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 8. 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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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8)
입회를 요청하는 맑고 또렷한 목소리.
강압적인 어조는 아니었으나 이 넓고 조용한 회장을 울리는 그 기품 있는 목소리에 나는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곳이 지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빛으로 가득 차 있는 이 장소는 마치 하이 엘프들의 고고함을 표현한 것처럼 고상하며 깔끔하다.
"..."
가장 상석에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곧은 시선과 눈이 마주친다.
회장의 조명을 받아 장인의 손에 가공된 에메랄드처럼 반짝거리고 있는 연한 녹색의 눈동자와,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을 진정시키는 상냥한 눈매.
그리고 결점없이 빼어난 외모로 유명한 요정들의 사이에서, 특히나 아름답다고 해도 그게 얼마나 차이가 날까하는 의문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는 듯한 수려한 외모가 뒤이어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곧, 나는 엘프들의 마을에서 그들의 수장 격이 되는 인물에게 혹시나 무례를 범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급하게 시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색이 그리 진하지는 않은 옅은 금발이 민무늬의 소박한 은빛 장신구 아래 한 번 모여 한쪽 가슴께로 길게 늘어진 것을 따라갔다가..
문득 내가 알고 있는 평범과는 조금 거리가 먼, 눈에 띄게 풍요로운 젖가슴이 무결한 하얀색의 얇은 천 아래 가볍게 감싸여 있는 모습을 보고 부자연스럽게 시선을 멈추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좋은 분이시죠?"
"..."
알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그저 타이밍이 좋지 않았을 뿐인지는 모르겠지만넌지시의미심장한 말을 건네온 이비의 목소리에 괜히 방금 스쳐간 그 모습이 다시 한번 머릿속에서 그려지고 만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상석의 하이 엘프는 잔잔하고 평온한 눈빛으로 입술을 떼었다.
"이비."
"네, 세레스티아 님."
원로회의 앞이었기에 여태 들어온 그녀의 느긋한 말투에 비해 가장 성의가 느껴지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여전히 어딘가 멍하니 다른 곳에 신경이 가 있는 것 같다.
"분명 원로회의 결정을 듣지 않았나요?"
"에헤헤.. 으흠, 저도 처음부터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었어요."
"그건, 어떤 의미인가요?"
"몸을 숨기고 상황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어머니의 숲에 침입한 목적을 알아볼 생각이었지만.. 이 분이 전투 중 보여준 능력이 저희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요."
떠넘기듯 내 쪽으로 심문의 지팡이를 건네는 이비.
그녀에게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열 명의 하이 엘프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로 쏠리니 그 부담스러운 눈빛들에 괜히 울대가 저리다.
".. 잠깐, 후드를 걷어 제대로 얼굴을 보이도록 하세요."
"..."
거기다 더해 상석의 하이 엘프는 내게 얼굴을 드러낼 것을 요구해 왔다.
이런 밝은 공간 아래 얼굴의 음영을 걷어내는 것을 나는 그리 유쾌히 여기지는 않았으나, 요구에 따르지 않고서는 다음으로 넘어갈 수 없을 듯 보인다.
스륵.
"...!"
한 손을 들어 천천히 후드를 걷어내자, 다른 아홉 명의 하이 엘프들과는 달리 유일하게 반응을 보인 것은 얼굴을 드러낼 것을 요구한 장본인이자 그들의 수장인 세레스티아였다.
"... 에단."
그녀는 곧, 틀림없는 내 이름을 입에 담아온다.
기억력이 대단하다고 느끼며 나는 부정도 수긍도 하지 않은 채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인류 배반자라는 멸칭으로 더 널리 알려진 내 이름에 대해 뒤늦은 반응을 보여 온다.
".. 그렇군요. 이비, 당신의 판단에는 정당한 근거가 있었어요."
"잠시 발언하겠습니다."
내 멸칭이야 어쨌든 수장인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여 마음을 놓으려던 그때, 매의 형상을 한 은 장신구로 긴 머리를 묶어내린 하이 엘프 남성이 단호한 목소리를 회장을 울려왔다.
"네, 프루기스."
"이번 일로 인해 엘프가 적룡교의 눈에 밟히게 된 것은 간과할 수 없는 저 어린 엘프의 불찰입니다."
푸르기스라고 불린 원로중 하나는 엘프인 이비가 나와 소녀를 구하기 위해 적룡교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일로 그 이후의 불화를 우려하며 나섰다.
