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용사일행 출신 사제의 우울-54화 (54/137)

〈 54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 * *

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4)

"실례했어요 에단님. 혹시나 이브가 또 다른 무례를 저지르지는 않았나요?"

".. 음."

막상 물으니 그녀가 내게 저지른 성가신 행동들 중에서 무례라고까지 할만한 건 딱히 없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성실하게도 경계를 지키고 있던 엘프들이나, 꽤나 상성이 잘 맞던 고양이 수인에게라면 모르겠지만. 이비가내게계속말을 거는 게 불편하기는 해도 무례라고는 할 수는 없다.

"... 아닙니다."

철없는 엘프를 품에 안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어오는 그녀의 연녹빛 눈동자를 그저 바라보고 있다보면 잡념은 사라지고 감탄만 남는다.

"이브가 여러분을 데려온 만큼 일단은 홀로 책임을 져야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 이해합니다."

대화 중에 이렇게 다른 생각을 하는 게 실례라는 건 알지만..

"이해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생긋.

... 요정이다.

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녀의 등 뒤로 펼쳐진 아름답고 신비한 호수의 정경이 그녀라는 존재를 더욱 빛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저 백색 가운을 걸친 한결같지 못한 엘프보다도 훨씬 더 요정이라는 말에 어울린다는 생각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들고 마는 것이다.

홀리는 듯한 기분에 머리를 식히려고는 했지만,

"아.. 그리고 저는 따로 사과를 드리고 싶어서 에단 님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이전의 결정에 대해서 아무래도 너무 죄송해서.."

잠시 이비를 떼어놓은 다음, 정말 미안하다는 자신의 진심을 몸짓과 눈짓에 정성스럽게 담아 사과해오는 저 모습을 보자,

"..."

그녀의 부드러운 분위기에 휩쓸릴 것만 같아 움찔거리는 손등을 털고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나섰다.

애초에 단점이랄 게 없는 데다,

... 우리에게 한 번 큰 도움을 준 적이 있는 그녀에게 평소와 같은 얕은 수로 스스로를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아닙니다. 당신이 사과할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사과는 제가 받아야할 것도 아니고요."

"... 네, 그렇죠."

사과는 내가 아닌, 소녀에게 하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녀 역시 이를 인정한다.

하지만 엘프 원로회의 수장인 그녀가 공개적으로 수인 소녀에게 사과할 수 없는 입장과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에, 강요할 생각 역시 없다.

애초에 엘프가 다른 종족에게 따로사과를 해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놀랄 일이다.

"그러고보니, 마침 저도 당신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네, 얼마든지 물어보셔도 괜찮아요."

언제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냐는 것처럼 눈빛을 반짝여 오는 세레스티아.

아무래도 눈앞의 그녀가 세계수의 축복을 특히나 더 타고난 고귀한 하이엘프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있다 보니, 이렇게 감정을 스스럼없이 얼굴에 드러내오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물을 기회가 된다면 묻고 싶은 게 한 가지 있었다.

이런 인적 드문 장소에 그녀가 홀로 내려온 지금, 이후로 마땅한 기회가 올것 같지도 않다.

"제게 사용한 그 마법에 대해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밝은 빛으로 가득한 회장에서, 그녀의 눈동자가 진하게 물들어 주변의 그 어느 잡스러운 조명들보다도 선명하게 빛났을 때,감히 거짓을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머릿속에서부터 강하게 울려오던 그것은 분명.. 용의 저주가 내게 계금을 강제하는 것과 그 느낌이 몹시 닮아있었다.

"아... 그건.."

만약 그녀의 마법이 이 계금을 억누를 수 있다면.. 나는,

".. 정말 죄송해요. 그건 알려드릴 수 없어요. 그저.. 저희 지혜의 줄기 원로회가 관리하고 있는 금서고와 관련이 있다고 밖에는..."

"그렇군요."

사과의 성의를 표현하는 것을 겸하여 내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잠시 기뻐한듯 보였지만, 결국 면목이 없다며 고개를 숙이고 만 세레스티아.

