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46화 (46/137)

〈 46화 〉 8. 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

* * *

8.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4)

발아래 닿는 대지의 감촉이 이렇게나 어색할 줄은 몰랐다.

은총으로 강화된 두 다리를 혹사시키며 앞으로 미끄러져나가고 있는 나는, 깊고 어두운 강의 밑바닥에서 희미한 등불 하나를 입에 물고 헤엄쳐나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신성 보호문을 통해 주변을 두른 보호막은 빛을 흩뿌리며 바로 다음 내디뎌야 할 바닥과 한 치 앞의 나무 기둥만큼은 드러내주었기에 앞으로 꾸준히 나아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하얀 빛이 어둠의 덩치를 못이겨 집어삼켜지고 있었던 만큼, 그 이상은 전혀 보이지 않고 어둠 속에서 바닥과 나무가 나타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이상한 느낌에 나는 발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쐐애애애액...!!

쐐애액!!

푸우욱! 푸북!!

그리고 발걸음을 늦출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바로 조금 전 내가 밟고 지나간 바닥에 내리꽂히는 검은색 나무줄기들과,

"칫..!"

푸부부부부북...!!!

바닥으로부터 솟아오르는 날카로운 뿌리들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해 부들부들 진동하며 이쪽으로 이끌리고 있다.

두꺼운 나무 기둥을 양옆으로 교차해 밟아가며 이를 발판 삼아 잠시 공중으로 떠올랐던 나는, 쇄도하는 줄기들을 피해 착지를 한 다음에도 사방에서 조여드는 기척에 다급히 바닥을 내려차 앞으로 몸을 날렸다.

쐐애애액...!!

쐐애액!!!

푸북..!!

세계수의 영향으로 대삼림의 토양은 일반적인 재배가 가능할 정도의 생명력을 지니고 있었지만 발길이 끊긴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생명력을 탐내는 것은 비단 인간들뿐만이 아니었고, 대삼림에 수두룩한 거목에 침식해 들어가 기생하고 있는 저 마물들은심지어 거목의 뿌리나 덩쿨등을 검게 변이시켜 수족처럼 다뤘기에 까다롭기 그지없다.

쐐애애애액!

푸부북!

퉁...!!

나무줄기와 뿌리로 위와 아래를 동시에 공격해 들어오니, 아무리 내가 빠르게 이동한다고 한들, 한두 개는 이렇듯 보호막을 건드려 온다.

다행히 저것들은 뿌리를 깊게 내린 나무에 기생을 한 것이기에 쫓아오지는 못하지만,

"케게게게게게...!"

나무에 기생하지 않고 이렇게 짐승의 몸에 기생을 한 것들은...!

쿠직!! 쿵!!!

순간 속도를 높여 보호막이 둘러진 그대로 힘껏 부딪히자 마침 앞으로 달려들어오던 기생체의 썩은 살덩이는 그대로 으스러지며 나무 기둥에 처박혔고, 넓게 눌러붙으며 악취를 풍기는 핏물을 터뜨린다.

이렇듯 갑작스레 나타나는 것만 아니라면 그 검게 부패한 뭄뚱어리로는 날 쫓아오지는 못했기에 그때 그때 빠르게 처리한다면 문제는 되지 않는다.

산채로 썩어가는 가엾은 짐승들..

기생형 마물에게 침식당한 생명체의 말로는 대개 저런 법이었다.

"실비아, 방향은?"

여전히 나무줄기는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고, 바닥 역시 당장이라도 날카로운 뿌리가 솟아오를 것처럼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사이에서조차 일말의 여유도없이 그저 재촉해야만 하는 상황이 주는 피로감은 전력으로 달리는 것보다도 극심하다.

"... 그대로.. 앞으로..!"

푸부부부북..!!

소녀의 손에 들린 나뭇가지로부터 떨어져나간 나뭇잎은 그 말대로 나아가야 할 앞쪽을 향해 빛가루를 은은하게 흩뿌리고 있다.