"불안한 마음은 이해해요. 하지만 그건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적룡교는 이들보다 먼저 어머니의 숲에 침입해 있었으니, 그 목적 자체는 어쩌면 저희들에게 있었을지도 모르니까요."
"... 그 경우에 이들은 어머니의 숲에 들어와 불운하게도 적룡교와 마주친 것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더욱 수상하지 않습니까. 적룡교가 요람의 위치를 알아내기 위해 벌인 자작극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삼림이 지금 어떤 끔찍한 모습으로 변모해 있는지 그들이 모를리 없다. 애초에 그래서 지하로 마을을 옮기는 결정을 한 것일 테고.
그런데 그런 곳에 적룡교의 침입에 이어, 또다른 외부인이 들어와 서로 충돌했다고 한다면 굳이 대삼림 깊은 곳까지 들어와 전투를 벌인 이 상황에 대한 의문은 남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의심을 피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적룡교가 대삼림 깊은 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나 역시도 알고있는 바가 없다.
"발언하겠어요."
"네, 루치아나."
"자작극이라면 그들은 같은 엘프를 선택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부끄럽게도, 다른 종족을 위해 저희가 마을 전체의 위험을 무릅쓰지는 않을 거라는 건 그들도 충분히 고려할 테니까요. 실제로 그렇게 결정을 내리기도 했고요."
"... 자작극은 하나의 예시로 든 이야기일 뿐입니다 루치아나 원로. 꼭 그렇지 않더라 하더라도, 어째서 어머니의 숲에 발을 들였는지, 그리고 저 어린 수인을 데리고 온 이유는 무엇인지 우리들은 이 두 외부인에 대한 앞으로의 처우를 이 자리에서 확실히 해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서로의 목소리에는 눈에 띄는 고저 없이 또렷하게 자신의 의사만을 전하고 있었지만, 조용한 회장을 울리는 담담한 목소리들은 어째서인지 서로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이는 과격한 언쟁보다도 날이 서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세레스티아는 오히려 미소를 지어 보인다.
"네, 그렇네요. 너무 저희들의 이야기만 한 것 같으니, 이제는 이야기를 들어볼 차례 같아요."
그녀는 두 손을 가슴 언저리에 다소곳이 모으고, 주변의 마나를 불러 모으며 깊은 확신이 담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제 앞에서 거짓을 입에 담을 수는 없는걸요."
그 말에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는 원로들의 모습에 내가 의문을 느끼기도 전에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온 세레스티아의 시선과 다시 눈이 맞았을 때, 나는 전신을 관통하는 이질적인 마나의 기척을 느꼈다.
상당한 실력을 지닌 마법사다.
이 맑고 청량하며,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여 피어나는 듯한 짙은 마나의 기척은 분명 그녀의 것.
그녀의 연녹색 눈동자는 이내 진하게 빛을 발하며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묻고 있었다.
거짓을 입에 담을 수 없다.
그녀의 앞에서는 오직 진실만을 말해야 한다는 강한 의식이 머릿속에 틀어박혀오기 시작한다.
그러나 의심받는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바라는 바, 무리하여 저항할 이유는 없었다.
"... 바실리카의 결계를 이루는 성물인 생명의 나무가 점점 그 힘을 잃고 있습니다. 저는 요정들과 바실리카의 두 선조 간에 이루어진 맹약에 따라, 세계수의 묘목을 얻어 가기 위해 온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바실리카의.."
내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세레스티아의 시선이 곧 나를 지나 실비아에게로 닿는 것을 느꼈다.
소녀는 처음 느껴보는 짙은 마나의 기척으로 인해 몸을 경직시키고 있다.
이곳에 온 목적을 예외 없이 묻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에 제대로 대답하기에는 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막 벗어나 갑작스러운 입회로 이어진 지금, 엘프의 원로회 앞에 서게 되었으니 아직 진정되지 않았을 것이다.
예상대로 대답하지 못하고 힘겨워 하고 있는 소녀를 보며, 나는 저들의 쓸데없는 의심으로 이어지기 전에 대신 답하려 했지만.. 한가지가 내 발목을 잡는다.
소녀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곧바로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동료나 전우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노예나 하인같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목적에 따라 함께 싸우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내 명령에 따르기만을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에게는 싸우지 않기를 바라고, 다만 스스로의 의지를 관철하기를 바란다.
