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49화 (49/137)

〈 49화 〉 8. 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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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7)

고운 은발을 찰랑거리며앞서 놓이고 있는 사뿐한 발걸음을 따라, 드러난 나무뿌리들의 사이로 좁게 이어져 구불거리는 샛길을 걸어나가자 순간 주변이 밝아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시야가 넓게 트여온다.

"... 하아..."

넓은 공간이 주는 개방감에 저절로 숨이 트이고, 시야가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에 닿았을 때에는 놀라움에 눈이 뜨인다.

하늘대신 뒤덮인 돔 형태의 천장.

그 천장을 뚫고 나온 나무뿌리들이 서로 뒤엉켜 솟아나 있고, 밝은 빛을 내뿜는 거대한 광석들이 기둥처럼 박혀 이 아래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돔 아래 커다란 공간의 정중앙에 위치한 것은 저 높은 천장에도 가뿐히 닿을 듯 가지를 뻗어낸 거대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의 나무가 어떻게 저렇게까지 크게 자라날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는, 그 크기가 주는 웅장함에 몸에는 약한 전율이 흐른다.

세계수.

엘프들이 어머니의 나무라고 부르는 저것은, 성양경에서는 소테르가 아케라에 내려와 비루한 피조물들에게 건넨 세 가지 선물 중 하나로 기술되어 있다.

그 하나는 하늘을 밝히는 태양,

그 하나는 대지에 생명을 내릴 세계수의 씨앗.

그 하나는 비를 내리는 신수의 알이라고 하였다.

물론 요정들이 믿는 어머니의 나무의 기원은 성양경에 기술된 것과는 조금 달랐지만 그래도 멀리서부터 느껴지는 이 푸르른 생명의 기운을 느끼고 있으면, 이전 엘프의 마을에 들렀을 때 이미 한 번 본 적이 있음에도 역시 우러러보게 된다는 감상이다.

하지만 이전에 보았을 때의 세계수는 가려지지 않은 높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고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하늘을 뒤덮은, 세계수를 완전히 품을 정도로 거대한 돔 형태의 천장을 나는 처음 보았다는 의미이다.

"생명의 요람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요람.. 여긴 지하인 건가?"

"네, 금방 알아보시네요."

"하..."

숨이 턱하고 막힌다.

그 거대한 세계수와 마을을 지하로 옮겨버리다니,

확실히 레베카의 도움없이는 실현자체가 불가능했을 일이다.

"... 주거구역이 눈에 띄게 나눠져 있군."

새롭게 마주하게 된 엘프 마을의 이곳저곳으로 시선을 옮겨나가던 도중, 이질적인 경계선이 낮은 담과 함께 세계수 주변으로 넓게 둘러쳐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그 안과 밖으로 나누어진 주거구역.

담이 그리 높이 쳐져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오히려 왜 저 경계가 있어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난다.

"으흠~ 따라오세요."

세계수를 올려다볼 시간 정도를 기다려주고, 다시 앞서 걸어가기 시작한 이비를 따라 벽 바깥의 주거구역에 가까워지자 나는 여태까지 그녀가 흘린 말들과 주거구역 사이의 경계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브 언니다...!"

"와아아아..!"

"안녕하세요~ 다들 안녕하세요~"

마을에 가까워지자 보이는 거리의 모습은 내 생각과는 많이 달랐다.

"...!"

그들의 머리 위로 쫑긋거리는 귀나 솟아오른 다양한 형태의 뿔.

각기 다른 모습으로 흔들리고 있는 꼬리들이 가려지지 않은 채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수인들..

엘프들의 마을인 이곳에 이렇게나 많은 수인들이 살고 있다니?

귀와 꼬리를 가리지 않고 길거리를 다니는 것만 보더라도, 이들이 이곳 지하의 요람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기르며 풍족하지는 않지만 부족할 것도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걸 알 수 있다.

실비아보다도 어려 보이는 조그마한 수인 꼬마들이 우다다 달려와 이비에게 매달리고, 그녀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그들의 격한 인사에 일일이 대답해 준다.

자신과 같은 수인이 이렇게 많이 모여살고 있는 모습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멀찍이서만 바라보고 있는 소녀.

"어? 처음 보는 언니인데?"

"처음 보는 랑족 누나다!"

"그러네? 그런데 저 사람은? 엄청 무섭게 생겼다..!"

