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화 〉 4. 추모의 밤은 깊어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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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추모의 밤은 깊어만 가고(1)
바실리카의 높이 솟은 뾰족한 첨탑 위로 환하게 걸린 성양구는 오늘도 이 메마른 땅에 생기를 북돋우고, 주민들의 일상이 밝은 빛 아래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한다.
매일 아침 예배에서 바실리카의 사제들이 모여 만들어 내는 이것은 마치 이들의 믿음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신의 자비는 남아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 본다면, 모두가 힘겹게 모은 신성한 기운을 매 아침마다 굳이 하늘 위로 띄워올리는 것이 얼마나 낭비인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성양구는 바실리카의 주민들이 안심하고 일상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그리고 신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게끔 하는 하나의 안전장치다.
이런 세상에서도 내일 아침 역시 오늘과 마찬가지로 밝아올 거라는 확신에 가까운 믿음을 벌써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을 보면, 이 하얀 구체가 가지는 의미는 단순히 커다란 불빛 그 이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백 년이라는 시간은 길었고, 그렇게 사람들은 잊어버렸다.
잠에서 깨어나 창문을 열었을 때 바깥이 밝은 것은 당연하다고, 이 좁은 벽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다고, 불편하지 않다고..
벽 안의 삶에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다들 그렇게 생각해버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일상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임이 통보되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아침 예배를 위해 모인 사제들과 대주교는 바로 눈앞에서 목도했다.
신의 기적은 실재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강렬한 빛은 다나 대주교, 그녀에게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새롭게 탄생할 용사와 성녀는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이 세상에 구원을 가져올 여정을 다시금 시작할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는 신탁.
하지만 추모제를 앞두고 내려온 신탁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새롭게 탄생할 용사와 성녀...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그 또다른 일행이라고 할 수 있는 인류 배반자 에단과, 현재 장소 모를 어딘가에서 은거 중인 레베카 블란쳇의 복귀를 뜻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용사와 성녀가 어디에서 나타날지를.. 벽 안일지, 벽 바깥일지 그 사실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최근 몇 년간 에단을 통해 바깥 세상의 소식을 조금씩 전해 듣고는 있었지만, 바실리카의 주민들에게는 이 정보들을 일절 공유하지 않았다.
겨우 한 번의 세대교체가 일어났을 뿐이지만.. 아예 관심조차 없는 이들이 반, 그리고 이 벽 바깥에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주민들이 나머지 반이다.
그도 그럴게 심판의 날 바실리카로 운 좋게 피신한 이들이라면 듣지 못했을 리 없다.
수많은 이들의 손이 굳게 닫힌 바실리카의 성문을 처절하게 두드리는 그 소리를 말이다.
이는 결코 자식에게 들려줄만한 것이 되지 못했다.
"사절단을 파견해야 합니다. 베헤멘티아의 왕도 모르부스, 남부 대삼림의 엘프의 숲, 하르펜... 그리고 스폴리아리움은.. 흠.. 그곳은..."
식량부족과 더불어 마물과 사교도들이 날뛰는 바깥은 충분히 혼란스러웠고, 때문에 알리지 않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밖에 사람들이 아직 살아있다는 것을 알아봤자, 풀리지 않을 찝찝한 죄책감만 괜히 생겨날 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 벽 바깥으로 사절단을 파견하게 된다면, 바실리카의 모두가 알게 될 사실이기도 했다.
"그 자가 가져오는 정보에 의하면 스폴은 이미 돼지우리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곳을 장악한 상인연합의 대표는 수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용사나 성녀님이 그곳에서 나오지 않기를 기도해야지요. 셀틱은... 말할 것도 없고 말입니다."
"우토 형제님, 수인들에 대한 치우친 감정을 이처럼 중요한 일에 너무 관계시키지 않았으면 하네."
다나 대주교의 한마디가 있었지만.. 우토라고 불린 사내는 잠시 움찔했을 뿐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치우친 감정이라니요. 그 노아라는 자의 태만 때문에 지금 세상이 이 모양이 된 것 아닙니까?"
"그런... 태만이라니."
"모두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진실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들에게는 대상이 필요합니다."
"..."
"믿을 대상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들에게는 미워할 대상 또한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바실리카의 주민들이 분열하지 않고 하나로 모이게 해주었습니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먼 옛날부터 이어져오던 이종 간의 갈등과 대립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격화되기도, 완화되기도 하면서도 그 적정선만큼은 언제나 유지해 왔지만 용사의 실패와 함께 도화선에 불이 붙어버렸다.
하루아침에 불지옥이 되어버린 이 세상이 앗아간 가족과 일상에 대해 억울함을 쏟아낼 수 있는 대상이 사람들에게는 필요했고, 입에 담기조차 공포스러운 용이 아닌 그저 한 명의 수인이었던 노아에게 그 불씨가 쉽게 옮겨붙은 것이다.
수인 용사가 나왔다는 것에 대해 안그래도 말이 많았건만, 우려했던 실패가 현실로 이어졌으니... 이것은 예견된 미래였는지도 모른다.
신의 말씀을 전하던 성녀님의 죽음은 용사의 탓으로, 그리고 살아남은 사제와 마법사 이 둘만 내친다면, 불안하게 타오르는 주민들의 마음을 손쉽게 수인에 대한 증오로 곡해시킬 수 있었다.
어째서인지 에단과 레베카가 그 마지막 순간에 대해 입을 다문 것은 이를 이용하려는 이들에게 매우 유리하게 작용했고 말이다.
