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27화 (27/137)

〈 27화 〉 5. 악운의 교차점

* * *

5.악운의 교차점(7)

그날은.. 유난히 비가 쏟아져 내리는 밤이었다.

세차게 떨어져내리는 빗방울들이산산이 부서지는 큰 소리가 사방에서 귀를 울리고,

나는 비에 흠뻑 젖어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서 산길을 내달리고 있었다.

털썩!

주르르르륵...!

몇 번이고 물이 고인 진흙 바닥에 발이 미끄러져 넘어졌지만, 금방 다시 일어나 더욱 빠르게 달릴 뿐이었다.

쏟아지는 비 때문에 앞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지만, 산 아래.. 성벽 저 너머로 보이는 산탈라의 불빛을 따라 늦장을 부리는 다리를 재촉했다.

그렇게 왕도 산탈라를 감싼 성벽의 앞까지 도착했을 때.

나는 머리를 울리는 큰 빗소리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소리와 함께.. 처참하게 부서져 있는 성문을, 그리고 그 너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본 것은 거리를 밝힌 등불 따위가 아니었다.

화마의 불꽃이었다.

이 쏟아져 내리는 폭우 속에서도 꺼지지 않고 그 탐욕스러운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존재했던 흔적들까지도 모조리 불태우고 있었다.

.. 그때부터 나는 도저히 달릴 수가 없었다.

속으로 떠오른 확신에 가까운 불안에 나는 누군가 내 발목을 붙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건만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었다.

몸에 붙은 불이 꺼지지 않자 고통스럽게 몸부림치며 내 옆을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얼마못가 빗소리에 집어삼켜지고 있다

나는 멍하니 앞으로,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조차 가지지 못한 채 단지 걸어나갔다.

망령처럼 발걸음을 옮긴 그 끝에는, 이미 다 타버린 지붕이 반쯤 내려앉은 작은 집 한 채가 있었다.

고개를 숙이고 부서진 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가자 머리를 울리던 빗소리는 줄어들었지만, 대신 껍껍한 탄내가 코와 목을 틀어막는다.

그럼에도 찾아야할 무언가를 위해 안쪽으로 무심코 발을 내디뎠을 때.

퍼석.

하고, 무언가가 발밑에서 힘없이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건.. 분명 나무토막이었다.

이미 다 타고 겉이 까맣게 굳은 채, 그 안으로 곧 꺼질 불씨들을 껴안고 있는...

나무토막.

*

항구의 두 망나니들은 자신들이 일평생 꿈도 꾸지 못할 장소에 와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 정신을 못차리고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미숙한 티를 내고 있었다.

"여기는.."

나름 덩치가 있는 중견급의 상단주 정도나 되지 않는다면 올라올 수 없다는 객잔의 상층이다.

아랫층들과는 달리 한산하여 비교적 조용하고, 품위있는 발걸음으로 술잔과 술병이 올려진 옥쟁반을 들고 바쁘게 복도를 다니고 있는 객잔의 여인들도 하나같이 아름답기 그지없다.

"크흠."

"...!"

"이쪽으로 들어가십시오."

자신들을 강제로 잡아끌어 이곳에 던져넣었던 이들과 마찬가지로검은색 민무늬의 가면을 쓴 커다란 체구의 남성이 곧, 정신이 팔려있던 그들에게 다가가 손짓했고, 두 망나니들은 불안함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 상냥하지 않은 안내에 따라 어느 한 방의 안으로 들어갔다.

"... 실례.. 하겠습니다."

드르륵.. 탁!

"...!"

고작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에도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몸을 잔뜩 움츠려드는 두 사내들.

문이 닫히자 바깥의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기에 더욱 공포스럽다.

방음이 철저하게 되어있는 이 방안에서 이후 자신들이 어떤 꼴을 당하더라도 그 소리가 새어나갈 일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사향냄새도 휠씬 부드러운데다 복도의 모습만큼이나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방안은 중앙에 그 너머가 보이지 않도록 하는 장막 같은 것이 쳐져 있고,

앞으로는 마침 의자 두 개가 놓여 있다.

앉으라는 것일까? 라는 너무도 당연한 것 조차 몇 번의 걱정많은 시선 교환끝에 그들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자...

탁.

"...!"

조명이 켜지고, 장막 너머로 언제부터 앉아있었는지 모를 한 인영의 실루엣이 비친다.

그 실루엣의 머리 위로 적당히 길고 뾰족하게 솟은 한 쌍의 귀와, 미세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꼬리의 형상을 보게 된 둘은..

이 장막 너머로 '그녀'가 있다는 사실을 동시에 깨닫고는 숨을 죽였다.

도적들의 소굴이라고 할 수 있는 스폴리아리움의 명실상부 최고 권력자.

자신들이 와있는 이 금란객잔의 주인이자, 금란상단 상단주. 상인연합회의 회장까지 겸하고 있는 그 여우 수인이 틀림없었다.

"거짓 없이 고하도록. 그렇지 않으면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는 못할 테니."

