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 47화. FA컵 8강전(2)
* * *
그레이터 런던 웰링주에서의 내 인기가 상승하고 있단게 체감이 되기 시작했다.
벌써 5경기를 소화해내었고, 교체로 출전한 두 경기에서 두골 씩 뽑아내서 5경기 11골째다. 결국 팀은 5연승의 쾌거를 이루어냈다.
리그 1에서의 득점왕이 현재 처음 들어보는 선수의 28경기 18골로 상당히 뛰어난 모습을 보여주는 페이스이지만 겨우 5경기에서 11골을 뽑아낸 괴물 루키에 의해서 평가 절하당하고 있는 중이다.
웰링의 순위마저 17위에서 10위로 껑충 뛰어올랐고 꾸준히 이겨나가고 운이 좋으면 승격에 발을 걸칠수도 있다.그러니 다들 반응이 얼마나 폭발적이겠는가.
평범한 평일 오후, 나는 간식을 먹고 싶다는 가은 언니의 요청에 따라 웰링 시내로 쇼핑을 나서기로 했다.
아직도 나는 남자의 가슴을 가진채라 여성스러운 옷을 입기는 아직 거부감이 심하다.
아마도 예쁜 옷을 입으면 엄청 잘어울릴테지만, 그것을 알고있음에도 거부감 때문에 손도 안대고 있는 상태다. 덕분에 가은 언니의 짜증 수치가 높아지고 있는 상태긴 하지만.
뭐라더라 업무 스트레스를 풀고 싶은데 내가 도대체 맞춰주질 않는 다나? 솔직히 같은 여자인데 내가 예쁜 옷을 입어서 보여주는게 무슨 스트레스를 푼다는 건지...
"어?"
길을 걷나가 거리에 과일 매대를 내놓고 장사를 하고 있는 중년 남성이 나를 쳐다보며 눈이 동그래지는걸 보았다.
"혹시 이쥐해?"
손가락으로 날 가르키며 질문을 해왔다. 서양인들은 동양인의 얼굴 생김새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는데... 사실인가 그거?
"어... 네"
나는 슬며시 웃으며 과일 매대에 다가갔다.
"오 마이 퍼킹 갓! 진짜 이쥐해? 오늘 왠지 마누라 대신 장사를 하고 싶더라니!"
남성이 상당히 흥분했는지 얼굴이 시뻘게진채로 침을 튀겨가면 소리를 질러댔다.
"...뭐야? 앤디! 왜 소리를 질러대? 진상이라도 온거야?"
"야! 동네 시끄러워 죽겠네! 또 위스키라도 마시고 장사하러 온거야?!"
남성이 소리를 질러대니 주변에서 장사를 하는 동네 사람들이 고개를 빼꼼 내밀며 쳐다보기 시작했다.
"...하하. 안녕하세요."
"...?"
"음? 저 아시안...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 병신들아! 이쥐해라고! 이틀전에 홈경기에서 교체 출전한 선수! 그 미친듯한 드리블을 벌써 까먹은거야?"
"...!"
"오오....어?! 씨발!"
동네 사람들이 가게에서 튀어 나오기 시작했다.
"팬이에요!"
"오오 시발... 진짜 현실인가 이게?"
"미래의 위대한 스트라이커가 될지도 모르는 유망주라고!"
사람들이 나를 둘러싸고 소리를 질러대니 뭐라는지도 잘 모르겠고, 살짝 쪽팔리기 시작하는 것 같다.
"저기.. 저 쇼핑하러 가는 길이라..."
"오오!! 우리 가게로 오세요! 다 그냥 드릴테니까!"
"아니 아니 그래도 돈 주고 사야죠"
"무슨 서운한 말씀을! 우리 병신같던 웰링의 멱살을 붙잡고 살려준게 누군데!!"
"...다 같이 힘낸 덕분이죠"
"겸손하기까지 해라! 야! 앤디! 너희 과일 좀 챙겨드려! 뭐하냐!"