고개를 숙일 때에 자신의 하늘하늘한 옷 앞섬에 손을 늘 올려놓던 것조차도 미처 신경쓰지 못했는지 내가 잠시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게 만든다.

... 애초에 이쪽이 무리한 요구를 한 셈이고 그녀가 이에 대해 재차 사과하거나 고개숙일 필요는 없을 텐데도..

이비에게 이미한 번말하려 했던 이야기지만, 이런 행동 하나 하나를 보면 정말이지 피곤하게 살아갈 성격이라는 감상이다.

"괜찮습니다, 무엇보다.. 원로회의 수장인 당신이 외부인에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을 주변에서 그리 좋게 보지는 않을 겁니다."

"그건.. 그렇겠네요. 감사해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올리고 나서야 나도 다시 고개를 돌려 그녀와 시선을 맞출 수 있었고, 우선은 마저 묻기로 했다.

"그렇다면, 애초에 사용하는 데에도 제약이 있겠군요."

"네, 원로회의에 한정하여 과반수의 입회 아래, 또한 원로회에서 인정된 특수한 상황에서만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어요."

이번 경우에는 적룡교와 외부인. 그야특수한 상황이다.

"... 궁금증은 풀렸습니다. 그러니 이제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만약 가능하다면,

그녀에게 그 마법을 내게 다시 한번 사용해 달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

물론 정작 그때가 되면 나는 벙어리라도 된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당장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에 오히려 그랬을지 모른다며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그녀의 할 수 없다는 대답에 대해 실망과 동시에 안도하고 있는 내가 어렴풋이 보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셀렌 님, 기왕 내려오셨는데 차라도 한 잔 마시고 가요. 네?"

내게 더 용건이 없는 것으로 보였던지, 자신의 차례를 여태 기다렸다는 듯 세레스티아에게 웃는 얼굴을 들이미는 이비.

하지만 그녀의 제안을 받은 세레스티아의 표정은 그리 편하지 않다.

그리고 그건, 딱히 그녀의 제안이 달갑지 않아서라는 이유는 아닌 듯 보인다.

"아.. 실망시켜서 미안해요 이브, 아직 깨어나지 못한 분들이 많아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한가로이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아직도요? ...우, 그럼 어쩔 수 없죠.. 네, 알겠어요."

입으로는 알겠다고 하면서도 잔뜩 실망한 표정을 짓고 서운한 티를 내고 있는 이브에게 세레스티아는 생긋 웃어주며 다음을 기약한다.

"여유가 생기면 꼭 잊지말고 내려 올게요. 그러니까... 앗..?"

"셀렌 님~!"

그리고 그 미소에 못이겨 실망한 연기를 그만두고 다시 안겨든 이비.

와락!

아쉬움에 한 번 더 그녀를 기습적으로 껴안고 그 상냥한 품속에 얼굴을 파묻은 이비는, 부끄러움에 내 눈치를 보던 세레스티아의 그 고운 얼굴이 조금씩 달아오르기 시작했을 즈음에나 그녀를 놓아주었다.

"그.. 그럼, 충분히 안정을 취하신 후에 지혜의 줄기에서 다시 뵙도록 할 게요."

이번에는 제대로 앞섬을 가리고 정중하게 인사를 마치고, 출구 쪽으로 사뿐거리는 발걸음을 옮기는 세레스티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얼마 안가 들려온 이비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어느새 나무집의 문앞까지 먼저 걸어가 있는 이비.

분명 그녀라면 아쉬움에 못이겨 세레스티아가 떠나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저기까지 가서 내게 손짓하고 있다.

외부인의 시선 앞에서도 곧바로 안겨들 정도로 호감을 주체하지 못했던 주제에..

포기가 빠른 건지 뭔지.. 종잡을 수가 없다.

"..."

"사양하실 필요는 없으니, 어서 들어오세요."

