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42화
8. 검은 바위의 전설
이처럼 힘겹게 운영되고 있는 전쟁이었지만 진짜는 아직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실제 그나마 이들이 버티고 있는 것은 야안이 숨죽이며 자신을 지우고 있기 때문인데, 황제 또한 그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각 제국의 가장 큰 전력이라 할 수 있는 황제와 야안 이 두 사람 모두 스스로 전장에 나서는 것에 대해 꺼리고 있었다.
이는 먼저 나서는 쪽이 역공을 당할 가능성이 높아서이다.
야안의 입장에서 황제가 아무리 검의 종주에 올라섰다고 해도 그를 잡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
야안 또한 대현자에 올라선 자였으며 주술과 검은 초인에 올라선 자이니 황제를 이기는 것이야 당연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사이에 끼어들 어떤 한 존재. 악마로 추측되는 존재에 대한 문제이다.
싸우면 필패인데다, 그가 무너진다면 야안 제국은 그대로 끝이었다.
악마와의 거래에서 그 거대한 힘을 얻은 황제가 바 대륙을 제압한다면 더 이상 인간을 비롯해 산 자의 입장에서 희망이란 없었다.
악마의 그 개입을 예상치 못하는 황제였지만 그 또한 야안을 꺼렸다.
이는 야안의 그 무위를 짐작하여서다.
그의 또 다른 스승이자 강력한 우군인 레필 공작에게서 들은바 그 검이 초인에 올라섰음을 알았으니, 아무리 막강한 힘을 손에 얻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없었다.
더구나 온전히 자신의 힘으로 오른 그 경지와 거래를 통해 대가를 치른 그 두 힘이 차이가 벌어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가 야안의 손에 무너진다면 반대로 카이엘 제국은 끝이었다.
오크의 왕 칸과 약속한 그가 사라졌으니 오크들이 더 이상 제국을 위해 싸울 리가 없었으며, 격이 다른 야안이 휘저을 것이니 어찌 카이엘 제국이 버텨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야안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 황제 또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그가 전장에 나타나는 순간 야안 또한 나타날 것임을 깨닫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두 제국의 전쟁은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마치 초가을에 붙은 불처럼 날이 갈수록 그 열기는 커져만 갔다.
* * *
두 제국의 전쟁에 바 대륙에 지옥의 광경이 펼쳐지고 있는 와중에 그 열기가 미치지 않는 곳이 있었다.
바로 바 대륙의 최북단에 있는 섬으로 검은 바위 섬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곳이다.
최북단에 있는 곳답게 일년 내내 겨울인 이곳은 그 기온이 평균적으로 매우 낮아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곳 섬에는 제법 많은 이들이 부족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었는데, 이는 다름 아닌 검은 바위에서 발견되는 검은 돌 때문이다.
이 작은 검은 돌을 품에 넣으면 그 추위를 어렵지 않게 물리칠 수 있는데, 그것은 마법과는 거리가 먼 어떤 무언가의 힘이 자리했다.
제법 많은 짐승이 널려 있는데다 권력자들이 손에 넣어도 이득이 없는 곳이라 이곳 부족의 사람들은 대대로 바 대륙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이곳에서 머무르려 하는 성향이 자리했다.
당연하게도 자신들을 이곳에 머물 수 있게 한 검은 바위는 그들에게 있어 매우 신성시되는 곳인데, 아득할 만큼 먼 옛날, 이 검은 바위에 하나의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었다.
‘검은 바위가 부서져 사라지는 날. 위대한 분께서 세상에 돌아올 것이다.’
아주 짧다면 짧은 그 한 줄의 이야기가 입과 입을 통해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인데, 실제 부족 중 그러한 이야기를 믿는 이는 어린아이들 외에는 없었다.
어떤 방법으로도 깰 수 없었던 검은 바위가 부서진다는 것도 웃기지만, 위대한 분께서 세상에 모습을 보인다니 마치 검은 바위 안에 있기라도 하는 듯한 말 같지 않은가?
