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53화 (53/137)

〈 53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 * *

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3)

소녀는 먼지가 부스스 떨어지고 있는 문을 앞에 두고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처럼 가만히 볼 수 없는 저 너머를 향해 서있었다.

"응..? 뭐냥, 꼬맹이?"

"....."

"...?"

".. 미안하다고, 말.. 못했어."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방금 전까지 느껴지던 그의 기척과 냄새는 곧 속이 울렁거리는 미묘한 뒤틀림과 함께 어느 순간 끊어져 사라져 버린다.

귀끝이 뾰족한아름다운 은발의요정님이 자신을 구해준 그 신비한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사라진 것이다.

... 미안하다고 하지 못했다.

주변이 온통 밝은 빛으로 차있던 그때, 결국 자신은 강하게 등을 떠미는 그의 손에 따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마지막 기회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공포스러운 존재의 말대로였다.

자신은 용기를 넘어선 오기를 쥐어짜 어렵사리 공포와 대면했지만, 그 이상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자신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정해져버린 고통스러운 죽음을 앞두고 이대로 정말 끝인 걸까 생각하던 그때, 그는 마지막 순간 간신히 자신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 주었다.

더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은 이곳에서 짐만 될 뿐이라는 걸 알았고,

이대로 도망쳐도, 도망치지 않아도 더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감에 그저..

두려웠다.

그렇기에 도망쳐야 했다.

그를 내버려 두고, 덜덜 떨리는 두 다리를 억지로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곧이어 뒤에서 들려온 파육음과, 짙게 터져 나오는 비릿한 피 냄새에 구역질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대로 눈앞의 어두운 숲속으로 달려들어간다고 해도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이 무서운 무력감은.. 안그래도 턱밑까지 차오른 숨통마저 틀어막아 왔다.

"..."

내가 있을 곳, 내가 할 수 있는 것.

무력한 자신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을 그것들은..

"꼬맹이..!"

"...!"

"왜 또 멍하니 있는거냥. 버리고 간 게 아니니까 안심해라냐."

닫힌 문 앞으로 자신보다 겨우 두 뼘 정도 키가 큰 수인 여성이 서로 색이 다른 신비한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

"그리고 꼬맹이는 미안하다고 말할 필요 없다냐. 사과하는 건 어른의 책임이니까냥."

거친 쇠 냄새가 나는 이 고양이 수인 여성은 수 언니와는 다르게 선뜻 다가가기에는 심장을 움츠러들게 하는 날카로운 기척을 은연중에 흘리고 있다.

그 공포스러운 존재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위험한 사람이라는 직감이 계속해서 본능을 건드려 오고 있었다.

"냐는 헹겔, 네 이름은?"

".. 실비아."

"응 실비아, 네 입으로 듣고 싶었다냥."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안그래도 좁은 오두막집의 한편을 차지하며 구석에 쌓여있던 짐더미를 바닥으로 거침없이 넘어뜨리기 시작했다.

쿠구국.. 쿵!

와장창!

콰창!

갑옷의 조각처럼 보이는 여러 다양한 형태의 쇳덩이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서로 부딪히면서 부서지는 듯한 요란한 소리를 낸다.

그리고 그것들이 쏟아져 내리자 모습을 드러낸 건 방금 전까지도 있는 줄 몰랐던 작은 침대 하나.

"여기서 자면 된다냥, 냐는 소파가 좋으니까냥."

"엣츄우.."

먼지 냄새와 고철더미에서 나는 날카롭고 비릿한 쇳내음에 코가 어질어질했던 소녀는 재채기를 하며 먼지 얼룩으로 가득한 침대 위를 바라본다.

그리고 헹겔 역시 잠을 자기에는 지나치게 지저분한 건가 싶었던지 말없이 코를 막고 침대 위를 똑같이 바라본다.

".. 으음, 그렇지. 첫 번째로 네가 해야 할 일은 청소다냐. 일단 이 고철 덩어리들 먼저 앞마당에 내두고, 돌아오는 길에는 앙리도 데려와라냥."

"... 앙..리?"

"내가 키우는 고양이다냐. 아마 장작더미 사이에 틀어박혀서 자고 있을 거다냥."

소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싶었지만, 헹겔의 표정에는 변함이 없다.

그녀가 잘못 말한 것도 아니라는 의미였다.

먹을 것에 이름까지 붙여서 키우고 있다니,

그것도... 같은..

"응..? 뭐냥? 장작더미도 앞마당에 있다냐."

소녀가 트라사에서 본 들고양이나 들개라고 해봤자 전부 식용으로 키워지는, 아니 보관되는 것들이었기에 헹겔의 키우고 있다는 말에 대해 이어지는 이해는 그녀의 원래 의도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필 같은 고양이를.. 그것도 앙리라고 이름까지 붙여두는 걸 단순히 그녀의 악취미라고 생각하게 된 소녀.

하지만 신세를 지고 있는 지금, 이를 티 낼 수는 없었다.

"... 응."

우선 눈앞에 보이는 가장 커다란 갑옷의 몸통 부분을 거뜬히 들어 올려 밖으로 가지고 나간 소녀는 열어둔 문 사이로 소파에 몸을 늘어뜨린 헹겔을 슬쩍 쳐다보고는, 이쪽을 보고 있지는 않는지를 재차 확인했다.

