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37화
그렇게 사내와 그 일행들은 다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던 그의 보금자리에 머물렀다.
‘끼이이익-’
‘아하하하. 당신 이제 온 거야.’
너무도 착하고 예뻤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들려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설픈 솜씨로 새로운 요리에 도전한다고 천장을 태워 먹은 흔적이 남은 것을 바라보던 사내는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
“정말이지 너희는 하나같이 힘이 좋은 아이들이였지. 그녀는 그런 너희를 통제한다고 힘겨워했단다.”
그런 사내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중년의 사내들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내의 그 말과 함께 자상하고 따뜻했던 어머니의 그 모습들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지막 너무도 어이없이 죽음을 맞이했던 어머니의 모습 또한 그 뒤를 이었기에 이내 그들의 미소는 사라지고 말았다.
사내는 이곳에서도 아쉬움과 회한이 가득한 눈물을 보이더니 어렵게 그 집을 나섰다.
그렇게 그들은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몇 명밖에 알지 못한 비밀공간이자 수련 공간이기도 한 폐쇄된 던전까지 간 뒤에야 그들은 오래된 장원의 한 쪽에 있는 무덤가에 들어섰다.
사내, 야안에게 너무도 익숙하면서도 그리운 이름들이 적힌 그 무덤들 앞에서 주저앉은 야안은 한참 동안이나 멍하니 바라보다 곧 몸을 일으켰다.
“미안하구나. 너희에게 정말이지.”
야안의 말에 중년이 된 아들들은 이내 고개를 저어댔으나 야안의 착찹한 마음은 쉽사리 가시질 않는다.
야안 제국이 카이엘 제국과 숙명적으로 싸워야 할 이유는 대외적인 것 이외에도 더 있었으니 바로 카이엘 제국에 의해 베론 마을이 사라진 것에 있다.
그 속에는 야안의 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그의 장인장모님 그리고 그의 아내 멜리나 등 수많은 지인이 그들의 공격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당시 왕국이던 시절 야안 왕국의 심상치 않은 기세를 꺾기 위해 제국이 우회하여 당시 중심지였던 마크 영지를 친 것인데, 다행히 늦지 않게 정보를 입수해 큰 피해 없이 막는 데 성공했으나 그들에게 있어 너무도 중요한 사람들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때의 일은 아론과 로뎅에게 있어 두고두고 후회하고 있는 일 중 하나였는데, 만약 그때 제국의 교란에 속지 않았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으로 판단해서였다.
야안도 그 이야기를 듣고 아쉬움을 쉽사리 감추지 못했다.
“결국, 전쟁인가?”
바 대륙의 통일을 앞두고 일으키는 전쟁이니만큼 숱한 인명과 물적 피해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사랑하는 지인들을 죽인 적들과 같은 하늘 있을 수는 없는 법이다.
야안은 되도록 전쟁을 기피 할 방법을 노리려 했으나, 결국 할 수밖에 없게 된 상황에 놓이게 되자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로 결심을 내렸다.
그립고 그리웠던 고향을 떠나는 그의 발걸음이 유난히도 씁쓸하게 느껴진다.
야안은 제국의 재능이 있는 이들을 비롯해 오랫동안 벽에 부딪혀 허덕이는 이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분야는 상관없었다.
검, 마법, 정령, 주술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의 인재들을 모으기 시작했는데, 확실히 신분과 상관없이 오직 재능과 인성을 보고 뽑은 자들이라 그런지 야안의 생각보다 그 기준을 넘어선 자들이 적지 않았다.
아무리 제국이라고 하지만 그 숫자가 3,000명에 달했는데, 야안은 그중에서 우선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자들 1,000명을 가려 뽑아 그들을 황성으로 불러드렸다.
‘웅성웅성.’
야안 제국의 모든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야안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는 것에 모여든 여러 분야의 인재들은 들뜬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듣기로 마법은 대현자에 다다랐을 뿐 아니라, 검, 주술 또한 초인에 올라섰으며 정령술 또한 그에 부족함이 없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아리스 님의 뜻을 이은 성자라 하니 그 모든 것을 이룬 존재를 아니, 마주하고 싶은 자 없을 터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커지는 가운데, 문이 열리며 황실의 시종이 모습을 보였다.
