 증명하니 그야말로 기사(奇事)였다.
한데 더 놀라운 일이 생겨났다.
조금 전 분명 죽음을 향해 달리던 리트담이 의식을 차리고 일어서는 것이 아닌가? 붉은 노을은 그제야 야안이 무언가를 행했고, 그것으로 그가 살았으며, 그 대가를 지금 치르고 있음을 알았다.
“아~ 그대는. 그대는 어찌.”
희생. 숭고한 희생에 망설임이 없었다. 이처럼 명예로운 자가 어디 있는가?
붉은 노을은 이 같은 위대한 자가 자신과 친구의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 영광스럽기까지 했다.
의식을 차린 리트담은 자신이 살아난 것이 믿어지지 않는 듯 멍하니 자신을 살펴보았다.
죽은 피의 흔적들에서 자신이 얼마나 위험한 상태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육체는 물론이거니와 녹아내리던 뇌 또한 전투 전보다 완벽하게 본래의 위세를 되찾은 상태였다.
‘어떻게……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믿어지지 않는 기적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 자신과 가까이에 있는 붉은 노을의 음성에 겨우 정신을 잡았다.
그리고, 그는 리치왕 케르몬이 결국 소멸했음을 인지했고 가까이에 야안이 죽은 것처럼 쓰러져 있음을 발견했다.
‘휘이익-’
마치 바람과도 같이 사라지던 그는 어느새 붉은 노을의 옆에 자리했다. 격정에 그의 얼굴은 한없이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는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입에서는 함루어가 어지럽게 흘러나왔으며 그의 양손의 검지와 중지에서는 푸른 빛이 찬란하게 빛났다.
배꼽을 중심으로 두 손을 올린 그는 천천히 양손을 벌리며 야안을 살폈다. 그의 정확한 상태를 알기 위해 행한 것인데. 워낙 그 상태가 이해되지 않았기에 그 또한 한동안 그 자세를 유지해야 했다.
하나, 위대한 자를 뛰어넘어 탈인에 오른 그인 만큼 그는 곧 무엇이 잘못되었음을 인지했다.
“생명에 지장은 없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만약 당신께서 고작 저 때문에…….”
리트담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가가 찢어져 피가 터져 나왔지만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격정에 정신이 팔려 해야 할 일을 깨달았으니 말이다.
그는 회복된 주술을 기반으로 몸의 회복을 도왔다. 단숨에 다섯 개의 주술을 중첩하여 펼치었고, 곧 무리한 힘을 끌어낸 대가로 쇠약해진 야안의 신체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워낙 큰 힘을 감당한 터라, 두 번의 탈태환골을 겪었던 강철 같은 야안의 육체도 상당한 회복의 시간을 보여야 할 것이다.
리트담은 급한 불을 끈 듯하자, 이내 주술을 펼쳐 육각형의 수정 형태에 야안을 담았고, 대지를 내리쳐 거대한 강철 괴물을 소환시켜 이를 보호하게 했다.
잠시 야안을 바라보던 리트담의 눈빛이 확고해지면서 그는 붉은 노을에게 고개를 돌렸다.
“야안 님의 희생으로 간신히 얻은 승기입니다. 이 전쟁을 어서 끝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리트담의 말에 붉은 노을은 그 거대한 육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확실히. 타락한 자들에게 안식을 되돌려 주어야겠지.”
“먼저 가겠습니다.”
말을 끝내기 무섭게 리트담의 신형이 대기에 녹아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의 신형은 저 멀리 전장에 중심에 가 있었다.
등장하기 무섭게 아홉 개의 불줄기를 일으키고 거인들을 일으키는 등의 위용을 보이었는데, 붉은 노을 또한 질 수 없다는 듯 대지를 박차는 그의 걸음은 점차 빨라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