"... 남을 미워하는 마음으로 이어진 유대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더욱 성실한 믿음이야."
"흥.. 이번 용사는 부디 인간이기를 바라야지요. 세상의 명운이 달린 일에 어디 짐승 냄새 풍기며 사람 흉내나 내는..."
"우토 형제님..!"
그 노골적인 빈정거림에 다나 대주교가 목소리를 높였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제 말이 틀렸습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다나 대주교님! 역사적으로 단 한 번도 실패한 적 없는 신탁의 수행을 처음으로 수인이 용사가 되자마자 이 사달이 발생했습니다. 엘프가 마법사로 지목되는 것은 종종 있었다고는 하지만 대대로 저희 인간들이 모든 신탁을 맡아왔지 않습니까...!"
둘의 대화가 점점 과열되자 결국 주변에 있던 사제들이 그의 어깨를 붙잡는다.
겨우 진정하고 자리에 앉게된 그였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는 않는다.
"소란을 피워 죄송합니다 대주교님.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모두의 필요와 확실한 근거에 의해 이루어진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 참고하겠네."
다나는 떠올렸다.
자신이 어릴 적 보았던 용사 일행의 모습을.
세상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자신들을 위해 불구덩이에 몸을 내던진 이들을, 그 그림자만 보고도 감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공포스러운 존재와 맞서 싸운 이들을...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미워할 수 있다는 게 자신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으로 벽 안쪽의 평화가 지켜지고 있다는 것 또한 크나큰 모순이다.
어째서 우리는 모순된 삶으로 안정을 얻고 있는 것일까?
"..."
둘의 대립을 식은땀을 흘리며 지켜보던 순한 인상의 남성이 조용해진 가운데 조용히 손을 들어 올린다.
"저어.."
"... 호세르 형제님. 말씀하시게."
수인에 대한 민감한 화제로 인해 이곳에 모인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과열되었던 분위기가 가라앉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일까.
모두가 생각하고 있었지만 입에 담기를 꺼려 한 탓에 여태 나오지 않은 가장 중요한 안건을 그가 드디어 꺼내들었다.
"신탁이 내려왔다는 것은... 분명 잠든 용이 깨어날 날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
부글부글부글부글...
치이익......
대지에 발 디딘 저 사악한 존재의 열기로 인해 버티지 못하고 녹아내린 땅은 그것도 모자라 주변으로 불덩이를 튀기며 맹렬히 끓어오르고 있다.
눈앞은 열기로 인해 계속해서 흐릿해져가고, 숨을 들이쉴 때마다 목구멍과 폐가 불타오르는 느낌이다.
아직 녹아내리지 않은 땅덩이를 옮겨 다니며, 나는 누군가의 등을 필사적으로 주시하고 있었다.
내가 그의 모습을 시야에서 놓치는 순간, 모든 게 끝난다.
그리고 내가 지쳐쓰러지는 순간, 역시 마찬가지로 모든 게 끝난다.
용암에 잠겨내리기 직전의 작은 땅덩이 위에서 나는 그를 끊임없이 치유하고 있었다.
치유를 단 한순간이라도 멈춘다면, 뜨겁게 달궈진 검 손잡이를 잡은 그의 손은 순식간에 뼈를 드러내고, 검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는 열기로 인해 자신의 살점이 끓어오르는 고통을 인내하며, 저 압도적인 절망으로부터 대적하고 있었다.
양손에 각각 쥔 검을 끊임없이 휘두르며, 놈의 몸을 발받침 삼아 민첩하게 뛰어오르며 하나하나 목을 베어낸다.
화염에 저항하는 마법을 몇 중으로 부여받았음에도 용암보다도 뜨거운 용의 몸통에 발을 한 번 디딜 때마다 두 다리에 불이 옮겨붙는다.
재빠르게 뛰어올라 불을 꺼뜨렸지만 치유의 속도는 겨우 따라가는 정도였기에, 그는 계속해서 몸이 불타오르는 고통을 인내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떨어진 거리에서도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울 정도인데... 그는 어떻게 저렇게 싸울 수 있는 걸까.
어째서 저렇게까지 싸울 수 있는 걸까.
나였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그는 해내고 있었다.
그보다 용사에 어울리는 이는 없다고 나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기어코 용의 여섯 번째 머리를 베어낸 순간이었다.
마지막 남은 머리는 생각을 바꿨는지 다음 공격을 위해 높이 뛰어오른 그의 빈틈을 노리지 않고, 아가리를 벌리고 그 깊고 어두운 목구멍을 내 쪽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이를 확인했는지 강력한 기운이 느껴지는 날카로운 얼음 기둥이 전신을 울리는 소름돋는 파공성과 함께 내 머리 위를 지나 눈깜짝할 사이 용에게 날아들었고, 이는 용의 몸통과 목구멍을 정확히 꿰뚫는다.
용은 크게 한 번 비틀거렸지만, 여전히 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무저갱처럼 느껴지는 그 목구멍에서는 여태껏 느껴본 적 없는 열기를 품은 불꽃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용의 몸에 박힌 얼음 기둥이 순식간에 깨어져 녹아내리고, 나는 몸 주변의 온도가 급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이 기회였다.
지금이야말로 용의 마지막 머리를 베어낼 기회였다.
"....!! ...!"
나는 노아를 향해 무어라 외쳤다.
하지만...
"... 에단...!"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