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45화 (45/137)

〈 45화 〉 8. 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

* * *

8.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3)

아케라에서 가장 커다란 대륙인 남대륙 베헤멘티아의 남부에서 서부에 이르기까지,

한때 남대륙의 3분의 1을 뒤덮고 있었던 이 거대한 숲은 베헤멘티아 남부 대삼림이라 불리는 곳이다.

심판의 날 일어난 대화재로 인해 현재는 과거의 절반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거대한 이 자연 앞에 서게 되니 나 자신이 한없이 작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니 단순히 숲에 들어갔다 나오겠다는 정도의 마음가짐으로 저곳에 발을 디뎠다가는...

금방 나아갈 방향을 잃고 천연의 미로에 집어삼켜지고 말 것이다.

화르르륵.. 화륵.

타닥. 탁.... 탁..

조용한 가운데 모닥불이 나무를 태우며 불씨를 날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오고 있다.

매번 맡던 썩은 나무의 타는 냄새가 아니라는 사실만이 평소와 다르다.

"..."

꼬박 걸어 대삼림의 초입에 막 도착했을 즈음에는 소녀의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버렸기 때문에, 이곳에서 쉬고 체력을 회복한 다음 대삼림에 진입하기로 했다.

그러니 지금 바로 옆으로 고개를 돌리기만 해도 모닥불의 불빛이 비추는 거목들이 마치 성벽처럼 늘어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살아왔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높디높은 나무들의 두꺼운 기둥 사이로, 깊어질수록 짙어지는 어둠을 보고 있자니.. 마치 거대한 마물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정말이지 흉흉한 풍경이지만, 놀랍게도 대화재에 이어 찾아온 끝나지 않는 밤에도 불구하고 지금 저 나무들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저것들이 아직도 말라비틀어져 쓰러지지 않은 이유는 이번 여정의 목표이기도 한, 저 깊은 곳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의 나무.

세계수의 덕분이다.

대지에 단단히 뿌리내린 세계수는 가히 대삼림 전체에 퍼져나가 숲 그 자체로 이어져 있다고 하던데..

나도 한번 멀리서 세계수를 본 적은 있으나 이는 그저 들은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도 지금 눈앞에 살아있는 이 거목들은 세계수가 저 안 어딘가에 마찬가지로 잘 살아있다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이기도 했기에, 종착지가 확실히 존재한다는 사실 덕분에라도 여태까지의 여러 짧은 여정들 중에서는 단연 이번이 가장 유쾌하다고 할 수 있겠다.

화르르륵... 화륵.

타닥... 탁..

"..."

하늘에 닿을 정도로 솟아오른 나무들을 계속 올려다보고 있다 보니 목이 뻐근했기에 다시 모닥불로 시선을 돌린 나는, 열기로 인해 금방 눈이 뻑뻑해지는 것을 느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그대로 눈을 뜨지 않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계속 손에 쥐고 있던 그 작은 돌멩이를 괜히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손가락 사이의 틈새를 채우며 지나다니는 맨들맨들한 감촉을 느끼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 조용하네."

보통 이때쯤이면 찾아와야 할 지겨운 두통은, 어째서인지 신탁에 따르기로 결정한 그때부터 비교적 잠잠해졌다.

내게 내려진 이 저주에 대항하려고 하거나, 내가 조금이라도 과거의 흔적을 더듬으려고 할 때면 집요하게 찾아와 나를 괴롭혔다는걸 떠올리자면.. 두통이 잦아든 지금이 오히려 더 불안하다.

내가 지금 나아가고 있는 방향이 바로저주가 바라는대로 일지도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말 그렇다고 해도, 내게 남은 다른 선택지라고는 뒷골목의 주점에 틀어박히는 것 말고는 없었기에 이대로 신탁을 따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저주 자체에 자아나 의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만약 있다고 한다면 그건 그 사악한 용의 의지일 텐데, 어째서 놈과 다시 마주하여 쓰러뜨리기 위한 신탁에 따르고 있는 나를, 저주는 아무런 제지도 하지 않는 걸까.

"하아..."

