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 1.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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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
세상의 절반이 불타올랐을 무렵 검은 연기로 가득한 하늘로부터 한 줄기 빛과 함께 신탁이 내려왔으니
이는 네 명의 구원자가 나타나 세상에 다시금 푸른 하늘과 태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성양경 14장 1절 '용사' 中
*
터벅
쩔그렁..
터벅
쩔그렁.
956
957
958... 959.. 960.
터벅
쩔그렁...
터벅
쩔그렁..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계단을 오를 때마다 내 발소리에 맞춰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는 요란한 소리가 고요한 첨탑 내부를 울리다 흩어져 간다.
매일같이 이곳을 오르며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왜 내가 여길 오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나 자신도 확실하게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의외로 내게 소소한 유쾌함을 가져다 준다.
997...
99.... 8.
드디어 첨탑의 정상에 다다랐다.
998.
애매한 숫자다.
두 계단만 더 있었더라도 약간은 속이 개운할 것 같은데.
"흠..."
이 쓸데없는 생각, 분명 어제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지만 이건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매일같이 이곳의 계단을 오르는 지루한 시간동안 이미 알고 있는 계단의 수를 세는 것보다는 쓸데없더라도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는 편이 덜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눈앞으로는 바깥으로 이어진 문이 하나.
잠겨있지 않다.
휘오오오오오오오오오오...
문을 열자 거세게 몰아쳐 오는 바람.
매캐한 탄내가 섞인 바람을 상쾌하게 맞으며 나는 난간에 몸을 기대었다.
아직 성양구가 떠오르지 않았기에 어두운 하늘은 내게 자연스럽게 연초를 꺼내물게 한다.
"....아니, 없네."
사제복의 안주머니들을 아무리 뒤져도 꽁초 하나 나오지 않는다.
다시 내려갔다 오는 것도 귀찮았기에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 북쪽을 바라보았다.
아미시아 강 너머
어두운 하늘 아래 높이 솟아있는 뾰족한 돌산들로 이루어진 산맥이 보인다.
나는 분명 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저 산맥을 보고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저 너머의...
"..."
머리가 지끈거려 온다.
"... 내려갈까."
태울 연초도 없이 굳이 더 오래 이곳에 머물러 있을 이유는 없었다.
걸어올라온 계단을 다시 한 번 하나 하나 천천히 밟아내려가며 첨탑을 나온 나는 그길로 대성당으로 가기 위한 발걸음을 옮겼다.
대성당의 주변에는 아직 성양구가 떠오르지도 않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등불을 밝히고 뭔가를 나르거나 장식하는 등, 마치 큰 행사를 앞두고 준비에 힘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보인다.
추모제가 벌써 이렇게나 가까워졌던가.
나는 괜히 관을 인 내 어깨가 무거워짐을 느끼며 그들을 지나쳐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에단"
"... 아, 다나 대주교님."
입구쪽 통로를 지나 열려있는 정문을 막 통과하려는데 내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나는 그대로 멈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바라보았다.
나이탓에 머리가 하얗게 샌 포근한 인상의 늙은 여인. 입고있는 사제복과 머리위에 얹어진 황금색의 주교관은 그녀의 지위가 이 대성당의, 아울러 이곳 바실리카의 최고 권위자인 대주교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른 아침부터 추모제 준비를 돕고 있었는지 그녀의 손에는 입구를 꾸밀 것으로 보이는 작은 장식들이 든 바구니가 들려 있다.
"에단.. 이번 추모제에도..."
"예, 매년 하는 일이니까요."
내가 처음 봤을 때의 그녀는 어린 수습 사제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벌써 이렇게 나이를 먹은 모습이라니 어색한 기분이다.
그에 반해 자신은 여전히 그날의 그 모습 그대로.
".. 매년 하는 말이지만."
"예, 조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도 매년 하는 말이지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며 조그마한 고마움, 그리고 약간의 귀찮음을 느낀다.
주변으로 다른 이들이 가던 길을 멈춰서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커다란 관을 이고있는 내 모습은 시선을 끌 수밖에 없기에 그들이 내 눈치를 보며 작게 속닥거리는 모습을 보며, 나는 인사도 드렸겠다 슬슬 자리를 피하기로 했다.
대주교님이 밖에 나와계셔서 차라리 다행이다.
안까지 들어갔다면 분명 나를 알아보는 이들도 있었을 테고,
그랬다가는 피곤해 졌겠지.
"그럼."
"... 조심하게나."
부러 말을 끊었건만 결국은 염려와 걱정이 담긴 말을 입밖으로 낸 그녀에게 슬쩍 고개숙여 인사하고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잠깐 대화를 마치고 나왔을 뿐인데 벌써 날이 밝아오고 있다.
이미 용의 뱃속에 들어간 태양이 다시 떠오를 리는 없다.
