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38화 (38/137)

〈 38화 〉 7. 벽 안의 사람들은

* * *

7.벽안의 사람들은(2)

이곳에도 마물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북대륙에 비해서야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을 수 있는 정도다.

다만 스폴을 기점으로 증발하듯 사라져버린 적룡교의 흔적에 대해서 만큼은 여전히 의문이 풀리지 않았기에, 나는 소녀에게 발걸음을 맞추고 있는 중이었다.

크고 작은 언덕 하나를 넘을 때마다 그만큼 바실리카와 가까워 지고 있다는 생각에 괜히 발걸음이 무거워 졌지만, 그때마다 하나씩 던져지는 소녀의 질문에 적당히 대답하거나 하지 않으며 걷다 보니 어느새 강 너머의 성벽 외곽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이제.. 저 다리만 건너가면 바실리카의 성문을 마주할 수 있다.

"...?"

다시 그 숨 막히는 공간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발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느끼던 나는, 예상하지 못한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그자리에 멈춰섰다.

"왜 그래..?"

높은 벽 너머에서 성양구의 빛이 하늘을 비추고 있다. 물론 저건 그리 이상하지 않은 일이지만 내가 보고 멈춰선 것은 그것보다는 조금 아래,

빛을 등진 성벽의 어두컴컴한 그림자 아래에는 보기 힘든 인파가 북적거리고 있다.

사라졌던 적룡교가 나타난 것은 아닌지 경계했지만, 바실리카의 성문은 굳게 걸어잠겨 있었고 그 앞의 이들 역시 정체를 숨길 생각은 없는지 등불을 들거나 모닥불을 피우고 한데 모여 서 있었다.

여기서 먼 거리였지만 칙칙한 어둠 속에서 불을 피우고 있는 이들의 모습은 꽤나 눈에 잘 띈다.

그 수는 어림잡아 백.

이 많은 사람들이 스폴에서 온 거라면 분명 그 움직임이 수의 귀에 들어갔을 텐데 그녀에게서 별 다른 말이 없었던 걸 보면, 저들은 남대륙 베헤멘티아의 왕도 모르부스에서 온 이들일 가능성이 크다.

이건 곤란하다. 나와 소녀가 바실리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하나뿐인 성문을 열어야 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성문 앞에는 정체모를 이들이 진을 치고 있다.

돌아갈 다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닌만큼, 정말 곤란하다.

"..."

나는 먼저 강물을 따라 흔들거리고 있는 다리 위로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에 따라 소녀도 성큼 다리 위에 올라선다.

커다란 부유물들을 강에 띄우고 이를 각각 사슬로 연결하여 두 땅 사이를 연결해 놓은 구조인 만큼, 수면 아래의 빠른 유속 때문에 강이 꿀렁일 때마다 그 위를 요란하게 뒤흔들어 온다.

단단한 대지 위에서 평생 살아왔을 소녀이기에 흔들리는 바닥 위에서 난색을 보이지는 않을까 생각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소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앞으로 잘 걸어가고 있었다.

저 커다란 배낭까지 맨 상태로.. 수인의 뛰어난 신체능력 때문인 걸까?

뭐.. 덕분에 쓸데없는 시간 낭비를 줄였다.

그리고, 지금 내 관심은 오롯이 다리 너머의 저들에게로 쏠려있었다.

터벅.

흔들리는 다리 위를 지나 드디어 바실리카의 땅을 밟자발끝에 닿는 견고한 대지의 감촉.

아마 이 땅에서 느낄 수 있을 처음이자 마지막 유쾌함이라고 할 수 있겠다.

"...."

"..."

예상은 했지만, 당연하게도 낯선 이의 등장에 북적이던 인파의 시선은 빠르게 이쪽으로 쏠렸고, 나는 소녀가 제대로 후드를 쓰고 있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 사제..?"

사제복을 입고, 등에는 관을 짊어진 장신의 사내와, 후드를 뒤집어쓴 소녀의 조합은 그리 흔한 게 아닌지라 관심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입고 있는 사제복은 그들의 시선을 끌어당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사제님...! 사제님이십니까..?"

뻔히 눈에 보이게 사제복을 입고서, 아니라고 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손에 정화의 기운을 미약하게 담아 소녀의 입과 코 위를 가볍게 덮은 채 뒤쪽으로 끌어당겼다.

"사제님..? 쿨럭쿨럭...!"

가까이에서 확인한 그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정상이 아니다.

머리는 듬성듬성 빠지고, 거칠게 일어난 피부에는 발진과 더불어 처음 보는 검붉은 반점들이 가득하다.