하니 세상에 대해 알게 모르게 편견이 생기고 머리가 굳어져 가는 어른들에게 있어 그것은 그저 그럴듯하게 지어낸 이야기 따위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그저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검은 바위에 기묘한 움직임이 보이고 있었다.
‘쿠르르릉. 크르르릉.’
엄청난 진동이 일어나고 있는 검은 바위가 조금씩 분열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이곳에서만 내리지 않는 눈 탓에 이곳은 주로 아이들의 놀이동산이 되었으나, 지금 이 같은 일이 벌어지자 놀이 정신없었던 아이들은 놀라 허둥거리며 멀리 떨어졌다.
그중 대다수가 어른들에게 이 일을 알리기 위해 달려갔는데, 역시나 자연스레 떠올리는 그 전설 때문이 컸다.
하지만 이미 그것을 허구적인 이야기 따위로 받아들이는 부족의 어른들은 짐짓 화내는 모습들을 보이곤 했다.
신성시하는 검은 바위 주위를 함부로 돌아다니는 아이들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인데, 그러한 어른들에 아이들은 풀이 죽은 표정을 보이곤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던 아이들은 달랐다.
그들은 오래전의 그 전설이 드디어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음을 인지한 터라 어리고 둥근 그들의 볼에는 크게 상기된 상태였다.
“아. 아! 바위가 부서지기 시작한다.”
“정말이야! 바위가 부서져.”
놀라 재잘거리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골목대장으로 보이는 몸이 큰 아이가 소리쳤다.
“조용. 조용. 페리 어서 어른들 모셔와.”
대장의 말에 페리라 불리는 아이는 고개를 저었다.
“안 오실 거야. 어른들은 안 믿으셔. 이 전설을.”
“알아. 하지만 어떻게든 데려와야 해. 지나 네가 페리와 함께 가. 너라면 어떻게든 어른들을 데려올 수 있을 거야.”
주근깨 어린 여자아이인 지나는 대장의 그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오빠. 나에게 하나 빚졌어.”
눈을 빛내며 말하는 지나에 대장은 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나는 마치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몸을 돌려 뛰어갔다.
“뭐해. 페리 오빠. 바보처럼 가만히 왜 서 있어. 어서 와.”
“아! 어. 그래.”
영악스러운 지나의 그 모습에 평소라면 고개를 저어댈 대장이었으나 그에게는 이제 그럴 정신이 없었다.
벌써 검은 바위가 삼 분의 일이 부서져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인데, 이대로라면 어른들이 도착하기 전에 검은 바위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그 부서지고 사라지는 모습이 시간이 갈수록 빨라지더니 결국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인데, 그 검은 바위의 중심에는 놀랍게도 사람이 있었다.
대장 그가 아주 어린 시절 촌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듣기로 브라운 인이라 불리는 모습이었는데, 다만 그럼에도 위화감을 느끼지 못한 것은 그의 얼굴 윤곽 때문이다.
브라운 인이라 불리는 샤 대륙 사람들과는 달리 바 대륙 사람과 그 윤곽이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이가 본다면 그저 분을 칠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저, 저분이 전설에서 나오던 그 위대한 분.’
설마 진짜로 검은 바위에 사람이 나타날 줄 몰랐던 터라 말문을 쉽사리 열지 못하는 가운데 그 전설의 위대한 자의 몸에서 구름과 같은 무언가가 푸른빛을 내며 그를 어루만진다.
너무도 강렬한 빛이라 대장은 물론 아이들은 눈을 보호하기 바빴다.
‘으윽. 괴로워.’
무리하게 그 빛을 참으려 했던 대장은 아린 눈의 고통에 힘겨워하는 가운데, 무언가 그런 그의 머리 위를 뒤덮었다.
