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15화 (15/137)

〈 15화 〉 4. 추모의 밤은 깊어만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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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추모의 밤은 깊어만 가고(2)

뜨거운 숨으로 가득하던 폐부로 서늘한 공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끼며, 나는 깊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신채 두 눈을 떴다.

그리고 눈을 뜨고나서는 한동안 그대로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딱히 울렁거리지도 않고, 미동조차 없는 낡아빠진 익숙한 천장에서 나는 마치 찾아야할 무언가라도 있는 것처럼 신경질적으로 노려보았다.

"...후우.."

아니, 이런 의미 없는 기싸움은 하지 않기로 했었지.

온몸이 식은땀으로 뒤덮여 발작하듯 몸을 일으켰던 이전과는 다르게 담담하게 눈을 떠 침착을 유지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다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감았다.

그때의 기억은 내가 잠에 들 때면 어김없이 꿈의 형태로 찾아왔다.

이젠 수백 번, 수천 번은 더 본 그 장면은 내 뇌리에 남아 잊히지 않는다.

그럴 터였다.

하지만 그 기억 속 노아와 아가사의 얼굴만큼은 그 위로 누군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내 버린 것처럼 지저분한 상처들로 가득해 마주 볼 수가 없다.

그리고 이걸 억지로 들춰내 보려고 하면 할수록 나는...

"후..."

나는 재차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쉬며 뜨거워진 머리를 식혀나갔다.

기억해 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머릿속으로 한발 늦게 찾아온 짙은 안개를 받아들이며 나는 눈을 떴다.

나는... 무슨 꿈을 꾼 거지.

그러자 이제서야 주변이 제대로 눈에 들어온다.

"..."

바로 다섯 걸음도 안되어 보이는 거리에 멀뚱히 서있던 수인 소녀의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

그 눈동자를 마주하자, 어째서인지 침대맡에 놓인 내 오른손이 움찔한다.

경계에 따른 반사적인 반응 같은 건 아니었다.

조금 달랐다.

나는 오른손을 두어 번 쥐었다가 펴는 것을 반복하고는, 손바닥에 아직 미약하게 남아있는 낯선 기척에 나도 모르게 소녀를 바라보았다.

"... 이거."

"..."

무언가 물으려다..

소녀의 의아한 표정을 본 나는 고개를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착각이겠지.

나는 일어나자마자, 낡은 나무식탁 위에 올려져 있던 배낭에서 말린 과일을 꺼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리고 반쯤 남은 물통을 들어 목 안에 전부 쏟아 부으며, 잠에서 깨어나고부터 왜인지 모르게 남아있던 찜찜한 기분을 목을 타고 넘어가는 물과 함께 전부 털어내었다.

"...?"

묘한 시선이 느껴져 뒤를 슬쩍 쳐다보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소녀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도 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배낭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하필 내가 가만히 멈추며 조용해진 가운데 소녀의 배곯는 소리가 들려온다.

꼬르르륵...

자신의 배에서 난 소리에 당황이라도 했는지 소녀의 두 귀가 후드 아래로 잠깐 움찔하는 게 눈에 보인다.

허기가 진다면 그렇다고 말하면 될걸,

그래도 멋대로 배낭을 뒤지지 않은 점은 칭찬한다.

"... 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말린 과일을 주저 없이 전부 꺼내 테이블 위의 접시에 올려놓으려다 잠시 손을 멈췄다.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었다.

1년 동안 쓰지 않은 접시의 가쪽으로 크게 금이 가있는 것 이외에도 먼지가 두껍게 쌓여있는 것을 이제야 보았기 때문이었다.

번거롭지만 이것들이 담겨있던 주머니를 다시 꺼내 접시 위에 넓게 벌려 놓고는 그 위로 말린 과일들을 올려주었다.

"앞으로 배고프거나 졸릴 때는 먼저 말하도록 해. 나는 식사도 수면도 그리 규칙적으로 하는 편이 아니니까."

".. 응."

식욕도, 성욕도, 수면욕도 평범하게 느끼는 편이지만 수십 년간을 북대륙에서 지내온그 생활습관이 여태 남아있다.

유독 잠이 줄었다.마물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꿈을 꾸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라는 이유도 있다.

항상 똑같은 꿈을 꾼다는 것은 알고있으면서도, 이렇게나 말끔하게 꿈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오히려 모를 수가 없단 말이지.

"그리고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으면..."

"... 그거.."

"음..?"

나는 다른 이를 살피는 눈치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니 앞으로 말할 게 있으면 주저말고 하라고 말하려는데, 소녀의 손가락 끝이 방금 내가 접시 위에 주머니와 함께 올려놓은 마른 과일로 향한다.

"나.. 먹어도돼..?"

"..."

사람 말이나 끊고는..

배가 많이 고팠던 건지, 아니면 저 음식이 마음에 들기라도 했던 건지.

어차피 줄 생각이었다.

"그래."

내 허락이 떨어지자 소녀의 눈이 잠시 반짝인다.

잠깐이었지만 아직 어리기는 어리구나 하는 생각을 속으로 하며, 슬쩍 옆으로 비켜주었다.

용케 기척도 없이 슬그머니 다가온 소녀의 손이 접시 위의 말린 과일로 향하려던 그 순간.

그 손끝이 색색의 음식들에 닿기 직전에 내 손이 소녀의 가녀린 손목을 붙잡는다.

"아..."

경계 짙은 눈동자로 다시 되돌아와 나를 올려다보는 소녀였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손목을 붙잡은 건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손부터 닦고."