반점의 크기는 작은 점에서 어깨 한쪽을 다 덮을 정도까지 제각각으로, 아예 검게 변해버린 것도 보였으며 검게 변한 곳을 중심으로는 살점이 썩어 문드러지며 진물이 흘러나와 악취를 풍기고 있다.

게다가.. 이들의 수가 백 정도라고 생각했던 건 섣부른 판단이었다.

강 너머에서는 보지 못한, 바닥을 빈틈없이 메우고 쓰려져 있는 이들이 이백.

거의 삼백에 달하는 숫자다.

바닥에 몸을 누이고 있는 이들 중에서는 간간이 기침을 내뱉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정신을 잃은 것인지 아니면 이미 목숨이 끊어진 것인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는 이들도 있다.

틀림없다. 역병이다.

"모르부스에서 온 건가."

"쿨럭.. 쿨럭...! 그렇습니다..! 저희를 좀 살려 주십시오...! 저희는 신탁의 빛을 보고 이곳까지 온 겁니다...!"

왕도 모르부스에는 그래도 아직 사람들이 꽤 많이 남아 있다고 들었다. 내가 이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금방 예상한 것도 그 때문이고.

하지만.. 역병이 돌았는데, 왜 이들이 바실리카로 향했는지는 의문이다. 왕도 모르부스는 바실리카와 마찬가지로 성문을 걸어닫고, 아직까지도 왕과 귀족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도시였다.

그곳 역시 베헤멘티아 중앙 대성당이 있고, 바실리카 만큼은 아니지만 많은 사제들이 있을 터였다.

그저 빛줄기만을 보고,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모르부스를 빠져나와 이곳까지 온 것에는 분명 어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백 년 동안이나 굳게 문을 닫고 있었던 바실리카의 문을 다시 한번 두드린 것에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도록 그들을 몰아세운 이유가 분명히...

"어머니가 사흘 전부터 일어나지를 않으셔서... 제발.. 제발 치유를...!"

"치유를 부탁드립니다. 사제님... 쿨럭! 쿨럭.."

하지만 뭔가를 더 묻기도 전에 내 쪽으로 몰려드는 그들에게 밀려, 다리 위로 다시 올라서게 되었다.

차라리 흔들리고 있는 다리가 등 뒤로 있었기에 망정으로 그들은 더 밀고 올라오지 못한다.

"..."

나는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말해, 이들을 치유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곳은 바실리카의 성문 앞이다.

이곳에서 사제복을 입은 내가 치유를 행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떠올려 본다면 망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부탁드립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사제님...! 제 어머니를.. 어머니를 살려주십시오..."

노쇠하고 비쩍 마른 몰골의 모친을 등에 업고서는 그 상태로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빌어온다.

"에단..."

그 모습이 안타까웠던지 소녀의 입으로부터 내 이름이 새어 나왔다.

다행히 그 위로 가려진 내 손과, 강물이 굽이치는 소리 덕분에 그들은 내 이름을 제대로 듣지 못한 모양이었지만.. 이대로는 곤란했다.

"제발 우리를 구해주십시오...!"

여기서 이들을 치유해 버리면, 바실리카의 백년의 침묵을.. 그것도 인류 배반자라고 불리는 내가깨버리는 것이 된다.

그들에게 치유를 행하는 것은.. 벽 안의 이들이 여태 보고도 보지 못한척, 들어도 듣지 못한 척 해 온 것을 나 홀로 큰 소리로 외쳐버리는 것과 같았으니 말이다.

"..."

의미 없이 굳게 닫힌 성문을 노려보았지만, 말그대로 의미 없는 행동이었을 뿐.

분명 안쪽에서도 바깥의 동향을 살피고 있을 테지만

성문은 여전히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가.. 대체 어떻게 해야.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이 난관을 문제없이 넘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을 때였다.

덜컹...!!

드드득.... 끄그그극...

묵직한 무언가가 내려앉는 소리,

그리고 땅이 거칠게 긁히는 소리와 함께..

절대 열리지 않을 것 같았던 바실리카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이이이이익!

"성문이..!!"

"....!"

"성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다...!!"

바실리카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이들의 관심은 정말 순식간에 내게서 떨어졌고,

모두가 서둘러 성문 안으로 들어가려 발길을 돌린 순간. 안쪽에서부터 잘 정렬된 발소리가 울려오기 시작했다.

척. 척. 척. 척. 척. 척.

긴장감을 자아내는 그 소리에 무작정 안으로 뛰쳐들어가려던 이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선다.

번쩍이는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병사들이 가장 앞의 말을 타고 있는 이를 따라 사제들을 호위하며 바깥으로 나오고 있다.