필요이상으로 환영해오는 그녀의 손짓을 잠시 무시하기로 하고, 다 무너진 낮은 돌담과 작은 나무집을 밖에서 한 번 눈에 담았다.

특별히 집히는 이유랄 것은 없지만 이 나무집은.. 주변과 그리 잘 어울리지 않고 어색한 느낌이다.

단순히 호수 주변에 다른 집이라고는 하나 없이 덩그러니 홀로 놓여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더 말하자면..

그래.. 마치 이비를 보고 있는 것같기도 하다.

"에헤, 혹시 부끄러운 거예요?"

.. 애초에 호수가 이 깊이 모를 지하에 있는 것부터가 이상한가?

"흠.."

일단, 이 엘프가 터무니 없는 오해로 시답잖은 농담을 또 던져오기 전에 들어가야겠다.

굳이 할 필요없는 쓸데없는 생각들은 이제 한쪽으로 밀어두도록 하고.

저벅 저벅.

발을 들이게 된 이비의 거처는 방이 따로 없는 개방적인 구조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녀 혼자 살기에는 조금 넓은 것 같다는 게 첫 감상이었다.

어린 아이가 딸린, 적어도 셋이나 넷 정도되는 가족이 살 법한 이 아담한 나무집의 내부는 안그래도 깊은 지하의 호수 근처라 그런지 안쪽에 머물러 있는 공기가 서늘하다.

"혼자 살고 있는 건가?"

"..."

".. 이비?"

"아? 네 맞아요. 혼자 살고 있어요."

수인족 여성인 헹겔이 혼자 살고 있는 집에도 방금 막 무리 없이 들렀다 온 차였지만,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이비와 방도 따로 없는 이곳에서 함께 지내야 한다는 생각에 자연스레 거부감이 든다.

가장 큰 것을 꼽자면 불편함.

이미 지금도 어색한 공기가 이 공간을 점차 메워가고 있는 것만 같다.

"역시 나는 그냥 밖에서..."

"아뇨, 그럴 수는 없죠. 멋대로 구한 건 저니까요. 떠날 때까지는 제대로 책임을 질 거예요."

"..."

"으흐음... 어디보자.."

다행히 여성 혼자 사는 곳이라기에는 집안 곳곳의 매달아진 끈에 걸려 건조되고 있는 다양한 약초들의 냄새라던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책장 앞으로 한가득 쌓여있는 두꺼운 서적들 덕분에라도 그런 느낌들이 다소 덜어지기는 하는데..

"에단 씨는.. 음, 여기서 자도록 해요. 셀렌 님을 위해 특별히 준비된 자리지만 어쩔 수 없죠."

"..."

"아..! 아니면 제 침대에서 잘래요? 그럼 정~말 어쩔 수 없이 제가 대신 여기에서.. 셀렌 님의... 에헤.."

철그럭, 철걱... 쿵.

자신의 침대를 사용하라는 제안을 다큰 성인 여성에게 직접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 제안만큼은 분명히 거절하겠다는 의미로 사슬을 풀어 관을 소리내어 내려놓으니 괜히 신경쓰이게 아쉽다는듯 에헤헤 웃더니 자신의 침대 옆에 있는 책상으로 걸어간다.

스륵... 스윽..

"으음? 어라..?"

등불이 비추는 아래.

얇은 유리병들과 각종 약초, 그리고 정체모를 가루들이 두꺼운 서적들 사이에 빼곡히 늘어져 있는 책상의 의자 앞에서, 하얀 가운을 벗어 걸어놓던 그녀는 주머니에서 손에 잡힌 얇은 유리 판을 책상 위에 올려놓으려다가 멈칫한다.

"... 어라라..?"

그러고는 이쪽을 다시 바라본다.

정확히는 내 사제복을,

피가 잔뜩 묻어있었지만 원로회의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정화를 끝마쳐 두었기에 베어지고 찢어진 흔적 말고는 남아있지 않다.

워낙 정신이 없었던 터라 수인 아이들이 코를 부여잡고 내게서 도망친 다음에나 내가 어떤 꼴이었는지를 인지하게 되어서 말이다.