한숨을 내쉬며 그제서야 쭉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두통이 사라지니, 쓸데없는 생각만 늘어나 머리를 가득 채워온다.

어느 쪽이 더 나은가 생각해 본다면 글쎄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지만..

돌멩이를 만지작거리던 손은 어느새 멈춰있었고, 모닥불 옆에 몸을 웅크리고 곤히 잠들어 있는 소녀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다.

".. 새근... 새근.."

"..... 하하.."

소녀에게까지 시선이 닿자 길게 이어지던 한숨이 마른 웃음이 되어 짧게 새어 나왔다.

대삼림을 앞두고도 저렇게 마음 편히 깊게 잠들 수 있는 것도 재능이라면 재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저 평온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여러 의문으로 복잡하던 내 머릿속도 덩달아 개운해지는 기분이다.

그래, 지금 생각해야할 건 따로 있었다. 다른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대삼림을 통과할 것인가.

소녀와 함께,

세계수가 있는 데다가 엘프들도 살고 있는 숲이라고 한다면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내가 대삼림을 위험하고 까다롭다고 말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곳에 사는 마물도, 거대한 미로 같은 숲의 크기도 아닌... 바로 어둠에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칠흑 같은 공간.

숲 밖에 있는 지금도 내게는 어두워 모닥불을 피워놓거나 등불을 켜지 않고서는 주변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적은 빛으로도 충분히 주변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수인에게는 그리 불편하지 않을 어둠이다.

그 이유는 태양은 사라졌어도 지금까지도 타오르고 있는 북대륙의 불길로부터 시작된 빛이, 그곳의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주변을 조금이나마 밝히고 있기 때문인데,

하지만 대삼림은 강 건너에서 넘어온 그 미약한 빛조차 하늘을 빽빽하게 드리운 나뭇잎으로 막아 그 아래를 완전한 암실로 만들어 낸다.

아예 빛이 새어들어오지 못하는 공간이기에 아무리 밤눈이 밝은 수인이라고 하더라도 눈뜬 장님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고 또 저 안에서 등불을 들고 이동하는 것은, 그곳의 마물들에게 죽여달라고 소리치는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나는 어떻게 하면 소녀를 데리고도 저 안에서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을지 그걸 고민하고 있었다.

"..."

그나마 다행히 받은 게 있다면 이 작은 나뭇가지다.

나는 돌멩이를 안주머니에 집어넣고, 가방의 옆 주머니에서 청량한 향을 풍기는 고급스러운 목함 하나를 꺼내들었다.

달칵.

걸쇠를 당기는 가벼운 쇳소리와 함께 목함이 열리자, 보기만 해도 당장 생명력이 흘러넘칠 것만 같은 나뭇가지 하나가 들어있는 게 보인다.

작은 가지 하나에 나뭇잎 몇 개가 달려있을뿐이었지만, 이는 안그래도 말라가던 바실리카의 생명의 나무로부터 대주교님이 손수 꺾어 건네준 것으로,나뭇잎을 가지에서 떼어낼 때마다 이파리에 남아있던 생명의 기운이 꺼지기 직전 마치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는 것처럼 세계수가 있는 방향으로 이끌리기에 그 빛가루를 보고 세계수가 있는 방향을 특정할 수 있었다.

레베카의 장비를 구하기 위해 이미 한번 엘프들의 마을에는 가본 적이 있기에, 그때도 같은 방법으로 방향을 찾았던걸 아직 기억하고는 있었다.

다만 그때는 앞길을 막는 마물들을 전부 쓸어버리며 멈추지 않고 나아갔던 만큼 지금 내 상황에서 크게 도움이 될만한 기억은 남아있지 않다.

"... 으응.."

"..."

아, 이제서야 일어나려는 모양이다.

타닥.. 뚝.

화르륵...

이제 막 일곱 개의 나뭇가지가 모닥불 속에 먹혀들어가고 있었고, 다섯 개쯤이면 일어났던 소녀가 평소보다 더 오래 잠들어 있던 건 아마 이곳까지의 발걸음을 보다 서두른 탓에 덩치를 불린 피로가 원인일 것이다.

아마 배도 고프겠지.