이렇게 무작정 피해 가며 나아가다 보면, 나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방향이 틀어지고 말기에 도중에 확인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 나뭇잎의 수도 눈에 띄게 줄어있었기에 슬슬 도착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금방 또 쉴 곳을 찾을 테니까."

"으응... 불편하지.. 않아."

관을 맨 등 뒤로 소녀를 업을 수는 없었기에 시야에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왼팔로는 소녀의 등을 받치고, 오른팔로는 허벅지 아래에 팔을 집어넣어 떠받치고 있는 상태였기에.. 안그래도 계속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만큼 분명 불편할 것이다.

그래도 곧, 여태껏 쉬지 않고 달려왔으니 또 다른 대화재의 흔적에 곧 도달할 터였다.

대화재당시 불타죽은 거목들이 아직 쓰러지지 않은 일종의 쉼터가 대삼림의 곳곳에 남아있기에, 그곳에 도착한다면 적어도 이 거슬리는 나무줄기와 뿌리들의 공격으로부터는 잠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저 멀리 까만 나무기둥의 실루엣들 사이로 희끄무레한 빛무리가 일렁이고 있다.

나뭇잎이 모두 불타 떨어졌기에 하늘이 뚫려있는 저곳은, 그 위로 여전히 검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음에도 이 일대가 너무 어두운 탓에 상대적으로 밝아 마치 빛무리가 모여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드디어 찾았다. 이번에는 조금 걸렸다.

슬슬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기에 초조함이 고개를 디밀고있던 차였다.

꺼져가는 생명의 빛이 인도해 주는 방향을 따라 그래도 꽤 깊숙이 들어온 것 같은데도 아직까지 마을의 자그마한 귀퉁이 하나 보이지 않으니 조금 답답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목적지가 확실히 저 앞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여태 달려온 만큼은 분명 가까워졌을 거라는 사실만이 위안 삼을만하다.

푸부부부북....!!

"후우.."

백년 전의 대화재로 거목의 벌거벗은 몸뚱어리밖에 남지 않은 숲의 무덤.

하늘이 트여있는 것을 보자 막혀있던 숨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여태 빛이 닿지 않는 깊은 물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었기에 더더욱, 이런 탄내뿐인 공터에서 칙칙한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다는 사실조차 나름 나쁘지 않게 느껴지고 있다.

쉴새 없이 날아들어오는 공격을 스치듯 피해 가며 전력으로 내달렸던 만큼, 긴장이 풀리자 피로감도 배로 느껴지는 듯하다.

스르르르....

뒤를 돌아보자, 바로 세 걸음쯤 뒤까지도 바짝 쫓아온 검은 뿌리와 나무줄기들은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는 이곳에 흥미를 잃고 스멀스멀 어둠 속으로 몸을 내빼고 있다.

"오늘은 꽤 많이 이동했으니, 이곳에서 자도록 하고.."

"..."

"...?"

그리고 이번 휴식이 끝나는 대로 조금 더 속도를 높히겠다고 말하려는데..

어째서인지.

.. 대답이 없다.

덜덜덜..

대답 대신 두 팔로부터 전해져 오는 떨림.

소녀의 가볍기 그지없는 이 가녀린 몸에서 두려움에서 비롯된 떨림이 선명하게 느껴져 오고있다.

"실비아..?"

"... 안돼.."

얼굴이 하얗게 질린 소녀는 목소리마저 안타까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그때.. 그, 냄새..."

그제서야 나는 떠올렸다.

.. 이전에도 한 번, 소녀가 이렇게 몸을 떨었던 적이 있었다.

그건 내가 소녀를 제압해, 목에 날카로운 가시를 들이밀었을 때도 아니고,

재가 내리는 땅으로 향하던 다리 위에서 시야를 완전히 뒤덮을 정도로 몰려들어온 마물의 무리 가운데 놓였을 때도 아니었다.

