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 * *
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2)
"그래서, 냐한테 무슨 부탁을 하러 온거냥?"
"방금 또 나를 냐~ 라고 하셨어요."
"... 그런 적 없다냥."
건강미가 돋보이는 갈색 피부에 엷은 노랑이 언뜻 섞인 하얀 머리칼을 단발로 대충 정리해둔 수인들의 대표, 헹겔의 특이한 눈동자가 이비의 딴지를 능숙하게 넘기며 이쪽으로 향해온다.
한쪽은 검고, 한쪽은 하얀, 저 고양이 수인의 신비로운 눈동자는 외부인인 나를 경계하기는커녕 호기심이 담긴 시선을 보내오고 있다.
"아, 이쪽은 마을의 중요한 손님이세요."
".. 그러니까 그 중요한 손님을 왜 냐한테 데려왔냐는 거다냥."
나도 대답이 궁금한 그 질문에 이비는 적당히 둘러댈 이유라도 찾는 것처럼 말끝을 흐린다.
"으음.. 그러니까..."
".. 랑족 꼬맹이에 인간사제, 거기다 관까지 메고 있고.. 참 보기 드문 조합이다냥."
내가 입은 너덜너덜한 사제복과 소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흥미를 내비치는 그녀.
"에헤헤.. 사실 이 아이를 맡길 곳으로 이곳이 가장 먼저 떠올랐거든요."
헹겔의 시선이 내가 짊어진 관에서 소녀에게로 넘어가 멈춰 있는 사이, 고민 끝에 나오게 된 이비의 대답은 소녀의 거처를 구하기 위함이라 한다.
왜 굳이 세계수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내가 일행이라고까지 소개한 소녀의 거처를 구하러 온 것인지.
여기에는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다.
원로회는 내 도움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찬성했고, 이비에게 내 거처를 준비해 달라는 지시까지 내렸지만, 한 가지. 수인인 실비아가 엘프들의 구역에서 지내는 것만큼은 허락하지 않았다.
세레스티아는 자신들이 도움을 받게 된 입장임에도 일행인 소녀를 쫓아내는 듯한 처우를 하게 된 것에 난색을 표했지만, 서로 간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는 관계가 어렵사리 성립된 가운데 불필요한 소음을 만들어낼 수는 없었다.
경계 바깥의 크게 다를 것 없는 안전한 공간에서 수많은 동족들이 지내고 있는 만큼 굳이 엘프들의 사이에 소녀가 불편하게 남아있어야 할 필요도 없었고 말이다.
그럼에도 몹시 경우없는 상황이기는 하다.
수인들은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한다.
북대륙에서도, 스폴에서도, 바실리카에서도, 이곳 요정들의 마을에서도.. 수인을 바라보는 시선은 같은 수인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변함없이 차갑고 삐뚤어져 있기만 하다.
알고는 있다. 이건 분명 어딘가 잘못되어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집단 혐오의 희생양으로, 하나의 종족 자체가 삶의 가치와 조그마한 존엄조차 부정당하는 이런 일들이 아케라에서는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다.
그나마 이곳은 겉치레에 목을 매는 엘프들이 있는 만큼 적어도 다른 이의 눈이 있는 곳에서 잔인해지지 못하는 것이다.
난쟁이들의 땅에 가서는 난쟁이들의 규율을 따르라는 말도 있다니, 지금 당장은 요람 안에 남아 지낼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해야겠지.
"으겍? 잠깐, 꼬맹이를 맡긴다고 한 거냥?"
머릿속을 파고들어오는 독특한 비명에 문득 고개를 들자, 이비가 아무렇지도 않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게 보인다.
"네, 그런데요?"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마라냐! 남자라면 몰라도 꼬맹이는 절대로 싫다냥..!"
뭐, 이런 저런 까닭으로 내가 세계수의 문제를 해결하는 동안 실비아와는 잠시 떨어지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훌쩍, 이 아이가.. 에단, 이 아이 이름이 뭐였죠?"
"... 실비아."
"흑.. 헹겔 님에게는 실비아의 마음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요?"
".. 우는 연기가 형편 없다냥."
