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86화
‘무엇으로 증명할 것인가?’
잠시 생각하던 야안은 그의 그 기이한 재주를 상기하여 인벤토리에서 전설의 검을 꺼냈다.
“……!”
그에 넷은 크게 놀란 모습을 보였는데 그 놀라는 형상이 기이하다. 그의 놀람은 인벤토리의 존재보다는 야안의 검에 대한 놀람이었다.
야안 또한 그것을 눈치챘고, 넷은 한참 동안 그 검을 보며 말문을 잃다 천천히 고개를 올려 야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번 대의 계승자인가?”
그가 묻는 바를 아는지라 고개를 끄덕이던 야안은 진실을 이야기하였다.
“넷이 말씀하시는 계승자라는 것이 전설의 현자를 뜻하는 것이면 맞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시간이 아닌 천년이 지난 뒤의 계승자입니다.”
넷은 야안의 말에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저어대었고, 야안은 다시 말을 덧붙였다.
“백 년 뒤 죽음의 지배자가 모습을 보이게 됩니다. 이후 모든 이종족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며, 저의 시대에는 인간만이 자리할 뿐이지요. 그렇게 천년이 지나 죽음의 지배자를 막으신 위대한 대현자 테무드의 유산을 찾으시던 저의 스승님 마론 현자님으로부터 이 전설의 현자와 관련된 보물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후 드래곤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분께서 죽음의 지배자의 저주를 풀기 위해 저를 천 년 전으로 저를 보내주셨지요.”
그렇게 말을 한 야안은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사실과 크로노스의 마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였고, 넷은 야안의 말에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인과가 뒤틀린 것이 모두 이해가 되네. 이 시대에는 전설의 현자가 세상에 나올 수 없네. 그것은 죽음의 지배자 또한 마찬가지이지. 본래라면 지금 모습을 보여야 할 시대이건만.”
무언가 거대한 역사의 뒷이야기를 알고 있는 넷에 야안은 혼자 중얼거리는 그에 조심스럽게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설명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에 넷은 잠시 골똘하게 생각에 빠지더니 이내 야안을 보며 물었다.
“그대가 설사 전설의 현자라 할지라도 많은 제약이 자리한지라. 다만, 이방인이라는 것이 변수가 되는 듯해 괜찮다면 자네를 살펴보아도 되겠는가?”
그 말에 야안은 이 진실에 대한 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긍정을 보였다.
“물론입니다.”
“하면, 놀라지 마시게. 음~ 오랜만이라 조금 시간이 걸릴지 모르겠군.”
하며 혼자 중얼중얼 거리더니 그 작은 손으로 야안의 손을 잡는다. 마치 어린아이 손같이 부드러운 촉각을 지니었다 생각한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넷의 신체가 줄어들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아이 머리 크기가 되다, 엄지손가락 크기로, 다시 점차 줄어 개미보다 작아지더니 이내 그 자취를 감추고 만다.
본래 기감으로도 느껴지지 않았던 존재였으니, 육안으로도 보이지 않자 그야말로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탈인에 경지에 올라 온갖 기이한 주술을 펼치던 리트담조차 이런 힘은 처음인지라 잠시 말문을 잃다 고개를 저어댄다.
“정말이지. 이 페어리라는 종족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 힘의 근원도 알지 못하겠거니와, 과연 제가 이 존재를 만나고 있는 것이 현실인지도 의심스러울 지경입니다.”
그 말에 야안 또한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 또한 그러하네. 하나, 저기 비워져 있는 와인병을 보세나.”
어느새 와인병은 자신의 모습으로 찾은 뒤였는데, 이미 안의 와인은 비워진 지 오래였다. 흘린 구석도 없었고, 자신과 리트담이 먹은 흔적도 없었다.
하면 그가 먹은 것이니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일이다.
리트담 또한 야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았지만, 그래도 답답한 심정에 다시금 고개를 저을 뿐이다.
그도 그럴만한 것이 탈인에 경지에 오른 뒤 그의 인지에서 숨을 수 있는 것이 없건만, 이처럼 대놓고 인지하지 못하는 존재가 있으니 그로서는 그 굳건한 의지가 뒤흔들릴 만한 일이었다.
