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7. 벽 안의 사람들은
* * *
7.벽안의 사람들은(3)
성문 앞에 지어진 난민들의 임시 거처에서는 다음 아침 예배가 다가올 때까지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사제들은 쉬지 못했고,조금 떨어진 곳에서 커다랗게 일렁이고 있는 불길.. 저 시꺼먼 연기는 그들이 가져온 짐들을 태우며 치솟아 오르는 것이다.
역병에 대처하는 방법이라고는 은총을 통한 정화 이외에는 오직 불태우는 것뿐이었기에, 병자들을 치유하기에도 버거운 지금 저 불길은 더러운 역병과 함께 그들의 흔적을 불사르고 있다.
"깨끗한 의류와 식사에 필요한 식기류는 이쪽에서 받아 가십시오!"
"모두 충분히 있으니 제대로 줄을 서시길 바랍니다!"
치유를 받아 기운을 차린 이들은 허락받은 몇 가지 작은 물건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불 속에 던져 넣어 남아있을지 모를 역병의 가능성을 태워없앴고,깨끗한 옷으로 환복한 이후에나 그들은 지친 몸을 누이기 위해 천막으로 향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제님."
"..."
낡은 천으로 감싸인 허름한 침상 위에 몸을 누이고 편안한 표정으로 고른 숨을 내뱉고 있는 모친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사내는 연신 내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전했다.
그녀의 몸을 뒤덮고 있던 검붉은 반점은 피부 위에서완전히모습을 감추었고, 이미 썩어들어간 부분에 대한 처치도 어느정도 끝내둔 상태이기에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다.
"사제님이 아니었다면.. 저와 어머니는.. 전.."
감사할 필요는 없다.
전부 필요에 의해서 한 일인데다
대가도 받을 생각이었으니까.
"치유의 대가로, 몇 가지 묻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뭐든지.. 제가 아는 것이라면 뭐든 대답해 드리겠습니다."
"먼저, 모르부스의 현 정세에 대해 자세히 듣고 싶군."
"..."
이들은 왕도 모르부스에서 왔다고 했다.
그러니 이것은 그에게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닐 텐데도, 얼굴에는 수심이 짙어져가고 선뜻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태껏 치유해 준 이들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이처럼 한결같은 반응이었고, 그 이유는 달리 있는 게 아니었다.
"... 그곳은.. 이미 틀렸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고향을 포기했으며, 또한 두려워 하고 있었다.
".. 흠."
이걸로.. 이쪽은 마지막인가.
"후우.."
한참 굽히고 있던 허리를 이제서야 펼 수 있게 된 나는, 사지로 들러붙어 오는 피로감을 떨쳐내며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 여유를 가졌다.
"안됩니다..! 안됩니다!! 제 아이는 치유를 받아야 합니다...! 사제님..! 사제님!!"
이미 숨이 끊어진 이들을 병사들이 옮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몇몇은 한때 가족.. 혹은 지인이었을 싸늘한 주검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아 병사들을 곤란하게 하기도 한다.
"당신들이.. 당신들이 조금만 더 일찍 나와줬더라면...! 조금만 빨리 문을 열어주었다면.. 으읍..!!"
"아닙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는 충분히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지금 제 아내가.."
저 시체들은 인도적 차원에서 사제들의 진혼기도를 받게 되겠지만, 결국에는 지금 꺼먼 연기를 뿜어내고 있는 저 짐더미와 마찬가지로 불태워질 거라는 걸 안다.
시체에 남은 역병을 정화하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저들을 모두 매장하여 묘비를 세울 수 있을 만큼 넓은 땅이 바실리카에는 없었으니까.
"..."
우리는 역병을 태우는 걸까.
아니면 우리의 책임을, 핑계와 함께 태우고 있는 걸까.
문득 떠오른 의문이었지만, 어느 쪽이든 결국 한줌 재가 되어 옅은 바람에도 쉽게 흩어져 버릴 것을 알기에, 나는 이 탄내가 괜시리 쓸쓸하게 느껴졌다.
"수고하셨습니다. 에단."
"..."
치유를 기다리며 줄을 서있는 이들의 수가 확연히 줄어들어 있는 게 보인다.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어가는 듯한 이 분위기는 사제들의 피로한 얼굴에 떠올라있는 희미한 미소를 보면 알 수 있다.
역병이라는 재난이 가져온 절망이그들의 삶의절반을 기어이 집어삼키고 나서야 드디어 사라질 기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절그럭. 철겅.
자리에서 일어나 딜런이 곁에서 맡아들고 있던 그녀의관을 건네받고, 사슬을 둘러매었다.
