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60화
실로 괴상한 세계에 괴상한 현상이라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던 리트담은 우선적으로 몸을 회복하기로 했다.
그간 그 인과의 그물에 얽혀지면서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졌기 때문인데, 역시나 탈인의 경지에 오른 자답게 그는 한나절도 채 되지 않아 몸을 회복하였다.
그는 몸을 회복하기 무섭게 그가 발견한 이종족이 있는 곳으로 몸을 날렸다.
‘사아악. 사악.’
그의 축지술은 그야말로 경이 그 자체였다.
공간이 찌그러졌다가 갑자기 쭈욱 펴지는 현상이 그를 중심으로 벌어진 것인데, 그럼에도 바람 한 점 흔들림 없이 변함없는 주위를 보노라면 그가 허상의 존재가 아닌가, 라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게 리트담은 자신이 발견한 이종족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고, 그는 곧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다.
바로 엘프, 드워프는 물론 거인족과 불의 종족 카사, 반인반수 모롤타족 물의 종족 멀머던족 이외에도 놀랍게도 오크의 근원 종족이라 할 수 있는 태양의 종족이 하나의 도시를 이루고 살고 있음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은 마치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처럼 당연한 듯 거래를 하거나, 친분을 나누는 모습들을 보였다.
‘이게 무슨 일인가? 마치 과거로 돌아온 것 같구나.’
아니, 과거에도 이처럼 많은 종족이 조화를 이루어 화합되어 살지 못한 터라 감탄하던 리트담은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바로 이곳에 인간이 없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음. 인간이 없다라?’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리트담은 곧 인지의 술을 펼쳐 모습을 감추더니 그들의 도시로 진입하였다.
그가 도시로 진입하면서 놀란 점은 상급 익스퍼트 급의 엘프 전사들이 널려 있다는 점이었다.
엘프들이 비록 뛰어난 재능을 타고났다고는 하나 그들은 너무도 긴 시간을 사는 관계로 수련에 대한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인간처럼 따로 수련에 열의를 보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자연 속에서 긴 시간을 살다 보면 저절로 깨우쳐 강한 힘을 얻게 되니 그럴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들은 어린 엘프들임에도 이처럼 막강한 무력을 손에 넣은 듯하니 그 엘프의 느긋함을 아는 리트담으로서는 놀랄 따름이다.
“마치 거대한 전쟁을 준비하는 이들 같구나.”
그랬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들 엘프들이 이처럼 수련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처럼 상급 정령들을 다루는 엘프들이었지만 그런 정령들조차도 리트담을 발견하지 못했다.
리트담은 그들을 지나 곧 다른 종족들 또한 살펴보았는데, 역시나 그의 생각이 맞은 듯했다.
엘프만 특이한 것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이들은 그가 보았던 이종족들보다 배는 더 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놀랍군.”
기이하게도 인구 백만이 넘는 이들의 도시는 안으로 들어갈수록 숲의 중심에 오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수풀은 물론 거목들이 아무렇지 않게 거리에 널려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줄을 맞춘 듯 나름의 질서가 그 안에 있었다.
아무래도 이 같은 자연 환경의 모습은 엘프들의 영향 때문인 듯했는데, 그 외에도 다른 종족들의 특색들이 이 도시 안에 교묘하게 조화가 되었다.
‘드워프의 솜씨로군.’
한때 야안을 통해 드워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었던 리트담은 그 도시 곳곳에 남겨진 흔적을 통해 이 놀라운 도시가 드워프에 의해 세워졌음을 깨달았다.
하기야 예술은 물론 실용적인 면을 추구하는 드워프라면 충분히 이런 조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을 터였다.
그는 그렇게 몸을 숨긴 채 잠시 곳곳을 살펴보다 멀머던 상인으로 보이는 이를 잡아 그로부터 기억을 읽었다.