어느새 모닥불은 마지막 불씨를 남기며 꺼졌고, 저 멀리 동이 터 오르기 시작했다. 하룻밤을 꼬박 샌 것인데, 그럼에도 이 페어리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로 움직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잠시 말없이 기다리는데 잠잠히 자리하던 유피테르가 야안의 몸에서 쑤욱 튀어나오더니 넷과 함께 모습을 보이었다.
모습을 보인 넷은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그의 이마에 자리한 세 번째 눈도 감겨진 채 몸이 축 늘어진 것이 무슨 일인지 몰라도 제법 큰 고생을 한 모양이다.
그런 넷을 바라보던 유피테르는 고개를 저어대며 혀를 찬다.
“쯧. 잘못하면 둘 다 위험할 뻔했군.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지를 않으니.”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터라 야안은 유피테르를 바라보며 물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 말에 유피테르는 그 특유의 오만한 어투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지만, 저 녀석 너의 근원에 대해 다가가더군. 아니, 정확히는 너의 인과의 법칙이 자리한 곳을 살펴보려 한 것이 말이 될까? 여하튼 그런 일을 벌이는데 문제가 생겼지.
사실 너의 인과의 법칙은 다른 존재와는 달라. 사실 같다면 지금의 너 같은 녀석이 나타날 수가 없지. 드래곤이라 해도 너의 인과의 법칙만 할까? 이 녀석은 그것을 몰랐던 것이지. 아니, 확인하고 싶은 것인가?
네 녀석의 그 인과에 빠져 휩쓸려 그 존재가 사라질 뻔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뭐하나 싶어 살펴보던 나는 재빨리 잡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겨우 녀석을 끌고 나온 것이지.”
야안은 인과의 법칙에 살펴보려 했다는 넷에 그저 놀라워할 따름이고, 그것은 리트담도 마찬가지였다.
반나절이 지날 때쯤 되어서야 넷은 깨어났다.
많은 힘을 소비한 듯 지쳐 보였는데, 넷은 깨어나자마자 유피테르를 보며 몸을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설마, 위대한 정령의 왕이신 유피테르 님을 제 대에서 보았을 줄은 몰랐군요.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이내 야안에게 말을 꺼냈다.
“아주 잠시였지만 그대의 인과를 볼 수 있었네. 그래, 그대라면 그 제약이 크지 않을 터 몇 개의 진실을 말해 주어도 상관이 없겠군. 다만 조건이 있네.”
“그것이 무엇입니까?”
야안의 물음에 넷은 리트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자는 들어서는 안 되네. 아니, 저자뿐만 아니라 그대는 누구에게도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지도 말아야 하네. 약속할 수 있겠는가?”
그 말에 야안은 리트담을 바라보았고, 리트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목례를 보이며 감사를 표하던 야안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약속하겠습니다.”
‘휘이이잉-’
그 말과 함께 리트담이 그 자취를 감춘다. 만약을 위해 자신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알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사라진 것이다.
리트담이 사라지자, 넷은 곧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바는 놀라운 것이었다.
만 년 전 세 번째 현자인 자이웅은 자신이 전대와는 달리 죽음의 지배자를 상대할 조건을 갖추지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래도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있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하나 그와 죽음의 지배자의 전투는 생각 이상으로 길어져 갔고, 그 피해는 상상을 뛰어넘는 대재앙의 시작이었다.
자이웅은 이러다가는 세상이 다시 재기하기 어려울 지경까지 가게 될 것을 깨달았다.
설사 이번 대에 자신이 죽음의 지배자를 봉인한다 할지라도 다음 대의 전설의 현자가 그를 상대할 수 있는 배경이 만들어지지 않음을 이야기한다.
결국 자이웅은 금지된 방법을 펼쳤고 그 금지된 방법은 다름 아닌 죽음의 지배자를 자신의 인과에 묶는 방법이었다.
이 방법은 죽음의 지배자도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결국 봉인이 되었지만, 자이웅도 생각하지 못했던 것은 죽음의 지배자의 마지막 저주였다.