꼬르륵..

예상대로 길게 팔과 상체를 뻗으며 기지개를 켜고 일어난 소녀는 자신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내 눈치를 본다.

"남은 쿠키라도 꺼내 먹도록 해. 숲 안에 들어가서는 냄새가 강한 음식은 못 먹으니까."

".. 응."

일어나자마자 들려온 반가운 말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소녀의 꼬리가 연신 바닥을 때리며 먼지를 날렸지만, 저게 고의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만큼 별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에단도, 이거.. 먹어."

가방에서 쿠키가 든 자루를 꺼낸 소녀는 꺼내든 쿠키를 내게 가장 먼저 건네준다.

"난 됐어."

".. 쿠키, 맛있는데.."

"그것보단... 자, 나도 일일이 신경 쓰기 귀찮으니까 먹기 전에는 네가 먼저 부탁하라고 말했잖아."

나는 그 쿠키를 잠시 한 손으로 맡아두고, 소녀의 손목을 잡았다.

이 모닥불을 피운 건 내가 아니었고, 때문에 불을 피우고 곧장 잠들어 버려 아직 흙이 지저분하게 묻어있던 소녀의 손을 정화로 깨끗이 해준 다음에야, 나는 쿠키에 묻은 흙을 대충 털어내고 깨끗해진 소녀의 손바닥 위로 다시 올려주었다.

"... 고마워."

"그렇게 꼬박꼬박 인사할 필요 없다니까."

이래서야 끼니 때마다 감사 인사를 듣게 생겼다.

소녀가 쿠키 자루를 조금씩 비워가는 걸 보며, 나도 슬슬 여태 생각한 대삼림의 통과 방법들 중 가장 안전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하나 선택해야만 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이미 방법을 하나 떠올렸지만 그 이외에 다른 답은 없나 생각하느라 나는 이렇게 빠듯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아..."

"...?"

내 한숨 소리를 듣고, 입가에 쿠키 가루를 잔뜩 묻힌 채 이쪽을 올려다보는 소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을 둘러매었다.

철그럭.. 쩔걱....

평소보다 더 사슬을 세게 조여 단단히 고정시키고, 한쪽 팔에는 소녀가 매야할 가방을 걸었다.

결국 이것밖에 없는 모양이다.

"..."

쿠키 자루가 완전히 빈 것을 확인한 나는 한쪽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고, 소녀에게 두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바실리카의 결계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내가 그 안에 세계수의 묘목을 가져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하지 않은 만큼, 시답잖은 이유로 출발을 지체할 수는 없다.

".. 자."

"...?"

결국 저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 위해서는, 시야를 밝힐 불빛은 아무리 마물들이 거슬린다고 해도 반드시 필요했고,

소녀를 지키기 위해 따로 신성 보호문을 사용하는 것은 효율이 크게 떨어지는 데다가, 그러고 내가 따로 등불을 드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비효율적이다.

또한 소녀의 발을 맞추다 속도가 늘어지다 보면 빛을 보고 몰려든 대삼림의 마물들에게 필연적으로둘러싸이게 될 것이었다.

그러니...

"그러니까.. 안기라고."

"... 아?"

내가 소녀를 안고, 신성 보호문으로 내 주변을 두른 다음, 보호막으로부터 자연스레 비치는 빛을 등불삼아 나 홀로 전속력으로 대삼림을 주파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결론이었다.

나뭇가지는 소녀에게 맡기고, 틈틈이 방향을 알려달라고 하면..

포옥.

"... 어?"

나는 소녀가 이미 방금 내뱉은 그 얼빠진 목소리가, 이번에는 내 입에서 튀어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천천히 다가온 소녀가, 내 두 팔 사이로 쏙 들어와 어색하게 양팔을 벌려 나를 가볍게 껴안았기 때문이었다.

그 예상하지 못한 행동에 앞으로 내뻗은 두 팔 그대로 굳어있는데, 소녀도 내 반응이 이상했던지 팔을 풀고 훌쩍 떨어져서는 눈치를 본다.

".. 그렇게 안기면, 내가 뛸 수가 없잖아."

"... 아..?"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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