트라사의 참혹한 학살의 현장.

그때 소녀는 두려움에 떨었던 이유가 코가 울릴 정도의 피비린내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분명 소녀는...

동족의 냄새,

그렇게 말했었다.

"드디어 만났구나...!!"

"...!!"

으르렁거림이 섞인 낯선 목소리가거칠게 귀를 긁어오자,나는 눈을 부릅 뜨고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치켜들었다.

높은 거목의 기둥을 따라 빠르게 끌려올라간 시야는 어떤 것을 발견하고는 덜컥. 하고 멈춘다.

타고 남은 거목의 두꺼운 나뭇가지 위에 서있던 것은 검붉은 로브를 두른 거구의 괴인.

그는 먹잇감을 노리는 듯한 불쾌하고 질척거리는 시선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혼자가.. 아냐.."

아직도 두 팔에서 느껴지는 떨림은 잦아들지 않았다. 하지만 소녀는 잔뜩 공포에 질려있었음에도 자신이 알아낸 사실을 내게 알려주려 한다.

그 떨리는 목소리는 내 귀에 겨우 들릴 만큼 작았지만, 오히려 대답을 해 온건 나무 위의 괴인이었다.

"안심해라!! 고작해야 인간 하나에 핏덩이 하나를 상대로 동포들을 내보낼 생각은 없으니...!"

소녀의 말대로였다.

쳐놓은 그물 안에 이미 발을 들인 먹잇감을 상대로 몸을 숨기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던지 거목의 위로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로브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적룡교.

어째서 저들이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몹시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알겠다.

소녀의 반응대로 저들이 트라사에서 일을 벌인 그놈들이라면, 내가 처리한 그 세 명의 로브인들과도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다면 저 거구의 로브인...

나는 무리들 중에서도 눈에 띄게 홀로 큰 덩치를 가진 괴인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그때 상대한 그 어중간한 순혈자보다도 더 커 보이는 무식한 덩치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주변 공간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는 듯한 위압감이 나를 몰아세우고, 목이 바짝 마르다 못해 아려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하하하하...!!"

우직...!

쿵!!!

꾸궁....!

그저 웃으며 거목 위에서 뛰어내려 착지를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덩치 때문에 대지가 비명을 질렀고, 묵직한 진동은 내 발을 타고 올라와 등골을 오싹하게 울린다.

도망칠까?

아니,

이들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그래도 나는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대부분의 체력을 소모한 상태.

어떻게든 도망친다고 해도 저만한 인원의 포위망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그걸 알기에 쓸데없이 도망치지 말라는 의미로 저들도 모습을 드러낸 것일 테고.

"..."

그리고 애초에.. 저 한 놈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좋아...!! 도망치지 않는군....!!"

쿵.

쿵.

쿵.

쿵!

쿵!!

기분 좋게 웃으며 한 발자국씩 다가오기 시작하는 괴인.

나는 당장 소녀를 내려주고, 그 앞을 가리듯 막아서며 놈에게 물었다.

"넌 누구지?"

평범한 적룡교의 신도 따위와는.. 심지어는 그 순혈자를 흉내내던 괴물조차도 비교되지 않는 위압적인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쉽게 공포를 드러내지도 않던 소녀에게 냄새만으로 공포를 머릿속에 각인시킬 수 있는 이유는.. 분명 본능을 자극했기 때문이겠지.

쿵..!!

놈이 가까워질수록, 나도 그의 평범하지 않은 외견을 하나씩 눈에 담을 수 있었다.

검붉은 후드 아래로 툭 튀어나온 검푸른 털빛의 짐승의 입.

일반적인 크기라고 보기에는 힘든 신발과 장갑은 얼마나 그가 두껍고 커다란 손발을 지녔는지를 알려주었으며,

그리고.. 저 붉은 눈.

어둠 속에 선명하게 떠올라 있는 저 위협적인 적빛은 그만 포기하라는 것처럼 나를 구슬리고 있다.

