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6. 여우와 늑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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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여우와 늑대(1)
아득하던 정신이 아래로 끌어당겨지며, 현실로 돌아오는 감각에 나는 손가락 끝을 움찔했다.
"..."
얼마나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을까.
아직 눈은 뜨지 않은 채, 익숙한 듯 어딘가 낯선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호흡을 가라앉혔다.
솨아아아...
투둑.. 툭.. 투둑....
귀 언저리로 들려오는 빗소리, 그리고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들기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평소와는 다른 꿈을 꾸게 된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기억도 다른 기억들과 마찬가지로 저주에 삼켜져 버렸으면 차라리 편할 거라고 종종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정작 그렇게 할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나는 아마 그렇게 하지 않겠지.
툭... 투둑.. 툭.툭..
"..."
젖은 먼지가 섞인 무거운 공기.
특유의 비 냄새와 몸을 늘어뜨리는 이 분위기를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후..."
눈을 떴다.
보이는 건 화려하게 꾸며진 천장.
수의 집무실에 있는 그 침대 위라는 것을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깼어?"
끝부분에 붉은빛이 언뜻 섞인 밝은 갈색의 긴 머리칼과, 황금 장식을 달고 있는 뾰족하게 솟은 두 귀.
걱정과 반가움이 섞인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
".. 수."
일어났을 때 가장 먼저 보게 된 게 그녀의 얼굴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스으으윽...
말끔하게 복구되었을 몸이지만 꽤 오래 누워 있었던지 몸을 일으키는 게 그리 쉽지만은 않다.
"자."
침대 바로 옆에 의자를 가져다 두고 앉아있던 그녀는 내가 앉을 수 있도록 어깨를 잡고 몸을 일으키는 것을 도와준다.
"내가.. 얼마나 누워있었지?"
"이제 사흘."
나를 일으켜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물이 담긴 유리잔을 가져와 건네준다.
"아.. 고마워."
"고맙긴, 그래서..."
"..?"
말꼬리를 늘어뜨리며 날카로운 눈매가 슬며시 좁혀진다.
그녀의 시선은 내가 아닌 바로 조금 옆을 향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 아이는 누구야?"
"..."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몸 여기저기에 피 묻은 붕대를 감은 채 깊게 잠들어 있는 소녀가 몸을 누이고 있다.
작은 숨소리와 함께 가슴께가 위아래로 움직이며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상태가 정말 심각했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적룡교.
놈들이 분명 스폴로 건너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내가 정신을 잃기 전 보았던 이곳의 모습은 평소와 별다를 바 없이 여전했다.
트라사와 항구마을의 처참한 모습을 본 이후이기에 그들이 그냥 지나갔다고는 아무리 생각해도 받아들이기 힘들다.
".. 스폴에는 별일 없었어?"
"글쎄.. 이렇다 할 소란은 없었고..."
그녀의 차분한 표정과, 내가 깨어날 때까지 이렇게 옆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만 보더라도 짐작은 된다.
"당신이 오기 이틀 전, 항구에서 망나니 둘이 사라지고, 사공 하나가 돌아오지 않은 일이 있기는 했어."
그 민무늬의 흰색 가면을 쓴 사공이라면...
"망나니 둘은 모르겠지만 사공은 알아."
"응, 배 가지러 사람을 보내서 나도 소식은 전해 들었어."
초토화된 항구마을과, 사공의 죽음.
배는 사공의 시체와 함께 그곳에 남아 있었으니 아마 나처럼 쇠사슬 위로 건너간 게 틀림없을 것이다.
내가 상대한 그것들의 신체능력을 떠올려보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닐 테지.
"항구마을에서의 일에 휘말렸던 거야..?"
"... 아니, 마을이 그 꼴이 된 건 나도 모르는 일이야. 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적룡교도로 보이는 놈들에게 습격을 당했어. 그 과정에서.. 이 녀석이 나를 구하려다 다쳤고."
"그랬구나.. 그래서."
눈가에 힘을 푼 그녀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소녀를 바라보고 있다.
"아무튼, 별일 없었다면 됐어."
그 악운들 사이에서 결국 소녀는 목숨을 구했고, 수에게도 아직 별일은 생기지 않았다.
다시 생각해 보면.. 당장이라도 다시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소녀를 안고, 등에는 관을 짊어진 채로 스폴로 건너와 대체 뭘 어떻게 하려 했던 건지 모르겠다.
만약 순혈자를 흉내내는 그 괴물이 이곳에 하나라도 더 있었다면, 그나마 살릴 수 있었을 소녀마저 죽이는 판단이 되었을 것이다.
일단 도착하기만 하면 뭔가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나는.
"에헤.."