뻔히 보는 앞에서 내게 이름을 물어보더니 이제와서 공감이라도 하는 것처럼 우는 시늉을 한다.
혹시 이 엘프는..
다른 이들의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이러는 건 아닐까?
하지만 저게 연기라는 걸 알면서도 굳이 그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헹겔 또한 만만치 않다.
".. 에헤헤, 흠흠..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 앞에서 그렇게 단호하게 싫다고 말하면 안되죠. 분명 상처 입을 거라구요."
"흥, 냐.. 냔 모르는 일이다냥. 그리고 아이는 원래 강하게 키워야 하는 거다냥."
"아이를 키워보신 적도 없으시잖아요."
"적어도 냐는 그렇게 자랐다냥..!"
이비의 페이스에 이미 말려들어있던 헹겔은 상처를 받았을 거라는 그 말에 괜히 힐끔거리며 소녀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
정말 수인들의 대표가 맞는 걸까?
키만 하더라도 실비아와 크게 차이나지 않고, 누군가를 이끄는 이라고 하기에는 사람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그런 매력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데..
"... 괜찮아."
그러고 있던 사이, 누구보다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소녀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다지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처럼 표정 변화 없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괜찮다고 대답하는 소녀.
"..."
그리고 그 대답에 이비와 입씨름을 하다가 끌려오듯 소녀를 바라본 헹겔은 이내 예상치못한 반응을 보이고 나선다.
"너어.."
"...?"
서로 색이다른 그녀의 두 눈동자에서 동시에 불똥이 튄 듯한 착각이 든 것과 동시에, 눈 깜짝할 사이 있던 자리에서 사라진 헹겔은 어느새 소녀에게 팔을 뻗어 그 두 여린 어깨를 붙잡고 서 있었다.
.. 언제 여기까지?
"그건.. 아니다냥...!"
그 갑작스러운 외침에 소녀는 당연히 움찔했고, 내가 헹겔을 소녀에게서 떼어 놓으려 팔을 뻗자 어째서인지 이비가 내 손목을 붙잡아 세운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냐는 물음이 담긴 시선으로 그녀를 쳐다봤지만, 의미 모를 미소만 짓고 있을 뿐이다.
"어차피 여기 말고는 갈 곳도 없으면서 왜 괜찮다고 하는 거냥..!"
"아뇨~? 사실 아직 갈 곳은 많아요. 헹겔님."
휙.
"... 입 다물지 않으면 그 예쁜 머리카락을 전부 뽑아버리겠다냥."
"에헤, 예쁘다니 고마워요."
생글거리며 웃고 있는 이비를 아마 지금의 나와 비슷할 눈빛으로 한차례 째려본 헹겔은 소녀의 후드를 휙 벗겨낸다.
"내가 더 힘들면 된다는 식의 괜찮다는 말을 냐는 가장 싫어한다냥."
"..."
"그건 냐만 마음 편하게 포기하는 거다냥, 냔 그게 싫은 거다냐."
... 말버릇이 집중을 흐트러뜨리고는 있었지만 그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그런데.. 할 말이 저거였다면 굳이 놀라게할 필요는 없었지 않나.
그만한 일을 겪었으니 분명 심리적으로 위축되어 있을 텐데.
"... 아?"
예상대로 소녀는 자신의 앞에 선 고양이 수인의 눈조차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몹시 풀이 죽어있는 소녀의 표정을, 후드를 벗겨내고 나서야 보게된 헹겔은 곧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 이젠 슬슬 눈치를 보고 있다.
정말이지 중간이 없는 여자다.
"어.. 그러니까..."
"... 포기.. 는 안할거야."
하지만 헹겔이 그렇게까지 말해 주었기에 오히려 와닿은 무언가가 있었던 모양인지,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드디어 대답해 준다.
그리고 그 대답은 헹겔의 기대에 부응해주는 것이었기에, 열심히 눈치를 보던 그녀의 안색이 한결 편해져 그새 다시 당당해진 것이 보인다.
"그.. 그러니까, 청소든 빨래든 할 테니 여기서 재워달라는 말은 네가 해야 되는 거다냥. 냐는 저 이상한 엘프의 부탁은 들어줄 생각이 없으니까냥."