"...지금 하고 있다고!!"
사람들이 한 두명씩 뭔가를 들고와 내 손에 쥐어주기 시작했다.
"어어... 이러지 마세요! 멈춰!"
"하하 값은 사인이나 사진으로 대신 해주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스마트폰을 들고 줄을 서기 시작했다.
"아.. 그건 당연히 해드려야죠... 응?!"
'맞다.. 나 사인 제대로 만들지도 않았는데...'
나는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티셔츠 위나 종이에 싸인을 해주었고, 사진도 같이 찍어 주며 팬서비스의 시간을 조금 보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엉덩이에 싸인해달라고 해서 경멸하는 표정으로 싫다고 했더니 오히려 기분 좋다는 표정으로 사진이라도 찍어달라고 했다.
"끄응..."
"어머 왜 이렇게 많이 사왔어?"
나는 양 손에 봉투를 가득 들고 집까지 낑낑대며 왔다.
이 몸으로 변하게 된 뒤로 이렇게 무겁다는 걸 느낀건 참 오랜만인듯 하다.
"진짜 힘 좋네 우리 지혜"
가은 언니가 한쪽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내 어깨를 찰싹 때렸다. 무슨 엄마 같네...
"하아.. 디저트라도 사려고 동네로 나갔는데 사람들이 날 다 알아보더라고. 이건 그 사람들이 억지로 내 손에 쥐어준 것 들이야."
"와아.. 벌써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러는 구나.. 확실히 축구에 미쳐있는 동네라서 그런가?"
"아무튼, 너무 많은데 가정부 아줌마나 철만 아저씨도 좀 나눠드리자. 우리 둘이 다 못 먹을것 같아."
"그래 그러자. 자! 나한테도 나눠줘"
나는 가은 언니에게 봉투 하나를 건네 주었지만 그거 하나를 양손으로 들면서 낑낑 대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
"..."
***
나는 집에서 쉬면서 인터넷 서핑을 시작했다. 투게더에는 평소와 같이 경기 내용과 상관없는 내 찬양글들로만 가득 했고 대다수의 글은 내가 고양이 귀를 착용하고 인터뷰를 했던 사진을 짤방으로 쓰고 있었다.
'하.. 씨발 만약 다른 코스프레까지 하면 이 사람들에게는 좋은 떡밥이 되겠네...'
나는 가은 언니와 약속 했던 사실이 떠올라 머리가 지끈하고 아파지기 시작했다.
너튜브도 벌써 50만이 넘어가고 있었고 최근의 영상은 경기 영상을 중계하는 걸 하이라이트로 편집해서 올리고 있는걸 확인했다.
와.... 축구 별로 안보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해외에서 성공하고 있다니 정말 좋은 소식이네요!
ㄹㅇ 이대로만 간다면 진짜 큰일 한번 해낼 수 있을 듯
근데 여자가 남자 축구 리그에서 뛸 수 있음?
ㄴ 인터넷에 검색해보셈. 허가 내린지 꽤 됬음. 그래도 안전에 걱정되는 사람은 피파에서 허가를 안내주는 것 같은데.. 이지혜는 피지컬이 우월하다보니 그냥 허가 내준 듯.
ㄴ 아하 그렇군요.
ㄴ 사실 남자 리그에 도전하는 여자 자체가 거의 없음. 여자 리그가 있으니까 굳이 갈 필요가 없는거지.
와 ㄹㅇ 드리블 스킬 미쳤다. 옛날에 슈퍼쏘니도 이 정도로 드리블 잘하진 않았던 것 같은데?
ㄴ 아직 그 선수랑 비교하기는 이르지 않냐? 겨우 3부리그에서 활약하고 있는 거 잖아? 프리미어리그 선수랑 비교하는건 좀 그렇지
ㄴ 축구 하루 이틀 보냐? 잘하던 유망주가 좀 커서 좆망하는거 한 두번 보냐고
슈팅 보소 ㅋㅋㅋㅋㅋㅋㅋㅋ 앵간한 남자들 보다 킥력이 강한 것 같은데?