가장 좋은 것은 아마도 이 도시의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드워프나 엘프에게 기억을 읽는 게 좋지만 워낙 그들 자체가 오랜 세월의 삶을 사는데다 격이 높은 존재인터라 막상 읽어 들이는데 버거운 면이 있어 멀머던을 선택한 것이다.
욕심이 많은 멀머던은 인간과 비슷한 면이 많았고, 그 수명도 그리 길지 않았다.
부담이 없는 것이다.
리트담은 그렇게 그 멀머던을 통해 이 세계가 어디인지 또 왜 이들이 죽음의 지배자의 저주에도 멸종되지 않았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놀람을 넘어 어이가 없다는 듯 크게 고개를 저었다.
‘하나께서는 정말 터무니없는 일을 하셨구나.’
그랬다.
이들은 하나가 야안 그에게 내어 준 그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담아 만든 새로운 세계였으며, 그는 자기 죽음을 통해 죽음의 지배자의 저주를 비틀어내었다.
알지 못했다면 모를까?
야안으로부터 이번 침공을 통해 그들 종족의 멸종을 노렸던 죽음의 지배자의 속셈을 안 이상 이 정도의 일은 드래곤의 수장으로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이곳 세상의 크기는 샤 대륙의 이십 분의 일에 달했으며, 이 같은 도시는 모두 아홉에 달했다.
대략 인구는 천만에 불과했지만, 이들 하나하나가 이 세상이 만들어진 목적에 맞춰 전사로서의 수련하고 있었다.
저마다 종족들의 대표자들은 있었으나, 그 모두를 아우르는 왕은 없었다.
이는 이 세상을 만든 하나가 그들에게 예언과도 같은 말을 남겼기 때문이다.
‘절망의 날. 그 날이 오면 그대들의 왕이 이곳을 방문할 것이다.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왕은 그대들을 이끌고 삶과 죽음을 정하는 전쟁을 다시 시작할 것이며, 그대들은 그 왕의 뒤를 따라 전사로서의 고귀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하나의 그 말에 놀랍게도 당시의 일곱 종족의 대표자 중 그 누구도 반대의 의견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마치 하나의 예언에서 나오는 그자만이 진정한 왕임을 인정한다는 듯.
그리고 리트담은 하나가 말하는 왕이라는 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었다.
당연했다. 리트담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이유가 그자를 만나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리트담 그 자신의 생명보다 우선시해야 할 존재 그의 주군 야안이 하나가 말한 그 왕일 것이 분명했다.
멀머던 상인의 기억을 통해 상황을 유추한다면 이들 이종족의 정체는 야안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천 년 전 죽음의 지배자의 침공을 막기 위해 야안이 이종족들을 모아 만들어낸 세워진 왕국이 이곳이었으니 말이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나가 만들어낸 세계라고 해도 이미 주술의 새로운 경지에 발을 놓게 된 그였다.
인과의 그물을 건드리게 된 그에게 있어 이 세계는 그를 속박할 수 없었다.
“그러기 전에 이들의 전력을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가장 이성적인 존재를 만나야 하는 것이 좋은데, 그런 존재라면 이곳 세상에 여러 있었다.
거인족의 대전사들도 있었고, 진실을 바라보는 현명한 자들 드워프 족장들도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조건에 맞는 이는 따로 있지.”
이 도시에는 세상에 없는 세계수가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세계수와 같은 운명을 지닌 자.
하이 엘프가 있다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리트담은 손을 들어 눈을 감고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곧 크게 걸음을 옮겼다.
순간 대기의 한 중심에서 바람 새는 소리가 슬쩍 일어나더니 리트담의 모습이 사라져 버린다.
이 도시를 관리하는 자인 하이 엘프 푸른 하늘은 세계수의 잎으로 다도를 즐기다 순간 멈추고 말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세계수의 가호는 물론 정령마저 속이고 자신의 앞에 나타난 존재 때문이었다.
‘기이한 자로군.’
