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9. 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
* * *
9.호숫가의 돌담 아래에서(6)
"일어났어요?"
"..."
달그락.
달각.
식탁으로 쓰는 작은 테이블 위로 나무 그릇에 담긴 음식들을 옮기고 있던 이비가 건넨 말이었다.
당장 어제 그런 일들이 있었는데도, 어색하거나 부끄러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탁.
그녀가 그릇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튕기자 내 주변으로만 아직 꺼져있던 등불들이 마저 켜지며 방 안을 환하게 밝힌다.
시야가 밝아지니 조금 남아있던 잠기운도 슬그머니 사라지고. 침대에서 일어나 찌뿌둥한 몸을 펴내자 약간의 어지러움이, 그리고 개운함이 뒤이어 찾아왔다.
꿈도 꾸지 않고 깊게 잠들었다.
어제의 그 일들이 오히려 꿈이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다양하지는 않지만 먹을만할 거예요."
"... 직접 만든 건가?"
"아무래도 대신 요리해 주는 마법은 만들기 힘들더라고요."
느긋하고 여유로운, 한껏 나른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비.
그녀가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대해주니 차라리 다행이다. 덕분에 나도 더 눈치보지 않고 그녀가 당겨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직접 만든 음식까지 대접받게 될 줄은 몰랐지만,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 당장은 배가 고팠기에 그녀의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약 또다시 그런 뒤숭숭한 악몽을 꾸고 일어났다면 이 허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느낄 수는 없었겠지.
"그리고 일단은 귀한 손님이시니 성의껏 대접해야죠."
샐러드에 사용된 채소에는 하나같이 윤기가 흐르고, 구워낸 버섯 위로는 처음 보는 향신료가 흩뿌려져 있었으며, 수프 옆에는 갓 구워낸 따끈따끈한 빵 한 조각까지 걸쳐져 있다.
비록 지하였지만, 세계수 덕분에 이들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식생활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세계수에 지금 문제가 생겼으니 그야 마을의 명운이 걸려있다 할 수밖에.
"악몽은 더 안꾼 것 같네요?"
".. 그래, 대체 얼마 만인지."
마지막으로 숙면을 취한 게 대체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도 않는다.
"자주 그러는 편이에요?"
"뭐.."
아,
"..."
성실하게 질문에 대답해 줄 이유는 없었을 텐데, 정말 오랜만에 머릿속에 찾아온 맑고 개운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대답하고 있었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입을 다무는 것도 이상하다.
"그냥.. 익숙해졌지."
"흐음~ 그건 안타깝네요."
"..."
대화를 끝낼 생각으로 짧게 대답한 것이었지만 안타깝다는 의미심장한 그 말에 내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그녀는 싱긋 웃는 얼굴로 스푼을 들어 올렸을 뿐이다.
"맛있게 먹어요."
"..."
더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듯한 그 말에 오기가 생기려했지만, 지금은 허기가 조금 더 우선이었던 만큼 나역시 그녀를 따라 스푼을 들어 올리는 데에 그쳤다.
달그락..
달각.
그녀와 한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하게 된 식사는 조용했지만 그리 불편하지 않았고,
특별한 조리법은 없었지만 사용된 신선한 재료만으로도 입맛을 만족시켜주는 음식 덕분에 그녀의 그 말에 대한 의문은 금방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다 마쳤을 즈음이었다.
"다 먹었나요?"
"..."
먼저 스푼을 내려놓고 가만히 앉아있던 그녀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에 걸어둔 하얀 의사 가운을 걸쳐 입는다.
까닥까닥.
어딘가 나가려는 건가 생각했더니 현관 밖에서 아직 닫지 않은 문틈 사이로 꺼림칙한 미소와 함께 나를 부르는 손짓이 보인다.
"... 에헤헤."
이 부름에 과연 답해야 할지 아니면 무시하는 편이 나을지 잠깐 고민했지만, 만족스러운 식사에 대한 대가는 치러야 했다.
성의껏 식사를 대접한 것도 단순히 이를 위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 좀 볼래요?"
내가 따라나오고 나서야 현관문을 닫은 이비는 문 옆에 걸려있던 등불을 손에 옮겨들고 돌담 안쪽의 작은 마당을 비추었다.