전후 상황설명도 없이 장막 너머에서 들려온 그 날카롭고 고압적인 목소리에, 둘은 보이지도 않겠지만 서둘러 허리를 펴고 과할 정도로 자세를 바로 했다.

"오늘 너희가 검문 없이 지나가게 했던 관을 맨 남자는 금란상단의 중요한 손님이시다. 내가 직인을 찍은 허가증이 있었지만 서둘러야 하는 일정 때문에 미처 보여주지 못했다고 하더군."

"...!"

"....!"

아껴둔 연초들을 모조리 꺼내 태우며 까만 강물 앞에서 이 비루한 삶의 미련에 대해 생각해 보는 마지막 여유를 가졌던 이들은, 신고를 위해 가까운 상단으로 향하던 도중 검은 가면의 사내들에게 붙잡히다시피 하여 이곳까지 끌려왔던 것이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라면.. 어째서 번거롭게 자신들을 이곳까지 끌고 왔는지에 대한 것인데...

"그래서..."

꿀꺽..

".. 너희가 본 건 그 남자뿐이었나?"

"...?"

"..."

자신들 따위가 있어서는 안될 것같은 이 장소와 그녀의 목소리가 자아내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이는 사내는 살아남기 위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었다.

지금 자신들은 미녀의 탈을 쓴 야수의 아가리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말이다.

... 어째서 자신들을 이곳까지 데려온 것인가..

뭔가 문제가 생겼다면 널리고 널린 망나니들 중 하나일 뿐인 자신들의 목 따위, 그녀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것 정도로도 손쉽게 떨어뜨릴 수 있을 텐데...

그런 상대가 지금 친히 자신들을 불러 단두대 위에 서게 한 것이다.

.. 그 이유가 있을 터였다.

"..."

"그게..."

".. 예, 그렇습니다."

"영감님..?!"

자신들이 본 수인 소녀에 대해 말하려던 다른 한 명의 망나니는, 자신의 말을 끊고 들어와 곧장 거짓을 고하는 그를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거짓을 고하면 죽이겠다고 분명 그렇게 말하는 것을 같이 들었을 텐데 어째서 거짓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눈빛이다.

"... 무슨 일이지?"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영감님, 하지만.. 읍..!"

영감이라고 불린 망나니는 그의 입을 틀어막으며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취한다.

".. 다시 한번 묻지. 너희가 본 건 그 남자뿐이었나?"

입이 틀어막힌 남자는 그제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신의 멍청한 그 반응 때문에라도 저 녹록치 않은 상대는 분명 거짓을, 혹은 그 낌새를 분간해낼 수 있었을 텐데도.. 그 어떠한 추궁 없이 그저 다시 묻고 있을 뿐이다.

"예, 그렇습니다. 그 남자 이외에 강을 건너온 자는 없습니다."

"... 마, 맞습니다. 저희는 그 남자 한 명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빠르게 동조하여 상대에게는 보이지 않을 텐데도 고개를 열심히 끄덕인다.

그 노력이 닿은 것일까?

"그런가, 이만 가 보도록."

탁.

장막에 실루엣을 비추던 불빛이 사라지고, 자신들의 앞에서 느껴지던 존재감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자 둘은 당황하면서도 쉽사리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지 못한다.

"....."

"..."

"끝난.. 건가?"

얼마를 기다려도 별다른 지시나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기에 둘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일어서 문앞에 섰다.

드르르륵...

문은 잠겨있지 않았고, 복도 앞에는 자신들을 안내해 준 그 검은 가면의 사내가 가만히 서있다.

"이.. 이만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가면의 사내는 그들을 힐끗 한 번 보았을 뿐 그 이상 관심을 보이지는 않는다.

"..."

묻지도 않은 말을 불안함에 내뱉고,도망치듯 객잔을 나서면서 둘은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검은 가면의 이들이 쫓아오지는 않는지 확인했다.

화려한 객잔 입구에서 벗어나 자신들에게 어울리는 어둡고 축축한 골목길에 들어가고 나서야 다리가 풀려 쓰러진 그들은,좁은 골목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빗방울에 바짝 마른 목을 급하게 축이며, 얼마 달리지도 않았건만 당장이라도 터질듯 쿵쿵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헉...."

"허억..! 헉..."

그녀가 자신들에게 했던 말과는 다르게, 거짓을 고하고도 자신들은 살아서 금란객잔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허억, 헉.. 영감님... 대체 어떻게..."

"하아... 후우우.. 이전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네."

"말이라니 헉... 어떤..?"

스폴의 밑바닥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망나니들 사이에서 우스갯소리로 도는 말이다.

"... 저 여자가 듣고자 하는 말은 진실이 되고, 듣고 싶지 않은 말은 거짓이 된다고 말이네."

거짓을 진실로, 진실은 거짓으로.

그녀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돈과 권력이 있다는 의미가 담긴 결코 웃지 못할 농담이었다.

자신들은 그녀가 원하는 진실을 대답한 것이고, 이는 앞으로.. 심지어는 자신들의 기억속에서 조차도 진실이 되어야만 했다.

"..."

"우리는 아무것도 못본 게야.. 오늘 있었던 일도 어서 잊어버리자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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