“태 황제 야안 님께서 입장하십니다. 경의(敬意)를 표하시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웅성거리는 소리는 순식간에 뚝 끊기더니 이내 그들은 일제히 몸을 크게 낮추며 예를 보였다.
저마다 할 수 있는 최대의 예를 보이는데 그 모습이 실론 장관이다.
그리고 곧 붉은 카펫이 깔린 위로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야안이었고, 그는 고대 시대 이전부터 해오던 현자의 복장을 한 상태였다.
금색 실이 테두리에 박힌 하얀 로브에 붉고 푸른 천을 곁쳐 입었으며 한 손에는 현자의 지팡이를 쥐고 있는데 이는 최초의 인간이자 현자인 라블랑카스가 주신 아리스에게 의식을 치르기 전에 했던 복장이기도 했다.
“카이엘 제국과의 전쟁은 앞으로 험난한 가시밭길을 예고하는 작은 언덕이라, 이를 대비하여 그대들을 이끄노니 부디 가르침을 잘 따르기 바란다.”
그 말과 동시에 현자의 지팡이에서 빛을 발하는데, 그 빛에 절로 눈이 감기는 것을 참지 못하는 자가 없었다.
그 환한 빛이 사그라지고 사람들은 놀람을 감추기 어려웠는데 이는 그들 자신이 괴기한 곳에 있음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하얀 세상은 그렇다치더라도, 이 미친 듯한 마나의 밀도는 무엇이던가?
그저 놀랍고 놀라워 당황스러워하는 가운데 야안이 소리쳤다.
“이곳은 태초의 공간. 세상이 만들어지기 이전의 공간이로다.”
태초의 공간이라는 말에 몇몇 나이든 고위 현자들이 수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옛 고문헌에서 가끔 등장하던 공간을 실제로 자신이 접촉할 줄 예상 못 해서였다.
야안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곧 다시 정신을 집중해 룬을 읊기 시작했고, 곧 태초의 공간의 그 미친듯한 마나가 야안의 지팡이 주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태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그 마나의 폭풍에 경악하는 가운데 어느 순간의 기점으로 마나는 야안의 내뱉는 룬의 언어에 의해 재배열하더니 곧 엄청난 대마법이 펼쳐졌다.
‘구구구궁-’
현자의 탑을 소환한 것인데, 엄청난 넓이를 시작으로 끝없이 올라오는 현자의 탑은 도무지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는다.
‘또각. 또각-’
무거운 적막이 도는 그 가운데 야안이 천천히 걸음을 나아가더니 거대한 현자의 문에 손을 올렸고 이내 푸른빛을 발하며 현자의 문이 대기를 일렁이며 열려졌다.
“현자의 탑이여 이들을 허락하노니 그들을 이끌어라.”
야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자의 탑 곳곳에 하얀빛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그 빛줄기들의 숫자가 야안이 데려온 사람들의 숫자와 꼭 같았다.
그 빛줄기와 접촉하기 무섭게 사람들은 현자의 탑으로 사라져갔는데, 순식간에 그 일대를 채운 사람들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렇게 그들을 현자의 탑으로 밀어 넣은 야안은 어딘가 좀 지쳐 보이었는데, 이는 현자의 탑이 야안 그의 일종의 심상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후. 부디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쿠우우웅-’
그리 중얼거리던 야안은 곧 현자의 탑 앞에 현자의 지팡이를 대지에 내 꽂았다. 그 거대한 울림이 끝없는 태초의 공간을 가득 채우듯 퍼져가기 시작했다.
저 멀리 사라져가는 충격음 사이로 야안은 룬 언어를 내뱉으며 가부좌를 틀었고, 곧 푸른 빛이 그 거대한 현자의 탑을 감싸기 시작했다.