"으으 피 냄새..!"

소녀에게 관심을 보이던 꼬마들은 나에게까지 시선이 닿자 그 조그마한 손으로 코를 부여잡더니 울상을 지으며 그대로 도망가 버린다.

왔던 것처럼 우다다 하고 어른들에게 달려가는 그 모습들을 보니 왜인지 맥이 빠진다.

"에헤.. 이 틈에 어서 지나가요."

이비는 나를 보고 어색하게 웃고는 어서 가자는 듯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실례되는 꼬맹이들 같으니.

다시 세계수를 향해 걷기 시작한 그녀는 이곳에 대한 설명을 이어나갔다.

"심판의 날 일어난 대화재 당시 마을을 잃고 도망쳐온 분들이에요."

".. 의외로군."

"저희가 수인 분들을 받아준 부분이요?"

"..."

내 의외라는 말에 대한 해석의 여지는 많았을 테고, 일부러 오답을 고를 수도 있었겠지만 거리낌 없이 정답을 말해온다.

예전부터 숲의 요정들은 타 종족들에 대해 폐쇄적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그게 마냥 장점으로 내세울만한 것은 아니었기에 그녀의 대답 또한 내게는 의외였다.

"10인의 원로들 중에서 단 2명만이 찬성했을 정도로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했었죠. 하지만 그들의 등 뒤로 이미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데 강제로 내쫓으려고 했다가는 어떻게 되겠나요?"

더이상 물러설 곳 없는 이들에게 날카로운 창끝을 들이민다면 그들은 손톱을 세우고 죽기 살기로 덤벼올 뿐이었을 것이다.

"어느 한쪽이 다 죽을 때까지 싸우게 됐겠지."

"네, 어쩔 수 없었던 거죠.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안과 밖으로 둥글게 구획을 나누어 생활하고 있는 거랍니다. 그리고 일단은.. 안쪽 구획으로는 수인분들은 출입하지 못하게 되어 있어서요.."

말끝을 흐리는 그녀의 시선은 내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수인 소녀를 향하고 있다.

그랬군, 그래서..

"그래서 그런 말을 했던 거였나."

"네, 외부에서 오신 거니 괜찮을지도 모르지만 지난 백 년간 이곳에서 있었던 엘프와 수인 간의 크고 작은 분쟁들 때문에라도 나름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거든요."

수인들을 상대하는 모습이 어딘가 능숙하다고 생각했더니, 이런 이유가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래도 일단 겉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이는 마을인데, 그 이유는 여태 있었던 분쟁이 끝나고 나서야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여 안정기에 들어섰기 때문인 걸까.

"음~ 그래도 지금은 그런 분위기도 많이 누그러들어서, 아마 괜찮지 않을까 생각해요."

마냥 낙관적인 이 엘프의 머릿속은 그 표정만큼이나 헤실헤실할 것같다.

"글쎄.. 그건 또 어떨지."

큰 기대는 하지 않겠지만 별다른 문제가 생기지는 않기를 바란다.

그렇게 색다른 엘프 마을의 모습에 나 역시 질리지 않고 주변을 살피던 사이, 꽤 멀어 보였던 경계의 출입구 앞에 도착하게 되었다.

"... 거기 너희들! 멈춰라!!"

경비를 서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엘프들이 이쪽으로 창과 화살의 뾰족한 끝을 향하는 것까지도 보게 되었고 말이다.

"안녕하세요오~"

그러나 자신의 눈앞으로 날카로운 쇠붙이가 향하고 있었음에도 전혀 주눅 드는 기색 없이 사뿐거리며 그들에게 다가서는 이비.

"이비..? 대체 언제 나간.."

"으음.. 손님이 오셨는데 아무도 마중을 나가려 하지 않길래.."

"잠깐, 일단 거기 멈춰! 멈추라니까..!"

이비를 겨눈 창과 화살이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움찔거리며 오히려 계속 뒤로 물러서는 모양새가 꽤나 우습다.

"아~? 발레리?"

"윽.. 저 바보가...!"

개중에서 담 너머에서 활을 겨누고 있던 녹색머리 엘프는 자신을 알아보고 반갑게 손을 흔드는 이비를 보고는 어쩔 줄 몰라 담 아래로 숨어버리고 만다.

멍한 표정의 그녀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한동안은 이 마을에 큰 불화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는 느슨한 풍경이다.