목숨에 대한 노골적인 위협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렇게 앞에서 목소리를 높혔으니.. 불안한 마음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법도 했지만, 몸을 조금 움츠러들었을 뿐 소녀는 헹겔의 말에 차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 뭐든.. 할게."
바로 그거다냥! 이라며 소녀의 어깨를 툭툭 치고 있는 헹겔은 아무리 봐도 처음부터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던 걸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슬슬 입이 간지러웠던지 경고를 무시하고 다시 한번 딴지를 걸어오는 이비.
"그냥 청소랑 빨래를 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건 아닌가요?"
"... 머리카락을 다 뽑아버리겠다냥..!"
"꺄아~"
장난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이 좁은 집안에서도 능숙하게 전이 마법을 전개하고 있는 이비와, 안그래도 지저분하던 집에 더 먼지를 날리며 무려 네 발로 날렵하게 몸을 내던지고 있는 수인들의.. 대표라는 인물.
나와 소녀는 잠시 그자리에 서서, 황당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 눈빛으로 그 둘을 바라보았다.
"얍~"
"비겁하다냥..!"
좁은 집안에서의 추격전은 전이에 익숙해진 헹겔이 거리를 점차 좁혀오자 이비가 끝내는 내 뒤로 숨어들었다가, 내 여러 의미가 담긴 시선을 느꼈는지 슬그머니 소녀의 등 뒤로 옮겨가 숨는 것으로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둘의 눈에 보이는 뛰어난 실력에 비해 그 행색과 이유가 몹시 초라한 추격전이 아닐 수 없었다.
"흐우으.. 아마 세계수를 고치러 온 모양인데, 그동안 꼬맹이는 내가 잘 맡고 있겠다냥."
"맞아요. 헹겔님이 귀여운 모습을 하고는 있지만 아이를 다섯은 낳아서 키워냈을 만큼 오래 사셨으니까요."
"너어.."
"아, 물론 그렇다고 이전에 아이를 키워보신 적은 없지만.. 분명 괜찮을 거예요."
쿵. 쿵. 쿵.
헹겔의 머리 위로 뾰족하게 솟은 귀가 뒤로 멀찍이 젖혀지고, 길고 유연해 보이는 하얀 꼬리가 위아래로 흔들리며 마룻바닥을 쿵쿵 때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가 고양이 수인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인내심이 슬슬 한계에 가까워졌다는 의미로 보인다.
그리고 그렇게 느낀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오늘은 여기까지 해야겠네요. 그럼 조만간 다시 찾아올게요~ 헹겔님."
"너는 오지 말라냥..!"
쿵!!
"..."
기세에 밀려 얼떨결에 밖으로 나오게 된 나는 문틀에 쌓인 먼지를 세게 털어내며 굳게 닫혀버린 문을 잠시 바라보았다.
여전히 약간의 근심은 있지만, 그래도 이 이상한 엘프의 장난을 잘도 받아주는 성격으로 보아 잠시 맡겨놓더라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보인다.
무엇보다도 같은 수인이었으니만큼지금같은 상황에서 나보다는 그녀와 함께 있는 편이 심리적으로 안정될지도 모르고,안그래도 얼마 전 모친을 떠나보냈으니 같은 여자이고 어른인 수인과 함께 있으면 그 빈자리가 어느정도 채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흠..
아무리 잘 쳐준다고 해도 인간으로 따지면 열여덟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으니 모친과 같은 느낌은 아니려나.
".. 후우."
그래도 소녀의 거처 문제까지 해결되고 나자, 적룡교의 손아귀에서 어떻게든 벗어나 목적지에 와 있다는 게 이제서야 실감이 난다.
그러고 보니.. 아직 묻지 않은 게 있었지.
".. 그래서, 나는 어디서 지내게 되는 거지?"
"어라? 제가 말을 안했었나요?"
".. 하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제 할 말만 하고 따라오라고만 한 주제에, 이래놓고 딱히 생각해 놓지 않았다고 말하기라도 한다면..
"그야 당연히 제 집에서죠."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