확인을 마치고 나서야 갑옷을 소리 나지 않게 내려놓고 소녀는 장작더미 쪽으로 향한다.

"... 앙리?"

헹겔에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고 생각하면서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고양이의 이름을 부르는 소녀.

분명 장작더미에..

아, 있다.

헹겔의 말대로 무너진 장작더미의 그 좁은 틈새에 용케 몸을 비집고 들어가 졸고 있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보인다.

특이하게도 꼭 신발을 신은 것처럼 두 뒷발만 하얀 털이 섞여있다.

고로롱.. 고롱...

고양이의 몸통이 작게 코를 골며 숨을 쉬는 것에 따라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을 아예 쪼그려 앉아 바라보는 소녀.

언제 잡아먹힐지도 모르고 이런 곳에서 느긋하게 잠들어 있는 그 모습이 왜인지 안쓰럽다고 느끼며,

첫날부터 터무니없는 오해를 해버리고만 소녀였다.

*

"..."

"아까부터 조용하시네요? 아, 저도 조용한 편을 더 좋아하기는 해요."

아니,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래로 더 내려가는 건가?"

"더 지하가 있다니 신기하죠? 여길 아는 사람은 정말 몇 명 없거든요."

그래, 그것 참 영광이다.

전이를 통해 다시 경계로 돌아온 그녀를 따라 세계수의 뒤편으로 돌아가자, 거대한 나무뿌리 사이로 숨겨진 듯 숨겨지지 않은 듯 자연스럽게 감추어져 있던 좁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이 성가신 엘프와 함께 현재 그 좁은 길목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고 보니,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아직 하지 않았던가?"

"그랬나요?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애초에 제가 더 빨리 나섰다면 당신이 그렇게 다칠 일도, 그 아이가 그렇게 두려워해야 할 필요도 없었을 테니까요."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다고 했지.

그렇다면 오히려 더더욱 그녀를 탓할 수 없다.

싸운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던 그 모습을 지켜봤다면야 내가 상대하고 있는 게 어떤 존재인지도 확인했을 테고, 그걸 보고도 그녀는 나와 소녀를 구하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의미이니 말이다.

"각자 입장이라는 게 있는 거니까."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저라고 해서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가만히 지켜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니까요."

".. 그래."

그리고 어째서인지 그렇게 대답한 이비는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고,

곧 좁은 통로가 끝나자 시야가 트이며 또 하나의 작은 요람처럼 느껴지는 널찍한 공동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자.. 도착했어요."

이 넓은 공간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 지하에는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호수.

"... 호수?"

천장으로 튀어나온 세계수의 두꺼운 나무 뿌리들 사이로 촘촘히 박힌 빛나는 수정들이 호수의 수면 위로 비치고..

맑은 호수 안쪽으로는 또 빛나는 작은 수정 조각들이 호수의 밑바닥에서 다시 한 번 반짝거리고 있어,

마치 그 옛날의..

별이 한가득 떠있는 맑은 날의 밤하늘이 지하에 펼쳐진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 모습은 상당히 아름다웠기에 나조차 잠시 멈춰서서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을 정도였다.

"정말 아름다운 곳이죠?"

"..."

그 말에 문득 정신을 차리고, 이비가 앞서 걸어가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자 호숫가에는 낮은 돌담과 함께 그녀의 집으로 보이는 아담한 나무집 한 채가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는 예상 외의 인물이 나와 이비를 기다리고 있다.

"..."

색이 옅은 금발, 흰빛의 하늘하늘하고 반투명한 옷감이 여러 겹으로 정갈하게 몸을 감싸고 있어, 마치 몸 주변으로 은은하게 빛이 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 저 차림새가 몹시 어울리는 아름다운 여성.

그건 다름아닌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던 원로회의 수장, 하이엘프 세레스티아였다.

"어서 오세요. 헹겔 님의 거처에 다녀오신 건가요?"

"셀렌 님~!"

와락!

"앗, 이브..?"

"에헤헤.."

내게 먼저 인사해온 세레스티아에게 자신의 순서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몸을 날려 그녀의 품속에 안겨드는 이비.

나는 이전에 그녀가 했던 그 경우없는 말을 눈앞에서 그대로 실천하는 이비에게 당황할 뻔했지만, 세레스티아는 그녀가 이렇게 안겨든 것이 익숙한 것처럼 품에 안긴 그녀의 은빛 머리칼을 상냥하게 쓰다듬어주고 있다.

원로회의에서 보았던 것과는 또 다르게 느껴지는 분위기.

그 빛나는 단상 위에서 고고하고 기품 있던 모습은..

아니, 지금 그 고귀함이 전부 사라졌다는 의미는 아니었고 지금도 충분히 느껴지고는 있지만 형식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 그녀의 분위기가 대충 어떻게 다른지를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제서야 이 어딘가 익숙한 분위기에 먼 과거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그녀와 처음 만난 그 때의 기억.

정말이지 마음을 놓이게 하던 그녀의 환영과 배웅,

그런데 내 기억에는 분명..

그때는 저정도로 가슴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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