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8. 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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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이슬과 요정, 숲과 짐승(6)
하늘이 열린 어두운 숲속에서미약하게나마하늘거리고 있는 빛무리들을 홀로 끌어들인 듯 반짝거리는 긴 은발이 내 눈앞으로 찰랑인다.
아름다운 머릿결이 눈앞으로 사르륵 넘어가는 그 모습이 마치 마법 같다고 느낀다.
"건방지게 끼어들다니...!!"
갑작스레 나타난 그녀의 얼굴에 내 시선이 채 닿기도 전에, 자신의 싸움에 누군가 끼어들었다는 사실에 격노한 놈은 내게 붙잡힌 반대편의 손을 휘둘러 어디서 솟아난 건지 모를 그녀의 머리를 찢어발기려 한다.
후쿵...!!
묵직한 파공성을 섬뜩하게 울려온 휘두름은 언뜻 그 앞의 것을 갈기갈기 찢어놓는가 싶었지만, 피가 터져 나오기는커녕 마치 안개처럼 그 형상이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잔상을 베어낸 것이었다.
"으음.. 곤란한데요.. 정말 곤란한데요오."
"칫...! 마법인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이번에는 놈의 등 뒤로부터 들려오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다들 왜 이렇게 싸움을 좋아하는 걸까요. 피곤하지는 않나요?"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 이 성가신 여자가...!!"
자신의 등 뒤로 발을 내질러 목소리의 주인을 걷어차려한 모양이지만 발은 허공을 가르며 힘없는 소리만을 남겼을 뿐이다.
"..."
공간을 우그러뜨리는 마나의 기척.
눈치채기 힘든 작은 비틀림이었지만나는 이 마법의 기척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내가 알기로 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케라에서 단 한 명뿐.
.. 이었을 테지만, 저 목소리는 분명 처음 듣는 것이다.
"많이 다치셨네요. 으.. 끔찍해라..."
이번에는 내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오는다 싶더니 어깨 아래가 불쑥 들어올려지며, 놈의 손톱에 몸이 꿰뚫려 꼼짝 못하고 있던 나는 어느새 높은 나무 기둥 위에 올라와 있었다.
직접 경험하고 나니 확신이 선다.
역시 이건 공간 전이.. 그녀의 마법이다.
"쿨럭... 너는.."
"쉿,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내 시야 앞으로 뻗어져 나온 하얗고 가녀린 손에는 분명 입구가 제대로 묶여 있음에도 고약한 악취가 흘러나오고 있는 자루 하나가 들려있다.
사르르르르륵.
자루가 열리고 연황색의 가루가 쏟아지더니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와 함께 넓게 퍼져 나간다.
수인들의 후각을 교란시킬 목적인 건가?
"소용없는 짓을...!! 내 싸움을 방해한 네놈은 반드시 가장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지르게 해 주겠다!!"
하지만 그 전에 놈은 냄새를 쫓아 높은 나무 기둥을 부수듯 박차고 뛰어올라 이쪽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다른 나무들 위에 서있던 로브인들 역시 제 3자의 개입이라는 변수에도 명령대로 대기할 수는 없었던지 이쪽으로 일제히 뛰어들고 있다.
흉포한 괴성을 내지르는 놈과 검붉은 로브들이 일제히 펄럭이며 쇄도하고 있는 모습에 나도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경직시켰지만 나를 뒤에서 들어안고 있던 그녀는 그다지 놀라는 기색 없이 자루 몇 개를 더 꺼내 매듭을 풀더니 그 앞으로 집어던졌고, 내가 잠깐 눈을 깜빡인 사이시야는 다시 뒤바뀌어 있었다.
"...!"
"흣차. 이렇게 되면 다 챙긴 거죠? 윽.. 무거워라."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소녀는 관위에 눕혀져 방금 전까지 달리고 있던 것처럼 두 다리를 휘젓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그 위로 넘어지듯 놓아진 내가 고개를 틀어 놈들이 있을 위쪽을 바라보자, 은발머리 여성의 어깨 너머로 일제히 나무 위에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로브의 괴인들과, 손톱을 길게 내빼고 붉은 안광을 번쩍거리며 날아들고 있는 놈과 시선이 맞닿는다.
가장 빠르게 이쪽으로 떨어져 내리고 있는 놈의 날카로운 손톱이 벌써 휘두르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진 그 순간.
"얍."
적당히 내뱉은 듯한 성의 없는 기합과 동시에,
"...!!"
눈앞의 풍경은 이번에는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여기는..."
주변의 바닥에 드러나있는 나무뿌리들의 사이사이로, 이름 모를 식물들은 각기 다른 색의 은은한 빛을 흩뿌리며 주변을 밝혀오고 있다.
그물처럼 촘촘한 구멍들로 몸통이 이루어진 식물, 위에서 바닥으로 고개를 길게 늘어뜨린 식물, 고운 털로 덮여있는 식물들까지.
정말 각양각색의 식물들이 주변에 가득했으며, 그들이 내뿜는 빛과 함께 코로 스미는 진한 흙내음은 방금 전까지 맡았던 비릿한 피와 공포의 냄새를 빠르게 밀어내고 몸의 긴장을 풀어내고 있었다.