내가 치유를 하는 모습을 많은 이들이 보았고 마침 경비대장인 딜런도 옆에 있었으니, 성 안으로 들어간다면 지금이 가장 적기일 것이다.
"딜런, 대주교님은 어디에 계시지?"
"아마 우토와 계실 겁니다."
".. 쯧."
그 녀석과는 그다지 얼굴을 마주치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 배낭."
"..?"
성문으로 막 발걸음을 옮기려던 차에 뒤쪽에서 들려온 소녀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돌렸고, 소녀가 그자리에 멈춰서서 딜런을 향해 두 손을 내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언제 챙겼는지 소녀가 매고 있던 배낭을 딜런이 대신 들고 있다.
"음.. 그러니까, 이 배낭은 제가 들고 있겠습니다. 평범한 여자아이에게는 아무래도 무거워 보였거든요."
"..."
단번에 수인이라고 눈치챈 건, 제 몸만한 가방을 거뜬히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녀의 손목을 잡아끌어 내 옷자락을 붙잡게끔 했다.
"덕분에 부담을 덜었습니다. 사제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지나가자 사제들 중 몇몇은 잠시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쓸데없이 인사를 해오기도 한다.
때문에 괜히 시선이 쏠리는 일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딜런이 함께 있기 때문인지 별다른 확인 없이 길을 비켜준 병사들 덕분에 나와 소녀는 비교적 쉽게 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아예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과 이미 들어온 이를 내쫓는 것 사이에는 비슷해 보일지 몰라도 꽤 큰 차이가 있기에, 우선 첫 단추는 제대로 끼웠다고 할 수 있겠지만..
"...! ..!"
".....!"
성벽을 통과해 안쪽으로 들어가는 좁고 어두운 통로의 저편에서부터 들려오는 격양된 두 목소리.
"우토 형제님, 이제는 우리들이 바실리카의 성문을 열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들이 모르부스에서 이곳까지 찾아온 것에는 아직 미심쩍은 부분이 많습니다. 성문 앞의 공간을 내어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고도 넘치는 배려입니다."
"언제까지고 문을 닫고 있을 수는 없네. 신탁이 내려온 이상 구원의 그 때는 올 것이고, 우리는 성양구보다도 높이 떠오른 태양을 볼 수 있겠지."
".. 저는 그렇게 확신하지 않습니다."
"..."
"제 불경한 발언을 용서하십시오. 하지만 구원의 실패를 이미 한 번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단 한 번의 실패로 우리들이 이 땅에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마저 부정하지는 마시게."
양보없는 논쟁 끝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한숨소리만이 나지막이 들려올 뿐이다.
".. 제 생각은 바뀌지 않습니다. 구원이 불확실한 지금, 난민들을 벽안으로 받아들인다는 결정은 당장은 문제없을지 몰라도 새롭게 생겨난 난민들이 더 모여들고 밤이 길어질수록.. 모두를 파멸로 이끄는 어리석은 결정이 될 것입니다."
서로 한 발도 물러서지 않는 팽팽한 신경전은 아무래도 성문 앞을 내어준다는 절충안으로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철그럭, 철그럭.
쩔그렁, 철겅.
갑옷의 쇳소리와는 조금 다른, 쇠사슬이 서로 부딪히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인지 둘은 거의 동시에 내 쪽을 돌아보았다.
".. 에단."
"...!"
무사해 보여 다행이라고 말하는 듯한 대주교님의 표정과는 상반되게, 나를 보자마자 경기를 일으키며 이마에 굵은 핏줄을 세우는 사내.
"배반자.."
그가 나를 보며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 같은 유별난 반응을 보이는 이유에 대해,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면전에서 멸칭으로 부르는 것 정도는 가볍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 경우이고, 그가 스스럼없이 입에 담은 배반자라는 세 글자에 대주교님이 입술을 깨물고 주의를 주듯 시선을 보낸다.
물론 그 따가운 시선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우토 발헤인.
빛바랜 백금발을 짧고 단정하게 정리하고, 고급스러운 원단의 주교복을 입고 있는 그는, 마흔 정도의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대주교에 버금갈 정도로 바실리카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이였다.
그가 뛰어난 신성문을 사용한다거나 가진 재물이 많다거나 하는 의미가 아닌, 그를 따르는 사제들이 많다는 의미이다.
"할 말이 있으니 일단 자리를 옮겨야겠는데. 신탁에 대한 것도 듣고 싶고."