크고 따뜻한 것이었는데, 대장은 그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어른들이 가끔 그를 칭찬할 때 보이는 손짓인데, 대장은 그 손짓을 받기 무섭게 고통은 거짓말처럼 사라져 버렸다.
‘뭐지. 뭐지!’
대장은 고통이 사라지자 천천히 눈을 떴고, 곧 그는 조금 전 검은 바위에서 나온 사내가 자신의 눈앞에 있음을 보고 한동안 말문을 잃고 말았다.
“미안하구나.”
너무도 오랜만에 하는 말이기라도 하듯 쇳소리가 가득한 사내의 말에 대장은 그저 침만 꼴깍 삼킬 뿐이다.
사내는 잠시 저 멀리 눈보라가 일렁이는 하늘을 보며 손을 뒤흔들었고, 그러기 무섭게 눈보라는 잦아들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사그라지고 말았다.
“이것은 오랫동안 나를 끊임없이 일깨워주었던 그대들에게 주는 작은 선물이다.”
그 말과 함께 사내는 다시 손을 흔들자 눈이 사라지기 시작하며 그를 중심으로 섬에 따스한 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입고 있던 옷이 더울 정도로 따뜻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인데, 저 멀리 오랜 시간을 잠들었던 나무들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겨우 검은 돌에 기대어 살아야 했던 과거와 달리 비옥한 토양이 그를 대신하며 나타난 것이다.
이제 이곳 섬의 사람들은 더 이상 위험한 동물들 따위를 사냥하기보다는 키워낼 장소와 굶주림을 없애고도 남을 곡식을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뭐지? 이분은.’
너무도 비현실적인 모습을 보았던 터라 대장은 정신이 어지러운 가운데, 사내는 그런 대장에게 말했다.
“제법이구나. 좋은 자질이다. 너는 이 힘을 가질 자격이 있다.”
그리 말하며 사내가 대장의 이마를 툭 치니 그는 마치 기절이라도 하듯이 정신을 잃고 말았다.
멀리서 대장과 사내를 바라보던 아이들은 놀라 달려오는 가운데, 사내는 그런 아이들을 제지하지 않으며 몸을 물리더니 저 멀리에 있는 바 대륙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그곳을 바라보던 그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야안 님의 기운이시다.”
위험한 도박에 성공하였다는 것에 그는 기뻐 그 돌 거인 같았던 딱딱한 그의 얼굴에 길고 긴 주름이 일그러져갔다.
이곳 검은 바위 섬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전설.
그리고 그 전설이 이루어져 나타난 위대한 존재는 그렇게 기쁨을 표하더니 이내 허상처럼 흐릿하게 사라졌다.
마치 잡히지 않는 바람처럼.
잠시 후 변화된 섬에 적응이 되지 않은 부족의 사람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였고, 그 웅성거림은 봄날을 타고 섬 곳곳을 채워나갔다.
오크들과의 전쟁이 한창인 7전장의 범위는 매우 넓었다.
무려 야안 제국에서 열하고 아홉 곳의 자작 급 영지가 그 전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곳에 밀려 온 오크들은 기껏해야 호도칸 정도의 강자가 가장 꼭대기에 있는 만큼 다른 곳처럼 크고 화려한 힘이 터지는 곳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만큼 넓고 그 투입되는 오크들의 숫자도 어마어마했는데, 만약 야안 제국에서 제대로 된 방어선을 건설치 않았다면 이곳 7전장은 그대로 휩쓸려 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도 위태위태할 지경인데, 그나마도 버티고 있는 것에는 현자의 탑에서 각성을 하고 온 7인의 강자 덕분이었다.
검으로 치자면 상급 익스퍼트에 올라선 강자인 것이다.
그런 그들이 호도칸들과 맞서 싸우며 아슬아슬하게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인데, 그것도 이제 한계치에 다다른 듯했다.
중앙에서 내려오는 지원 물품을 번번히 오크들에게 털려버렸기 때문인데, 이 때문에 성 안의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삭막한 분위기가 감도는 곳에 한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