"하아... 하아.."
"..."
나와 소녀 모두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당황해 주변을 살피고 있는데, 전이 마법을 사용해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온 장본인이 드디어 이쪽으로 그 얼굴을 보였다.
싱긋.
입꼬리와 눈매로 슬며시 호선을 그리며 우호적인 미소를 보여주는 그녀에게 나 역시 시선을 맞추었다.
잡티 하나 없이 하얗고 뽀얀 얼굴 위로 오밀조밀하게 자리 잡은 선명한 이목구비.
멍하니 뜨고 있는 것 같은 눈에는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성적이고 차가운 느낌의 푸른 눈동자가, 오똑한 코와 여성스러움을 한껏 담아 부드럽고 말랑말랑해 보이는 입술은 연분홍빛으로 반짝거리고 있다.
그 어느 것 하나 트집 잡을 것 없이 완벽한 비율로, 열 명 중 열 명이 모두 미인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할 그녀의 얼굴에서 자연스레 내 시선이 옆으로 옮겨 간 것은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끝이 뾰족한 귀였다.
숲을 지키는 요정.
엘프.
눈앞에 엘프가 서있다는 이 사실은, 지금 발붙이고 있는 생명의 기운으로 가득한 이곳이야말로..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끝내 도착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목적지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치유부터 해드려야 할까요?"
"아니, 그럴 필요는.."
"하지만 상처가, 어라?"
분명 날카로운 손톱들에 각기 다른 방향으로 어지럽게 꿰뚫려 있었음에도 상처는 커녕 흠집 하나 보이지 않자 그녀는 손가락 끝으로 내 복부에 묻어있던 피를 슥 닦아올리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이건.. 조금 호기심이 동하네요?"
"... 일단.. 구해준 것에 대한 설명부터 듣고싶은데."
두말할 것없이 눈 앞의 그녀는 나와 소녀의 생명의 은인이었지만, '그녀'의 마법을 똑같이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내 의심을 끝없이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하, 좋아요. 제 이름은 이비, 편하게 이브라고 부르셔도 괜찮아요."
주머니에서 꺼낸 얇은 유리 판 위로 손끝에 묻혀둔 내 혈흔을 옮기며 자신의 소개를 하는 은발의 엘프.
그녀가 능숙한 손놀림으로 밀봉한 그 유리판을 주머니에 넣는 것을 눈으로 따라가고 나서야 평범한 엘프들과는 다르게 마을의 의사들이나 입고있을 하얀 가운을 겉에 걸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결계 바깥이 무슨 일인지 시끄럽더라고요. 셀렌님은 조용히 지켜보자고 하셨지만 저는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거든요."
"... 셀렌?"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는 그 이름을 내가 중얼거리자 그녀는 곧바로 내 궁금증을 해결해 준다.
"세레스티아. 이곳 생명의 요람을 수호하는 하이 엘프님이세요. 원로회의 수장을 맡고 계시죠."
어디서 들어본 건가 했더니 이 이름은 분명 이전에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우리들을 맞아준 엘프의 이름이다.
당시에도 원로회의 일원이었고, 수장이었는지 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역시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 엘프답게도 내 먼 기억속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남아있다.
"고맙군."
"고맙기는요. 제 궁금증도 그만큼 해소해 주실 거잖아요."
여전히 생글거리는 미소를 잃지 않으며 내게 대답하는 그녀의 눈동자에서 친절보다는 사적인 욕망이 더욱 엿보이고 있었지만 그리 불쾌한 느낌은 아니었던 만큼 넘어가기로 했다.
일단은 은인이었으니 말이다.
"... 하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 눈에 보이는 미래에 남게될 것은 고작.. 얻게될 마음속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덜어내는 것뿐이었다.
그녀가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구할 수 없었겠지.
"... 단순히 호기심에 우리를 구했다는 건 어떻게든 이해해 보지. 하지만 네가 사용한 그 마법.. 누구에게 배운 건지 물어봐도 되나?"
"음..?"
왜 그걸 물어보는지 모르겠다는 듯 귀끝을 들썩이며 눈을 깜빡여오는 그녀.
"전이 마법, 적어도 내가 알기로 이걸 사용할 줄 아는 사람은 한 명뿐이라서 말이야."
"그럼, 굳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되겠네요?"
".. 레베카."
정답! 이라고 하는 것처럼 소리 나지 않게 손뼉을 쳐오는 그녀.
반가운 이름을 들었다는 반응이다.
"스승님의 지인이신가 보네요?"
"..."
"왜 대답이 없으시죠? 혹시나 사이가 안좋으시다거나..?"
"....."
농담조로 들려온 말이 어울리지 않게 예리하다.
이어진 내 반응에 오히려 자신이 더 놀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인 그녀는 내게 한 가지를 당부해 온다.
"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지금은 사이가 좋은 걸로 해두는 편이 좋을 거예요. 그도 그럴게 그분은 엘프들의 은인이시니까요."