ㄴ ㄹㅇㅋㅋ 허벅지를 봐 ㄹㅇ 저게 꿀벅지 아니냐?
ㄴ 눈나 다리에 차여보고 싶다 헤으응...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런 저런 네티즌의 반응을 보니 조금씩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있는 듯 하다. 아직은 축덕들에게만 알려진 것 같지만, 좋은 징조가 아닐까? 언젠간 나도 사람들이 해버지 같은 별명을 지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아마 성공하면 해머니라고 하려나? 그건 좀 이상한데...
"음... 지혜야 좋은 소식이 하나 더 있어!"
"뭔데?"
가은 언니가 내가 받아온 과일을 깎아서 접시에 담은 다음 방으로 들어왔다.
"구단주님이 한국 팬들을 위해서 왕복 비행기표랑 호텔이용권이랑 경기를 관람할 수 있는 특별 티켓을 준비해 주시겠대!"
"어...? 진짜로? 그걸 언니한테 말해준거야?"
"아니 황대표님한테 말씀하셨다는데? 황대표님이 나한테 연락을 주신거야. 그래서 어떻게 받을 팬을 고를 지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
가은 언니가 찰랑 거리는 갈색 웨이브 머리를 손으로 정리하며 말했다.
"몇 명이나 해주시려나?"
"50명 정도 해주실 것 같다는데?"
"50명?! 엄청 많이 해주시네..."
구단주님은 통도 크신듯 하다. 금액을 다 합하면 어마어마 할텐데... 광고 효과가 더 클거라고 생각하신 건가?
"흐음... 생각 좀 해봐야겠네.. 언니는 무슨 좋은 생각 있어?"
"아니 나도 들은지 얼마 안돼서.. 아무튼 사람들이 좋아 할 것 같아."
"그냥 경기만 관전하면 재미없을 테니 팬미팅도 해주면 더 좋아하겠지?"
"그럼!"
나와 가은 언니는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짜보았지만 아직 마땅히 마음에 드는게 없었다. 아무래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뽑힐 권리를 줘야 하다보니 평범한 뽑기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
"아무튼 이건 한참 나중의 일이니까 천천히 생각해보자."
가은 언니가 과일을 집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응. 요즘 좋은일만 생기는 것 같네..."
"그럼 최고지!"
"다음 경기는 일주일도 안남았네.. 드디어 FA컵 8강전이야. 맨시티라니 첼시 때도 실감나지 않았는데 내가 진짜 영국에서 축구를 하고 있는 거구나..."
나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껄떡거리며 생각했다.
"지혜가 또 대박을 내면 진짜 다른 구단에서 이적하라고 난리나는거 아냐?"
가은 언니가 양손을 꼬옥 잡고 호들갑을 떤다.
"에이.. 자신이 없는건 아니지만, 그게 쉬운일이 아닌걸?"
"하지만 왠지 지혜는 뭐든지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인걸?"
"하하..."
과한 칭찬에 괜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으음... 박코치님에게 조언을 구하고 싶은데 언제 오신대?"
"한국에서 일 처리가 늦어지고 있나봐.. 아마 오면 수아랑 같이 오시지 않을까?"
박코치님에게 여러가지 조언을 얻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A매치 코치로 지내시기도 했고, 같은 한국인에게서 얻는 안도감도 있고..
"아무튼 난 열심히 준비 해야지.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줘서는 안되니깐."
나는 뉴투브에서 과거 위대했던 축구 선수들의 스킬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하여간 그걸 본다고 써먹을 수 있는 것도 대단한거 아냐?"
"...그런가? 다른 사람의 입장은 잘 몰라서"
"..."
가은 언니가 살짝 질려하는 표정으로 내 옆 얼굴을 쳐다 보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