"... 으흐으음.."

... 저 유리 판,이비가 자신의 손가락에 묻어난 내 피를 묻혀 두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어째서인지 지금은 피가 마른 것이라기에는 유독 색이 검은 가루 같은 것들이 먼지처럼 흩어져있을 뿐이다.

"으흐음... 제 호기심을 자극하려는 모양인데 오늘의 저는 더 이상 성실할 수 없다구요?"

아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고.

나도 알고있는 바가 조금도 없는 일이다.

"그러니 뭐, 이만 자도록 해요. 그렇게나 싸우고 난 뒤에 엉망진창이던 상처들까지 치유했으니.. 피로는 느끼는 거겠죠?"

".. 뭐, 그렇지."

그녀의 말대로,내색하고 싶지 않았기에 여태 티내지 않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배로 무거워지는 수면욕이 눈꺼풀 바로 위에 자리하고 저릿거리고 있다.

그런 기색을 눈치챈 건지, 아니면 그녀 본인도 피곤했을 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비는 소리나게 침대에 걸터앉아 나를 바라보며 한 손을 슬쩍 들어올렸다.

"식사는 일어나면 준비해 드릴게요."

탁.

내게 거절할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처럼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집안 이곳 저곳을 밝히고 있던 등불들이 일제히 꺼져버렸고, 이대로 계속 어색하게 서 있을 수도 없을 것같다.

"...."

창밖으로부터 은은하게 비쳐들어오는 빛으로 적당히 어둡고 고요한 그녀의 집 안.

드득. 스으윽.

그녀가 있는 방향을 한 번 쳐다보았다가 최대한 그녀로부터 멀찍이 관을 밀어두고, 굳이 딱딱하고 차가운 덮개 위를 손으로 짚어 내 옆에 있다는 것을 재차 확인한 다음에야 나도 외투를 침대 맡에 걸어두고 몸을 누일 수 있었다.

워낙 상황들이 쉴새없이 이어졌기에 긴장의 끈을 단단히 잡고 있었을 뿐이지 몹시 피곤한 상태라는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눈가가 뻑뻑하다.

이번에는 운좋게 도망칠 수 있었다지만..

다시 그들과 조우하게 된다면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할 거라는 불길한 확신이 든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

그리고..

.. 바실리카.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은 많았지만 일단 폭신한 침대에 몸을 누이자 그나마 남아있던 긴장도 빠르게 풀려가고,

안그래도 이 침대에서는 왜인지 상당히 부드럽고 기분 좋은 냄새가 나서... 누운지 얼마나 됐다고 내 눈꺼풀을 아래로 잡아당기고 있다.

분명 어디선가..

그것도 아주 최근에 맡아본 것 같은...

"... 저기.."

"..?"

점차 흐릿해져가는 머릿속으로 이 향기의 정체를 추측하고 있는데, 문득 어둠 속에서 이비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도 뭔가 할 말이 남은 걸까.

좁은 집 안에, 가깝지는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거리에 놓인 침대에 누워있으니 어둠속에서 서로의 작은 숨소리와 침대보가 부스럭 대는 소리조차 선명하게 들려오고 있다.

그렇기에 솔직히 지금도 충분히 불편하고 어색하니 그만 말을 걸어줬으면 하는 자그마한 바람이 있다.

빨리 눈을 감고 잠시라도 좋으니 지금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도 있었고 말이다.

그래도 꼭 필요한 이야기라면 어쩔 수 없겠지...

철없고, 어딘가 이상한 엘프라는 생각이 들기는 해도, 일단은 은인인데다 아무런 생각없이 행동하지는 않는다는 걸 옆에서 보면서 느꼈으니 말이다.

그래, 정말 반드시 필요한 이야기라면..

"혹시.. 자고 있는데 덮치지는 않을 거죠?"

...?

"..."

"저 이래 보여도 엄청 연약하거든요.."

"... 하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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