내일이 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비단 잃어버린 태양 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지금은 그저 동행하는 이,
그리고 문득, 하나의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녀는..."
"..."
".. 제 일행입니다."
"일행, 의문은 있지만.. 저 어린 수인에게서 그다지 위험하거나 불쾌한 기척은 느껴지지 않네요."
일행으로 선택한 게 한참 어린 수인 소녀라는 사실이 그들의 이성에 완전히 받아들여 질리는 없었겠지만, 의심을 하기에는 소녀가 가진 힘이 보잘것 없어 보였던지 일단은 고개를 끄덕인다.
"...?"
그렇게 떨어지려던 세레스티아의 시선은 소녀가 손에 꼭 쥐고 있는 무언가에 이끌려 잠깐 멈추었다.
"잠시.. 지금 손에 든 것은 혹시."
내 손에는 아무것도 들려있지 않다.
무언가를 들고 있던 것은 소녀.
길잡이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이젠 겨우 하나의 이파리가 남아있는 작은 나뭇가지가 바로 그것이었다.
"틀림없는 어머니의 나무의 일부로군요. 말씀대로.. 생명의 기운은 대부분 사라졌어요."
바실리카에서 온 것이라는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를 여태 용케 놓치지 않고 쥐고 있었다.
나 역시 잊고 있었고, 정작 본인도 그걸 쥐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던 눈치지만. 덕분에 이제야 조금은 말문이 트이는 느낌이다.
"비록 인류 배반자라는 멸칭을 지고 있지만, 적룡교와 결탁하려는 생각 따위는 단언컨데 없습니다."
짙은 초목의 빛을 띠는 맑은 눈동자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았고, 이어진 것은 수긍과 사과였다.
"... 네, 원로회의 앞선 실례되는 언행에 대해서는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어요."
머리카락이 늘어져 있는 가슴께를 한 손으로 가볍게 누르고 조신하게 고개 숙인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로 조금을 더 있다가 내가 괜찮다고 말을 꺼내야 하나 싶을 즈음에야 다시 고개를 들어 내 요구에 따른 대답을 전해 왔다.
"선조님들 간에 이루어진 영원한 맹약에 따른 당신의 요구는 타당하며, 물론 저도 이에 응해드리고 싶어요."
.. 응하고 싶다.
긍정적인 대답이었지만 도움을 약속하는 확실한 단언은 아니었던만큼 나는 의문을 가지고 그녀를 마주바라보았다.
"그 말은..."
"하지만, 지금 당장은 그럴 수 없어요."
지금 당장은 힘들다니, 바실리카의 결계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모르는 만큼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는 없다.
"..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습니까."
"... 네, 그건.."
내 육체와 정신을 그대로 꿰뚫어 보는 듯하던 진한 눈빛이 사라지고 그렇게나 짙었던 마나의 기척도 실례했다는 것처럼 깨끗하게 모습을 감춘다.
대신 그녀의 얼굴에는 걱정과 근심이 담긴 음영이 옅게 피어나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불안으로 동요하게 한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세레스티아님."
"세레스티아님, 저자는 외부인입니다. 어찌.."
이에 입이 무거워 보이던 다른 하이 엘프들도 명백히 거부반응을 보이고 나선다.
외부인에게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문제.
이비는 이렇게 말했다.
내 능력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에 구한 것이라고.
그리고 이를 타당하다고 세레스티아가 인정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 저희들만의 힘으로는 해결하지 못한 문제이니, 외부인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에요. 저희들의 은인, 레베카 님에게도 큰 도움을 받았듯 말이죠."
"...."
"..."
수장의 입에서, 그것도 공적인 자리에서 존칭을 사용할 정도라면, 이비의 말대로 레베카는 엘프의 원로회에서 큰 명망을 쌓아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나도 바라마지않던 상황이다. 다만그녀의 이름을 팔 생각은 없다.
그저자존심 높기로 유명한 이들 하이엘프가 단 한 번도 외부인에게 굽혀본 적이 없다면 분명 힘들었겠지만, 이미 한 번 도움을 받아본 적이 있다면 그 거부반응이 조금은 덜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 눈치보며 얼마나 남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시간을 낭비할 이유는 없다.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다시 한번 가슴께를 누르고 고개 숙여 내게 인사한 그녀는 이전보다는 한 꺼풀 음영을 걷어낸 표정으로 내게 말해 왔다.
"이곳 생명의 요람은 현재.. 더이상 좌시할 수 없는 문제에 직면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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