조용한 집무실, 잔잔하게 깔린 빗소리 사이로 들려온 어울리지 않는 웃음소리에 나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곧 눈을 가늘게 뜬 채 송곳니를 슬쩍 드러내며 배시시 웃고 있는 수를 볼 수 있었다.
"그랬구나아~?"
"...?"
"그래서 그렇~게 다급하게 나한테 왔던 거구나~?"
"..."
"기억 안나? 에단. 당신이 정신을 잃기 전에 나한테 했던 말?"
내가... 뭐라고 했었던가..
뭐라고 했지..?
"기억 안나는 척하는 거야?"
"아니... 그런 게 아ㄴ.."
"뭐, 늘 무뚝뚝하던 당신이니까.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해는 가. 아후후.."
아니, 내가 뭐라고 했는데..?
잔뜩 기쁜 표정으로 입가에 웃음을 놓지 않고 있는 그녀를 보니, 왜인지 모르게 낯이 간지럽다.
"몸부터 조금 씻고 올게."
괜히 자리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 내뱉은 말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바짝 다가와, 앉아있던 내게 몸을 들이밀며 아찔한 향수 냄새를 흘리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웃지 못할 농담을 한다.
"어머, 같이 씻을까?"
"그런 거 아니니까.."
"그런 거? 뭐가 아니라는 걸까? 비 때문에 몸이 끈적끈적해서 나도 마침 씻으려는 것뿐인데."
"..."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내 쪽으로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지는 그녀를 겨우 밀어내고, 나는 침대에서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처음보는 옷으로 갈아입혀져 있다.
"... 내 옷은."
"저기 책상 위에, 일단은 수선해뒀어."
그녀가 손가락 끝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책상으로 다가가자 그 위로, 찢어진 부분 위주로 최대한 수선을 하고 세탁까지 마친 듯 보이는 내 사제복이 곱게 개어져 있었다.
그런데...
"... 엉망인데.."
덧댄 하얀 천 위로, 하나같이 삐뚤빼뚤하고 불규칙적인 간격을 보여주는 실자국들.
빈곳 없이 제대로 꿰매어져 있다는 게 새삼 놀라울 정도다.
"말이 심하네..! 내가 직접 한 거거든..?"
"왜 시키지 않고."
그렇게 할 일이 없었나?
하긴, 아무것도 안하고 사흘간 옆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으려나.
"으.. 그야... 됐어, 빨리 씻으러나 갔다 와."
잘만 했는데 뭘,이라고 작게 투덜거리며 사제복을 들어 내 쪽으로 던지듯 건네준다.
그러고 보니..
"아, 주머니 안에 작은 돌 하나.. 있었을 텐데."
그만큼 격렬하고 정신없는 상황이었으니 어디 떨어져 버렸어도 이상하지 않지만..
"아, 이거 말하는 거지? 왜, 중요한 거야?"
"아니, 그냥.. 있으면 됐어."
주머니 안에 있던 걸로 보이는 구겨진 종이 몇 장 그 위로, 검은색 단검과 함께 놓여있던 작은 돌멩이를 집어올린 그녀에게 나는 가볍게 고개를 저어 보이고는 곧장 익숙한 복도를 따라 욕실로 향했다.
쏴아아아아...
따뜻한 물줄기를 얼굴 위로 받으며, 그녀가 미처 닦아내지 못한 몸 구석구석 말라붙은 핏자국들을 지워나갔다.
그러다, 문득 나는 뿌옇게 변한 거울을 손으로 닦아내고 그 너머로 보이는 내 몸을 바라보았다.
그런 일들이 있었지만, 내 몸에는 작은 흉터 하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하다.
어쩌면... 셀틱에서 있었던 일 역시 단순히 내가 환각을 본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나는 내 기억과 현실에 대해서 조차 괴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적룡교."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곳에서는 소란을 일으키지 않은 듯 보인다.
강기슭의 안개처럼 사라져버린 것이다.
"스폴을 두고.. 놈들이 대체 어디로 향했다는 거지?"
파괴된 항구마을.. 목을 잃은 사공.
시골 마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는 이곳에, 트라사에서 그러한 학살극을 벌여놓은 이들이 그냥 지나쳤을 거라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신탁이 내려오고 며칠도 지나지 않아 벌써부터 놈들의 소행으로 보이는 일들이 연달아 일어났으니,앞으로 내 기억을 되찾기 위한 여정에 있어 필연적으로 적룡교와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겪지 않아도 될, 겪고 싶지 않았던 것들 앞에서 지금의 이 선택에 대한 깊은 후회와 절망에 빠지게 되겠지.
"..."
거울이 다시 수증기에 뒤덮여 뿌옇게 변해갔지만 나는 여전히 거울에 놓은 시선을 떼지 않은 채 흐릿해져가는 나를 바라보며 홀로 중얼거렸다.
"앞으로 나는..."
앞으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