아침예배가 시작된 모양이다.
대성당에 모인 사제들이 성양구에 신성력을 불어넣으면 그것은 찬란한 빛을 흩뿌리며 하늘로 떠올라 바실리카에 낮을 가져온다.
세상을 전부 밝힐 만큼은 아니었지만 이 좁은 바실리카 안이라면 환한 낮을 가져와 주었다.
바실리카의 주민들이 창문을 열고 아침을 맞이한다.
그들은 모두 성양구가 떠오르고 있는 대성당 쪽으로 두 손을 모으고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다.
괜히 입맛이 쓰다.
발밑으로 길게 생겨나는 그림자를 즈려밟으며,
나는 끝까지 돌아보지 않은 채 남쪽을 향해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으음...."
"... 크흠"
"..! 아! 죄송합니다!"
성벽에 기대어 졸고 있던 경비병 하나가 내 헛기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내쪽을 바라본다.
바실리카에서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인 이곳의 보초가 졸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도 그럴게 하늘 높이 솟아오른 첨탑만큼이나 높은 성벽에 비해 마차하나가 겨우 지나갈 수 있을만큼 작은 크기의 이 문은 그 날 이후로는 거의 항상 닫혀있었으니 말이다.
안전한 바실리카에 살고있는 주민들 중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마물과,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일삼게된 이들이 득시글 거리고 있는 바깥으로 제발로 걸어나가는 정신나간 이는 없었고,
외부자에게는 지극히 폐쇄적인 바실리카였기에 새로운 누군가가 들어올 리도, 그럴 수도 없었다.
나도 대주교님의 직인이 찍힌 이 출입허가증과 거주민등록증이 없었다면 함부로 이 문을 통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건... 금방 열어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딜런이 보이지 않는데."
나는 그에게 출입허가증을 건네며 주변을 살폈다.
최근 몇년간은 매번 만났다 보니 오늘도 그가 나와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젯밤 결계에 충돌한 와이번 무리가 북쪽 벽 아래로 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경비대장님께서는 현재 그쪽 현장에 나가 계십니다."
북쪽과 남쪽으로 각각 두개의 대륙, 그리고 가운데에 커다란 강이 흐르고 있는 모습을 한 아케라.
그 강의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섬 하나, 그게 바로 바실리카였다.
섬의 외곽을 모두 높은 성벽으로 감싸고 대성당에 고이 모셔진 성물들로 전개되는 강력한 신성력의 결계가 하늘을 뒤덮고 있다.
바실리카와 북서대륙 셀틱간의 연결되어있던 대교를 끊어버린지 오래인 만큼 지상으로 마물의 군세가 들이닥칠 일은 없었고, 가끔가다 이렇게 날개달린 마물들이 날아와 결계에 부딪혀 타죽고는 했다.
덕분에 평화로운 일상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은 감사하게 여긴다.
하지만 내 목적지는 북대륙, 용이 잠든 곳이자 저주받은 땅.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현재 바실리카와 외부를 잇는 유일한 대교를 통해 먼저 남대륙 베헤멘티아로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요새 들어 강을 건너 날아오는 마물들이 늘어난 느낌입니다. 용이 정말 다시 깨어나기라도 하려는 걸까요."
"정말 그렇다면, 더 도망칠 곳은 있고?"
이 최후의 도시에서?
"그건... 하하.. 말씀대로네요."
"..."
어색한 침묵이 오가는 가운데 성벽 위쪽으로부터 다른 경비병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개문 하겠습니다!"
끄그그그그그그그그긍...!!!
거친 쇳소리와 함께 두꺼운 성문이 흙바닥을 긁어내며 천천히 열리고 있다.
내문에 이어 이내 벽외쪽의 외문까지 열리고 나서야 드디어 바깥으로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 경비대장님이 사제님께서 찾아오시면 조심히 다녀오시라는 말을 꼭 전해달라 했습니다."
멈칫.
"... 알겠다고 전해둬."
쓸데없이 걱정만 많은 사람들이 유별나게 많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성벽의 두께만큼이나 긴 통로를 지나 바깥으로 나섰다.
성양구의 빛이 닿지 않는 바깥은 어두컴컴한 밤.
나는 오히려 이 익숙한 어둠에 편안함을 느낀다.
"폐문하겠습니다!!"
끄그그그그그그긍.......!!!!!
쿵!
등뒤로 문이 닫히며 큰 소리가 났지만 나는 신경쓰지 않고 그저 눈앞을 바라보았다.
까만 먹물이 넘실거리고 있는 것 같은 엘로루스 강 너머, 남대륙으로 연결된 커다란 대교를 보며
올해도 참 길고도 짧은 여정이 되겠다는 생각을 끝으로...
멈춰있던 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