고요한 푸른 하늘의 마음에 파문이 일어나는 가운데, 그 원인이었던 리트담이 사과를 보였다.
“놀라게 해서 죄송합니다. 실례를 했군요.”
리트담의 사과에 어느새 마음의 파문을 잠재운 푸른 하늘이 손을 저었다.
“괜찮소. 혹시 하여 묻겠소만 그대가 문헌에서 말하던 그분이시오?”
푸른 하늘의 그 말에 리트담은 그가 오해를 하고 있음을 알고 서둘러 답했다.
“인간인 것 맞으나 당신들이 기다려 온 그분은 아닙니다. 저 또한 그분을 기다리다 이곳을 오게 된 것이니 말입니다.”
그는 오해를 풀어주며 자신이 어떻게 해서 이 세상에 들어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또 다른 의미로 놀라운 그의 이야기에 푸른 하늘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 놀랍군요. 주술이라.”
세상의 인과의 법칙마저 간섭하는 힘이라니 이성적인 하이 엘프의 존재라 해도 그처럼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푸른 하늘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때가 왔군요.”
어딘가 뜬금없는 말이라 리트담이 바라보니 그가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벗어나게 될 날을 말입니다.”
푸른 하늘의 말을 그제야 이해한 리트담이 놀라 물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리트담의 물음에 푸른 하늘이 손가락을 들어 리트담을 가리켰다.
“그대가 온 것이오. 이상하지 않소? 그 인과의 그물을 뿌리치고 온 세상이 이곳이라는 게.”
푸른 하늘의 그 말은 생각지도 않은 것으로 리트담이 놀라 쳐다보니 그가 말을 잇는다.
“하나께서는 어쩌면 여기까지 예상하였는지도 모르오. 때가 되면 그대가 이곳을 방문하기를 말이오.”
리트담은 그제야 어딘가 이야기가 맞아떨어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흠. 그게 사실이라면 드래곤 로드의 지혜는 측정하지 못하겠군.’
그도 현자의 탑을 통해 겨우 꿰뚫어 본 주술의 진가를 하나께서는 이미 오래전 알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던가?
예전 야안으로부터 주신 아리스가 드래곤 로드에게 내리는 축복이 있다고 들었던 그는 그것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제가 주군을 찾고자 하다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니 틀린 말이 아니군요.”
비록 왕은 아니었으나 왕을 찾는 과정에서 이곳에 오게 된 것이다.
그가 야안을 찾고자 무리하지 않았다면 이곳에 결코 오지 못했을 터였다.
“그대라면 이 세상의 속박을 풀고 우리를 왕의 앞으로 데려다 줄 수 있을 것이오.”
그의 말에 리트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방법을 알려주시겠습니까?”
“물론. 이 말을 하기를 저는 오랫동안 기다렸습니다.”
정령을 마스터하였을 뿐만 아니라 마법마저 고위 현자 익스퍼트에 달한 푸른 하늘은 곧 마법을 펼쳤다.
곧 한 이방인에 의해 이들의 세계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휘이이익-’
아무것도 없는 하얀 연무장에 한 차례 큰바람이 일렀다.
사방이 막힌 연무장에 바람이 분 것이니 그 현상이 참으로 기이하다.
그렇다고 마나의 유동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마법이나 주술에 의해 일어난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몇 차례 일어난 바람은 이곳저곳 사방을 휩쓸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그 바람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번쩍하며 그 하얀 공간이 슥 갈라지더니 그 속에서 검이 튀어나왔고, 그 뒤를 이어 건장한 체구의 한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안이었다.
이곳은 현자의 탑에서 그가 만들어 낸 연무장이었으며, 그가 조금 전에 보인 그 경이적인 검은 그를 여러 번 구제해 주었던 심연의 일검이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이 심연의 일검을 펼친 것만으로 기진맥진했을 터였으나, 지금의 그는 달랐다.
부담이 없는 듯 검을 접은 그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