후미의 병사들은 열려있는 성문 앞을 가로막고, 앞의 병사들은 그들의 등장으로 굳어있던 사람들은 한쪽으로 몰아, 사제들이 앞으로 나올 공간을 마련해 준다.

사제들과 사람들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갑옷의 벽이 일제히 열리고, 그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호위도 없이 앞으로 홀로 걸어 나온 건 익숙한 얼굴이다.

"저는 과분하게도, 바실리카의 대주교를 맡고있는 다나라고 합니다."

그녀는 몹시 미안함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들을 어루살피고는 주교관을 잠시 벗어 손에 들고 그들에게 고개 숙여 사죄한다.

"먼 길 오느라 힘드셨을 것을 압니다. 너무 늦게 여러분들을 맞이할 수 있게 되어..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지금부터는 바실리카에서 여러분들을 책임지고 치유해 드리겠습니다."

그녀가 손짓하자, 사제들은 각각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이들의 사이로 파고들어가 차례차례 두 손에 은총을 모으고 치유를 행하기 시작한다.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으니, 묵직한 발소리가 하나이쪽으로 가까워진다.

터벅. 터벅.

"오랜만입니다. 에단."

내 이름을 부르는 걸걸한 목소리.

낯설지 않은 그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어 말을 타고있는 이를 올려다 보았다.

".. 딜런."

"배웅해 드리지 못해 아쉬웠는데, 어떻게 마중은 나올 수 있었습니다."

말에서 내린 그는 투구를 벗고 이쪽으로 걸어온다.

나와 비슷할 정도의 장신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압도되는 건장한 덩치를 가진 사내.

바짝 자른 짙은 푸른빛 머리칼과 잘 정리하지 않는지 짧게 자라난 수염,군인보다는 용병같다는 인상이 물씬 풍기는 그의 진한 눈썹과, 턱 아래에서부터 왼쪽 뺨으로 길게 이어진 흉터가 눈에 띈다.

"..."

"당신 덕분입니다. 우토가 어지간히 고집이 세야지요."

"이게 왜 내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마침 곤란할 때 잘 나와 줬어."

"하하..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제가 힘을 쓴 건 아닌지라.. 따지자면 전부 대주교님의 덕분이죠."

딜런은 시원하게 웃으면서도 내가 뒤로 숨긴 소녀를 흘낏 바라보며 넌지시 묻는다.

"수인 소녀로군요. 직접 데려오신 겁니까?"

귀와 꼬리도 제대로 가리고 있었지만 잠깐 본 것만으로 소녀의 정체를 정확히 짚어오는 딜런.

그 목소리에 담긴 확신에 발뺌은 소용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 그래."

"참 뭐랄까, 항상 곤란한 상황을 가져오시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내 침묵에 썩 무안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소녀에게로 다가서는 딜런.

그러자 소녀는 당연히 낯선 그를 경계하며 내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고, 딜런은 다시 한번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흠흠.."

잠시 목을 가다듬은 딜런은 들고 있던 투구를 팔 안쪽으로 고쳐 잡고는 멋들어지게 한쪽 무릎을 꿇고 소녀에게 한쪽 손을 내민다.

"바실리카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꼬마 아가씨. 저는 이곳의 경비대장을 맡고있는 딜런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그 이름을 들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

나름 친절함을 호소하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것도 저 덩치로 하면 괴상한 꼴로 보일 수밖에 없다.

소녀는 내 뒤로 완전히 모습을 숨겨버렸고, 딜런은 멋쩍게 웃으며 일어나 다시 내게 말을 건다.

"하하하. 아무래도 저는 아이들과는 잘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째서일까요."

".. 글쎄."

이유야 알 것 같았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기로 했다.

"하하... 하아.. 그럼, 호위해 드리겠습니다. 우토의 지시로 나오지 못한 사제님들도 많아서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할 겁니다."

확실히..

기세 좋게 나오기는 했지만 치유를 행하고 있는 사제들의 수는 고작해야 스물 남짓.

평범한 사제들이 하루에 치유할 수 있는 이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은 데다가 단순한 상처가 아닌 역병이니만큼, 치유가 끝나고 나서는 사제와 병사 모두에게 재차 정화를 하는 작업 또한 필요했기에 안그래도 적은 사제들을 나누어 뒤에 따로 남겨둔 것이 보인다.

"... 그러지. 지금 나서야 내게도 유리할 테니."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어, 그만큼 또 곤란하게 할 테니까."

철그럭. 철그럭.

투구를 다시 뒤집어쓰고 나를 따라오는 딜런의 갑옷이 움직일 때마다 서로 부딪히며 내는 철성을 들으면서,

나는 소녀의 후드를 더욱 깊숙이 눌러 귀를 가리고 치유를 기다리는 이들에게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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