".. 우선 그 옆의 아이에 대한 설명을 먼저 해야할 겁니다. 바실리카의 주민으로는 보이지 않는데, 멋대로 규율을 어기고 벽 안으로 외부인을 들인 것이라면 당신에게는 엄중한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역시, 그냥 넘어가줄리 없나.
"..."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외부인이로군요?"
당장 끌어내라는 말을 하고 싶겠지만 그는 우선 딜런의 눈치를 본다. 사제들은 몰라도 병사들은 그가 아닌 딜런의 명령을 따랐으니 말이다.
"딜런, 바실리카를 수호하는 신성한 의무를 지닌 당신께서는 어째서 자신의 의무를 눈앞에서 저버린 것입니까."
"음, 죄송합니다. 그게 아무래도..."
우토의 꾸짖음에도 딜런의 표정에는 딱히 변화가 없다.
"저는 사제님이 데려온 이 아이가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무리 어린 아이라고 할지라도 저자는 외부인입니다. 백년의 긴 시간동안 바실리카의 거주민들의 안녕과 평화를 지켜준 것은 규율! 그것을 어기려 드는 자는 그 누구든 이 바실리카에 남아있을 자격이 없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의 높아진 언성에 몸을 움츠러드는 소녀.
본의 아니게 많은 이들의 앞에서 힘없는 어린아이를 핍박하는 듯한 형세가 되자 그는 혀를 차며 한발 물러선다.
규율이라...
먼저 규율을 어긴 건 분명 이쪽이지만, 애초에 그 규율이라는 것도 정말 우습지도 않은 표현이다.
신의 전능과 자비를 입에 담으며 믿음을 전하는 자들이, 살아남기 위해 성문을 닫고 눈과 귀를 막은 것이 어떻게 신성한 의무나 규율같은 단어로 포장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어두운 하늘 아래, 그는 이 좁은 벽 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니 그렇게 믿는 것도 무리는 아닌가.
"바실리카에 용사는 도착했나?"
이대로 딜런의 어깨에만 짐을 지울 수도 없었기에 나는 우토가 반응할만한 단어를 섞어 말을 흘렸다.
"지금.. 용사라고 하셨습니까?"
"그 반응을 보면 바실리카로 향한 건 아니었나 보군."
".. 용사의 소식을 알고 있는 겁니까..?!"
그자가 용사인지 아닌지 아직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 반응을 보니 신탁의 내용은 내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용사는 어디에..!"
"이번에 여러모로 사건에 휘말렸던 터라.. 일단 자리를 옮기지. 듣는 귀가 많아서 좋을 이야기는 아니라서."
"그럼... 하아.. 일단 대성당으로 가시죠."
외부인인 소녀에게 끝까지 아쉬운 시선을 던지던 그였지만, 지금 당장 더 중요한 용건이 있으니 보류하기로 판단을 내린듯 끝내 시선을 거둔다.
나는 우토의 뒤로 우리를 압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리지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제들을 슬쩍 쳐다보았다.
분명 유리했던 자신의 위치가 중요한 대화를 앞두고는 오히려 반대로 작용하여 도통 소용이 없으니, 골치가 아픈 모양이다.
지금 대주교님을 따르는 이들 대부분은 바깥에 있을 테고..
그렇다면.
"딜런도 함께 듣는 게 좋겠군. 그놈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으니."
"그놈들이라면..."
".. 가서 이야기하지."
"윽..."
일부러 계속 짧게 말을 끊으니 이건 꽤나 효과가 좋다.
신탁이 내려온 이상 바깥의 정보가 고플 수밖에,
내 입에서 어떤 정보가 나올지 모르는 이상, 지금 만큼은 내쪽이 주도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두 번째 단추 역시 나쁘지 않게 채워졌다.
"....."
"..."
"엄마, 무슨 일이야...?"
"들어가 있으렴, 별일 아니란다."
성문에서부터 곧장 보이는 대성당으로 향하는 대로 위는 아직 성양구가 떠오르지 않아 어둠이 깔려있었지만, 주민들은 바깥이 대체 무슨 소란인지 등불을 손에 들고 집밖을 나와 불안한 눈빛으로 대로를 살피고 있다.
찬바람이 열린 문틈으로 새어들어갔던지 눈을 비비적거리며 걸어 나온 소년에게 자신의 외투를 둘러주고는 안쪽으로 다시 들여보내는 여인.
"..."
서로를 향하는, 그리고 이쪽을 향하는 저들의 시선에 나는 차마 말 못할 불편함을 느끼고 만다.
성양구가 떠오르기 전에는 뒷골목에 있고 싶지만.. 아무래도 그건 힘들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