"까득."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도망치지 않을 생각이라면, 기꺼이 그 질문에 답해주도록 하지."

"... 놓아줄 생각도 없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니 조금 우습군."

이쪽은 뜬금없이 궁지에 몰린 상태인데 말이지.

"크하하하하!!! 넌 내가 두렵지도 않은 거냐?"

"내가 널 두려워해야 할 이유라도 있나."

"... 그흐흐..."

자존심을 건드렸는지 놈의 웃음소리가 잦아들고, 붉은 눈동자에는 노골적이고 투박한 살기가 담겨온다.

이놈의 관심을 내게 집중시켜야 한다.

그래야 내 뒤의 소녀가 노려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줄어들 테니까.

"..."

면목이 없다.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지 얼마나 됐다고 또 이런 흉흉한 일에 휘말리게 하다니.

"뭐, 좋아. 그 자신감이 네 무지에서 오는 건지 용기에서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날 앞에 두고도 등을 보이지 않은 것만큼은 인정해 주마!!"

"... 물러서."

나는 신성 보호문을 잠깐 해제하고, 소녀에게 따로 보호막을 씌워 뒤로 물러서게 했다.

떨리는 다리로비틀거리며겨우 뒷걸음질치는 소녀.

만약 제대로 달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기생 마물들이 도사린 칠흑이 등뒤로 펼쳐져 있는 만큼 소녀는 홀로 도망칠 수 없다.

최악이다.

이것보다 더 최악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곤란한 상황이다.

쩔그렁...!!

쿵...!

풀어진 쇠사슬과 함께, 관이 바닥에 내려지며 묵직한 소리를 낸다.

이미 손아귀에 내 목줄을 쥐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여유롭게 날 기다려주며 그 이상 다가오지 않고 있던 놈에게, 나는 이제 되었다는 의미로 눈짓했다.

그걸 보고는 흥미라도 돋은 것처럼 입을 슬쩍 벌리고 눈빛을 번뜩인 놈은,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던 로브를 단번에 벗어던졌다.

펄럭...!

힘차게 휘날린 검붉은 로브가 바람을 때리는 소리를 내며 허공에 던져지고, 그 안에 가려져 있던 몸뚱이의 실루엣이 어두운 장막 아래 드러난다.

내 신장의 두 배는 훌쩍 넘어 보이는 거구는 온통 짙은 검푸른 빛의 털로 뒤덮여 있었지만, 그럼에도 단단한 근육으로 이루어진 신체의 윤곽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수컷의 정점과도 같은 존재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놈을 보며, 나는 확신했다.

그때 만났던 어중간한 놈은 순혈자라는 이름을 뒤에 붙이기도 아까운 잡종이었다.

"..."

마른 침이 목을 타고 흘러내린다.

긴장감에 흘러내린 식은땀에 등골이 우수수 떨리고, 호흡은 안으로 겉돈다.

이제야 알겠다.

저것이... 지금 눈앞에 선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순혈자.

최강의 짐승이라고 불리우는 수인들의 왕이었다.

"그럼 먼저 소개하지.."

"...?"

"나는 적룡교의 일곱 머리 중 하나."

찌지지직...!

"이 그릇된 세상에서 불합리한 죽음을 견뎌온 모든 수인 동포들의 유지를 피로써 이어받은 순혈자..!!"

스르르릉... 스걱...!!

두꺼운 가죽 장갑이 꿈틀거리며 길게 뽑아져 나온 것은 떨어지는 머리카락 한올조차 예리하게 동강낼 것처럼 보이는 날카로운 손톱들,

그는 자신의 칼날을 완전히 빼내 보이고는 목을 가볍게 풀고 입가에는 비릿한 미소를 담았다.

분노에 가득차있던 외침은 곧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듯한 미소로 바뀌어 날 향한다.

그의 이름은..

"지크.. 지크프리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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