그 장엄한 그 광경을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야안의 등장에 의해 가장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은 역시나 야안 제국과 마주치고 있는 카이엘 제국이었다.
더 이상 이대로 두었다가는 야안 제국에 먹힐 가능성이 높아 여러 계획 아래 번번이 시비를 걸던 카이엘 제국이었지만 야안의 등장에 그 모든 계획이 중지된 상태였다.
이는 40년 만에 나타난 그가 대현자에 올라 서 있다는 소문 때문이다.
당연히 카이엘 제국에서는 그 소문을 처음 접했을 때 헛소문으로 전락시켰으나 이내 그것이 헛소문이 아님을 간자를 통해서 확인되었다.
“말도 안 되는구나. 제국은 이렇게 끝이 나고 마는가?”
물론 현 카이엘 제국이 가지고 있는 전력이 만만치 않은 만큼 아무리 야안이 있는 야안 제국이라고 해도 섣불리 전쟁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지만, 그렇기에 더욱 무서운 것이었다.
그들이 전쟁을 선포한다는 것은 카이엘 제국을 압도적으로 이길 자신이 있다는 것일 테니 말이다.
카이엘 제국의 황제 피르망은 이제야 겨우 두 형님과 아버지의 망령을 떨치는 가운데, 이 같은 고난이 다시 눈앞에 있다는 것이 믿겨 지질 않았다.
“이렇게 이 위대한 제국은 나의 시대에서 끝이 나고 마는 것인가?”
하기야 너무도 많은 시간을 지존의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었다.
조금이라도 여력이 있을 때 대륙을 정복하여야 했을 것인데 그러지 못한 선대들이 너무도 원망스러웠으나, 그때는 또한 그것이 최선이라 판단했던 터라 그는 아쉬운 마음을 접었다.
고독한 그의 마음처럼 황제의 집무실 또한 어둡고 또 어두웠다.
벌써 며칠째 햇빛을 보지 않고 있었던 것인지 그는 이제 감이 잡히지도 않았다.
그렇게 낙심하는 가운데, 불쑥 어둠에서 회색빛이 일렁거리었다.
피르망은 갑자기 일어난 회색빛에 놀라 당황했으나 이내 그 허리춤에 자리한 검을 꺼내 잡고 그 날을 세웠다.
“누군가? 감히 이 신성한 곳을 더럽히는 자가.”
초대 황제 카이엘이 제국을 세우며 그 마지막 깨달음의 정수를 남겼다는 전설이 있는 황제의 집무실에 누군가 들어섰다는 것에 황제 피르망은 분노의 일갈을 토해낸다.
마나가 담긴 그 일갈은 실로 무시무시해 집무실은 물론 황실 전체를 흔들기에 충분하였다.
하니 당연히 그를 호위하는 피의 기사들이 달려와야 할 것인데, 어째서인지 그들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일이 틀어졌음을 알았으나 역시나 수많은 피를 뿌리고 그 자리에 앉은 자답게 피르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은 채 어느새 회색빛 속에서 나타난 인영에게 묻는다.
“그대는 누군가?”
그의 말에 마치 그 인영은 바람앞의 불꽃처럼 흔들리다 이내 뚜렷해지더니 곧 섬뜩할 정도로 아리따운 한 여인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피의 군주 라켄. 잘생긴 그대의 고민을 해결해 주려 왔지.”
교태 어린 여인의 모습은 뭇사내라면 능히 혼을 빼놓기 부족함이 없었으나 역시나 철혈의 황제답게 피르망은 흔들림이 없었다.
“짐의 고민을 해결하겠다고?”
궁금증을 보이는 피르망에 스스로 피의 군주라 일컫는 라켄의 눈이 반달을 그리더니 이내 힐끗 그를 쳐다보며 몸을 뒤틀었다.
색기가 쉼 없이 흘러나오는 그녀에 피르망 또한 잠시 침음을 흘리더니 이내 마음을 잡고 묻는다.
“요녀로구나. 그래, 짐의 고민이 무엇인 줄 알고 있는가?”
황제의 말에 라켄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살 떨리는 웃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