이 때문에 그는 7년의 시한부 인생에서 죽음과도 같은 고통에 휘말리게 되었고, 결국 새로운 힘을 만드는 것은 포기한 채 그저 주술의 끝을 내는 데 시간을 투자하였을 뿐이다.
다행히 그의 뜻을 이어 주술 제국이 만들어졌지만, 천년을 채 가지 못한 채 그 전성기가 끝이 나고 만다.
자이웅의 이 금지된 방법이 아니었다면 본래 지금의 시대에 다시 전설의 현자가 모습을 보이고 죽음의 지배자가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인과가 뒤틀리게 되어 드래곤은 여전히 잠에 빠지게 되었고, 전설의 현자는 자연히 나타나지 못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죽음의 지배자는 그 비틀린 인과를 헤집고 일부의 힘을 보여 천 년 전 악귀로 그 배경을 만들어 내었다.
다음 대의 전설의 현자가 탄생하지 못하게 할 거대한 계획의 배경을.
거기까지 이야기를 들었던 야안은 침음을 흘린다.
과거에 그러한 진실이 있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잠시 말문을 잃어버리는데, 넷이 고민하다 말을 이었다.
“죽음의 지배자가 모습을 보인다고 하였나?”
“네. 그렇습니다.”
그 말에 넷은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는 만 년 전의 모습은 아니었겠지. 아무리 그라도 그 금지된 인과의 법칙에 자유로울 수는 없을 테니까? 사실 그의 힘이 반만 세상에 보였더라면 이미 세상은 끝이 난 거나 다름없었을 것이네.”
야안은 반박할 수 없었다. 그가 만났던 악마인 리치왕 케르몬만 해도 어떠한가? 그의 악마 중 하나였을 뿐이건만 대재앙과도 같은 힘을 보이지 않았던가?
만약 리트담을 만나지 못하거나 이종족들과 동맹을 맺어 싸우지 않았다면 자신의 죽음은 물론 이 바 대륙은 피로 물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대현자 테무드의 위대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아무리 그 힘의 일부에 불과하다지만 그러한 권능을 일으키는 죽음의 지배자를 결국 봉인하는데 성공하였으니.
야안이 물었다.
“리치왕 케르몬은 악마 중 어느 위치에 자리한 자입니까?”
그 말에 넷은 신기하다는 듯 야안을 바라보며 묻는다.
“그 저주받은 악마를 알다니 신기할 일이군.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물어도 되겠는가?”
넷의 말에 야안은 지난 리치왕 케르몬과 그가 이끄는 불사군단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었다. 그 말에 넷은 당혹한 모습을 보이다가 이내 웃음을 흘린다.
“하하하. 믿어지지 않는군. 그 간교한 저주받은 지배자가 그런 판단을 했다니. 도대체 무엇 때문인 건가?”
그는 처음에 기분 좋은 듯 낭랑하게 웃음을 흘리다 이내 그 연유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야안을 바라보고는 신음을 흘린다.
“어쩌면 자네 때문인지 모르겠군. 그로서는 그 악마를 부활시킨 것은 지금의 제약 속에서 큰 변수를 낳게 되는 일로, 그야말로 상당한 무리를 한 셈인데.”
그러며 이마에 자리한 눈이 몇 번 끔뻑거리며 무언가를 생각하다, 이내 야안의 물음을 상기하고 답해주었다.
“아, 그래. 리치왕 케르몬은 악마들 중에서 다섯 번째에 속한 자이지. 그 개인의 힘도 대단하나, 그가 지닌 권능인 불사의 군단을 일으키는 능력은 다섯 번째에 속하게 하고도 남는 일이네. 하지만 이는 권능을 함께 했을 때의 능력을 말하는 것으로, 실상 개인적인 힘만을 따진다면 그 못지않은 악마들도 적지 않네.”
리치왕 케르몬 못지않은 힘을 지닌 악마가 아직도 최소 넷은 더 있으며 그 못지않은 악마들이 적지 않다는 말에 야안은 혀 안이 껄끄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