"... 레베카가..?"
전혀 들어본 적 없다.
이 엘프의 스승노릇을 했다는 것도,
그리고 엘프들의 은인이라는 것도.
"뭐어, 그래도 이 아이는 조금 힘들겠지만요."
"그건 또 무슨 의미지?"
"으흐음~ 마을에 도착하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예요."
관위에 엉거주춤하게 앉아 조용히 대화를 듣고있던 실비아를 들어 바닥에 내려주고 머리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준 이비는 슬슬 일어나 따라오라는 듯 굽히고 있던 허리를 폈다.
"그러고 보니, 수인들을 상대하는 데에 꽤 익숙해 보이던데."
고약한 향이 나는 가루들이 담긴 주머니들, 평소에 가지고 다닐만한 그런 물건은 분명 아니었다.
"네, 아무래도 그분들을 보호해드리고 있다 보니, 가끔은 서로 갈등이 빚어지거나 중재가 필요한 경우도 있거든요. 마침 가지고 있어서 다행이었죠."
수인들을 보호..? 갈등?
엘프들이...?
"알게 될 거라는 말과 관련이 있는 건가?"
"궁금한 게 아직 많은 모양이지만 어서 따라오세요. 바깥에 너무 오래 있었더니 조금 피곤하네요."
".. 그래."
마을에 도착하게 되면 알게 될거라 이거지..
여전히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듯한 소녀에게 나는 여태 손에 꾹 쥐고 있었던 그녀의 로브를 다시 씌워주고, 등을 약하게 떠밀어 주었다.
"..."
철그렁.
그 긴박한 와중에 배낭은 물론, 관까지 챙겨 준 것은 그녀의 여유라고 봐야 할까?
아니면 이 모든것들이 그저 정교하게 짜여진 연극인 걸까.
"어서 오세요~."
"..."
하지만, 일단 겉보기에는 정말로 그녀를 갈기갈기 찢어 죽이려 하던 그 놈들로부터 아슬아슬하게 도망쳐온 직후인데도 저 멀리서 태평하게 손을 흔들거리며 나와 소녀를 부르고 있는 저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아직 미심쩍은 부분들이 남아있었음에도 오히려 그럴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
"크아아아아아악...!!!"
꽝...!!!
우지끈...!!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찢어 죽여도 모자랄 귀쟁이에게 쏟아내야 했을 분노는 애꿎은 거목을 부러뜨리고 넘어지게 한다.
꾸구구구구구...
쿵...!!!
그 두껍고 단단한 거목이 묵직한 비명과 함께 넘어지며 숲 전체를 울리자 그제서야 조금은 화가 가라앉은 것처럼 지크프리트는 손톱을 집어넣었다.
닿았다고 생각한 순간 놈들은 사라져 버렸고, 그 직후에는신성한 기운에 이끌려 물살처럼 몰려들어온 기생당한 짐승들을 상대하느라 이제서야 잠시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발터, 추적은?"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갈 것처럼 으르렁대는 그에게 로브인은 천천히 고개를 젓는다.
"주변에 퍼진 악취 때문에 힘들어. 그리고 애초에 그건 공간에 간섭하는 마법이니, 냄새는 끊어져있을 게 분명해."
"젠장...!!!"
"엘프가 끼어들어 올 줄은 몰랐군. 이 주변에 마을이 있는 것도 아닐 텐데."
"크르르... 그놈, 마지막이 돼서야 제대로 된 전사의 눈빛을 보여주었건만!"
비록 원하지 않던 방향으로 흐지부지 되어버린 싸움이었지만 그 마지막 순간만큼은 자신도 피가 들끓었다.
놈은 자신의 능력만 믿고 무작정 달려드는 것이 아닌, 이성적인 판단 끝에 포기해야 할 것을 선택하고 자신의 몸을 내던진 것이다.
놈은 전사라기보다는 단순한 광인이었고, 싸움에 임하는 태도는 재미없기 그지없었지만 마지막 순간 놈은 전사의 눈빛을 자신에게 보여주었다.
"제길...!!"
하지만 아무리 아쉬워하고 분통을 터뜨려도 현재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다 잡은 목표물을 눈앞에서 놓쳤다.
누가 끼어들었고, 말았고를 떠나서 실패했다는 결과만이 남았다.
"어떻게 하겠나. 형제여."
"... 이곳에 죽치고 있어봐야 그 성가신 귀쟁이가 있으면 똑같은 수에 당해 주지는 않을 거다."
"그렇겠지."
"크륵.. 돌아간다. 꼴사납게 실패했지만 시키는 대로 한 번은 움직여 줬으니, 다음 지령 전까지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다."
재수없는 그놈의 당부와는 달리 인류배반자라는 이름에 비해 생각보다 싱거운 저항이었기에, 쌓아둔 피를 절반의 절반조차 쓰지 않았으니 오히려 잘 됐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번 싸움으로 놈을 언제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으니 다음 전투에서 확실하게 승패를 가리면 되는 정도의 일.
그렇다면 지금은..
"우리는 모두 너를 따르고 있다. 형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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