"..."

소녀의 부탁에 따라 이 숲까지 오는 길에 쓰러진 돌무덤들 수십개를 하나하나 되돌려 놓는 걸 제대로 기다려준 만큼, 소녀의 손은 흙먼지로 잔뜩 더러워져 있는 상태였다.

... 이건 닦는다고 될 문제가 아닌가.

신성한 기운을 식사 전 손 닦는 용도로 쓰는 것도 조금 우습지만 얼마 남지않은 식수를 쓰는 것도 낭비였기에, 나는 소매를 걷어올리려던 손을 다시 내려놓고 대신 정화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붙잡고 있던 소녀의 오른손을 먼저.

그리고 나머지 손도 건네라는 의미로 손을 까딱하자 의외로 얌전히 나머지 왼손을 내 손위로 올려놓는다.

"..."

빛나는 기운이 슬쩍 한번 맴돌다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손톱 안쪽의 구석구석까지도 깨끗해진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며 신기한듯 쥐락펴락해보는 소녀.

나는 편하게 먹으라는 의미로 배낭안의 남은 물통을 하나 또 꺼내 접시 옆에 내려놓고는 바깥으로 나왔다.

끼이이익...

낡은 오두막의 문을 열자 보이는 바깥은 눈이라도 내린 것처럼 바닥은 하얗게 뒤덮여있었으며, 그리고 여전히 내리고도 있었다.

이건 눈이 아니라 재라는 점에서 이미 큰 차이가 있었지만 내게는 오히려 눈내리는 풍경보다도 익숙했기에, 퍼석거리는 소리를 내는 쌓인 재를 밟으며 작은 오두막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 유독 커다란 나무 한그루가 서 있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크헤르르르르륵... 헤그르륵....."

그곳에는 온통 짙은 푸른색의 털빛에 머리에는 검은 뿔 네 개가 달린 커다란 덩치의 짐승형 마물 한 마리가, 배가 갈라져 내장이 밖으로 흘러내린 채 커다란 쇠말뚝에사지를 포함한몸 이곳저곳이 단단히 결박되어 옴짝달싹 못하고 있었 중이었다.

"..."

머리 위쪽으로 한 쌍, 그리고 턱 아래로 그것보다는 조금 짧은 뿔이 한 쌍 더 달려있는 게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인 이 이름 모를 마물은, 이런 꼴이 되고도 적의와 살의를 여전히 짙게 내뿜으며 붉게 물든 눈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다 죽어가는 숨소리를 내며 여전히 살아있는 마물을 별 생각없이 바라보며 그 앞에서 성호를 그은 나는,

놈의 입 안쪽으로 박아놓은 쇠 말뚝과 연결된 사슬을 주저없이 잡아당겼다.

뻑! 퍼걱...!!!

마물의 머리뼈는 꽤나 경쾌한 소리와 함께 비틀려 허물어지며 머리의 온갖 구멍으로부터 뇌수 섞인 피를 흘려대는가 싶더니 전신을 부들부들 떨다가 힘없이 고개를 떨군다.

"헤르륵.... 히르르르...."

놈의 숨소리가 멎는 것을 확인하고나서야 나는 발걸음을 옮겼다.

이 숲의 초입에서는 나름 먹이사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이 마물 덕분에 비교적 편하게 잠들 수 있었던 것이다.

수십 년간 북대륙에서 몸소 겪으며 얻어낸 몇 안되는 지혜.

이놈의 피 냄새만으로도 어지간한 마물들은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중 하나인데, 아직 살아남아 살기까지 흘리고 있다면 그 효과는 더 확실했다.

"그래, 덕분에 말이지.."

백년전 숲이 불타올랐을 때 죽었을 게 분명한데도 여전히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는 흑단나무들.

나는 마침 들고있던 사슬을 따라 손을 옮겨, 말뚝이 박힌 나무껍질 위에 손을 얹었다.

쩔컹! 그드르르르르륵...!

드르르르르르르극...!

나무에 박아둔 말뚝을 전부 회수해 사슬 뭉치를 어깨 위에 짊어지자 느껴지는 이 오랜만의 묵직한 감촉은 그리 반갑지 않으면서도 참 익숙하다.

즈즉.... 즈즈즉...

그 끝에 연결된 다른 말뚝에 박혀있는 짐승 마물의 사체가 질질 끌려오며 바닥을 긁는 소리를 낸다.

포획하는 게 어렵기는 해도, 수면욕과 식욕 두 가지를 동시에 해결해 주니 그 고마움에 성호를 긋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쿵...!

오두막의 뒷마당으로 돌아와 사체를 내려놓은 다음, 녹슨 말뚝과 사슬들이 잔뜩 쌓여있는 가운데 한쪽 벽면에 기대어 놓여진 투박한 모양의 대검 한자루를 잡아 들었다.

쌓여있던 잿더미가 우수수 쏟아졌지만 대검의 검날 주변으로 감싸둔 두꺼운 천 덕분에 날이 그리 상하지는 않았다.

훙...! 훙.....! 훙..!

내가 검을 쓰는 몸은 아니었지만, 이미 쓰러진 질긴 고기를 상대로 흉내를 낼 줄은 안다.

한 손으로 대검의 손잡이를 잡고 어색하게 몇 번 휘둘러본 나는, 앞으로의 끼니를 위한 해체작업에 들어갔다.

저 수인 소녀가 말린 과일 몇 개에 배가 부를 리도 없으니 말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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