"후우... 세레스티아님께서 널 찾고 계신다."

"셀렌님이?"

"그래, 역시 나갔다 온 모양이군. 외부인은 그 둘뿐인가?"

"맞아, 그럼 함께 데려오라고도 말씀하셨겠네?"

"... 그래."

실비아의 머리 위에 솟아난 늑대의 귀를 보며 대답을 망설이기는 했지는 그는 결국 무기를 내리고 길을 열어준다.

그들의 어설프게 엄중한 감시 속에서 경계를 지나는 도중, 나는 이 작은 담벼락을 매개로 마을을 감싸고 있는 것과는 별개의 결계가 펼쳐져 있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지만 이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기보다는, 오히려 안에서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는 듯한 느낌인데..

"....."

그렇게 약간의 의문을 품으며, 방금 전까지는 수인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었다고 한다면 이번에는 수많은 엘프들이 나와 소녀를 힐끔거리는 시선을 지나 드디어 세계수의 바로 밑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바깥에서 중심까지 도달하기까지의 거리가대로를 가로질렀음에도상당했던 만큼, 이미 한 번 멀리서 보았지만 정말 큰 마을이라는 감상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에 따라, 멀리에서 볼 때에도 이미 충분히 크다고 느꼈지만 이렇게 바로 아래에서 목이 뻐근할 정도로 위를 올려다보니 이 마을을 품은 세계수의 대단한 크기가 더욱 실감이 난다.

"..."

세계수를 중심으로 그 두꺼운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형상으로 감겨있는 건축물들을 보자 옛 기억이 문득 돌아온다.

엘프들의 주거구역을 지나칠 때 느꼈던 이유 모를 이질감의 정체였다.

이전 방문했던 엘프들의 마을에서는 거목을 활용하여 최대한 자연의 모습을 훼손하지 않고 보존하여 함께 어우러지는 건축 양상이 눈에 띄게 드러났던 것에 비해, 지금은 사용한 자재만 비슷할 뿐 어느 평범한 마을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건물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마을을 지하로 옮기는 과정에서 세계수 한 그루를 옮겨 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에 부쳤던지 지금 그 과거 엘프 마을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은 눈앞의 이곳뿐이다.

내 기억에 분명 저곳은..

"지혜의 줄기, 원로회의 하이 엘프분들이 거주하는 장소랍니다. 원로회의도 저곳에서 하죠. 저도 여기 들어오게 된 건 꽤 오랜만이네요. 으음.. 40년 전이었을까요?"

지혜의 줄기의 입구로 보이는 곳에는 단단히 무장한 두 엘프가 장병기를 들고 지혜의 줄기로 통하는 입구를 지키고 서 있었다.

아무래도 장소가 장소인지라, 마을의 경계에서 봤던 느슨한 엘프 경비대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호숫가의 돌담 아래 세 번째 은방울꽃 이비, 세레스티아님의 부름에 따라 외부인 두 명과 함께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문인지 이비의 말투도 조금 달라져 있다.

엘프들은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외부인인 나와 소녀를 꼼꼼하게 훑어본 뒤에서야 길을 열어주고는 함께 따르기 시작한다.

원래 지키던 문은 곧바로 다른 두 엘프와 교대하여 자리를 채우고, 한 명은 앞장서 안내를, 그리고 한 명은 혹여나 수상한 짓은 하지 않는지 뒤통수가 따끔거릴 정도로 뒤에서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 역시 회의장으로 왔네요. 다들 힘들겠지만 셀렌님을 보면서 힘내주세요."

끼이이이이익!

영문 모를 응원을 속닥거려온 이비와,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문.

문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밝은 빛 사이로,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마치 재판소와 같이 비어있는 중앙과, 입구의 반대편에서 이를 반쯤 둘러싼 높은 단상.

기다란 단상을 따라 일정하게 놓인 열한 개의 자리,그 중 열 자리를 채우고 있는 엘프들에게서는 언뜻 보기에도 그 앉은 자세나 입은 옷 등 분위기부터가 하나같이 기품이 느껴지고 있다.

뿐만아니라 그들이 품고 있는 범상치 않은 마나의 기척은, 그들이 이곳 엘프 마을의 원로회이자..

고귀한 하이 엘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어린 엘프여, 그리고 두 명의 외부인들.. 입회하도록 하세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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