그러자 어제는 보지 못한 작은 화분들에 식물들이 담겨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것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면, 하나같이 줄기나 잎의 이곳저곳이 검게 변해 시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에단 씨가 깨어나기 전까지 이 검은 가루에 대해서 여러모로 알아 봤어요."
검은 가루라면, 내 피가 변질되어 굳어있던 걸 말하는 걸 거다.
그런데 알아보다니?
"... 그래서..?"
"이 식물은.. 여기요, 이 일대에 가득 퍼진 세계수의 기운을 받아들여 강인하고 건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죠."
쉽게 말해 억센 잡초라는 표본 하나를 그녀는 허리를 숙여 조심스레 들어올렸고, 이를 내게 자세히 보여준다.
"하지만 이 조그마한 검은 입자 하나를 접촉시키자 나타난 괴사 부위는 입자의 약 천 배에 달하는 크기, 게다가 하루가 채 지나지도 않아서 완전히 시들어 버렸어요. 보다시피 모든 표본들은 동일한 결과로 도출되었고요."
그녀는 얇은 유리판 위로 어제에 비해 조금도 줄지 않은 검은 가루들을 보여주며 상기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검게 굳어버린 에단 씨의 피는 정말 지독한 독기를 품고 있어서, 한 방울 정도의 양으로도 건장한 수인 남성을 단번에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을 정도예요."
".. 그 말을 지금 믿으라고?"
눈앞으로 증거가 있음에도 그녀의 말을 당장은 믿기 힘들다.
여태껏 그런 일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옷에 피가 말라붙어도 저렇게 타고남은 검댕처럼 까맣게 변색된 것을 나는 한 번도 보지 못했다.
단순히 저렇게 굳어지기 전에 정화로 씻어냈기에 지나쳤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녀의 말만큼이나 치명적인 독성을 발휘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분명 기억 속에 있었을 것이다.
"스승님도 용의 저주에 대해서는 몇 번 말씀해 주셨지만. 이정도 일 줄은 몰랐어요. 정말 놀라워요."
이비는 이에 그치지 않고 반대편에 놓여있던 멀쩡한 표본의 이파리 위로 남아있던 검은 가루의 무려 절반 정도를 털어낸다.
그녀의 손가락 끝에 머무는 미세한 바람이 그녀의 의지에 따라 정교하게 움직였고,그 세밀한 마나 운용능력에 감탄할 겨를도 없이 눈앞의 표본에 집중했다.
입자 한 개씩을 사용했다는 이전과는그녀가 지금 쏟아내고 있는 검은 가루들은비교도 할 수 없는 양이다.
파슥.. 파스슥...
그렇다고 해봐야 겨우 피 한 방울이나 될까 싶은 양이었지만 표본은 고통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줄기가 요동쳤고, 이내 누군가 그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 것처럼 몸 전체가 까맣게 변해, 비슷한 검은 가루가 되어 형체를 허물어뜨리고 만다.
파스스스슥...
믿을 수밖에 없도록 당장 눈앞에서 벌어진 기현상에 내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기도 전에, 보기 드물게 탐구욕으로 고조된 눈빛을 보이는 이비가 내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다.
초목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알려진 엘프가 괴사한 식물 표본을 두고 밝게 웃고 있는 모습은 그녀가 걸치고 있는 하얀 가운보다도 어색하다.
이 엘프는 대체 얼마나 내 관념을 뒤흔들어 놓을 셈인지.
"여러 관찰 결과를 토대로 봤을 때 무생물에는 반응하지 않고 오직 살아있는 것에만 반응하는 것 같아요."
"잠깐, 그럼 네 손가락은."
"좋은 지적이에요. 그때는 제가 무서운 줄도 모르고 만졌었죠."
얇고 매끈한 손가락을 들어보이며 오싹하다는 듯이 말하고는 있지만 여전히 즐거워 보인다.
"그래도 이로써 가능한 가설을 떠올리자면, 그때는 용의 저주와 정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은총을 지닌 에단 씨와 근접해 있었기 때문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제가 혈액을 채취해 밀봉시키고 일정거리 이상 떨어진 다음에야 이렇게 검게 굳어져서 독성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거예요."
내가 원하지 않아도 몸 안에서 흘러넘치는 이 은총 덕분에 피에 새겨진 저주의 독기가 억제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아직도 멀쩡한 것이 이해는 된다.
하지만 그 경우에 레베카는 어떻게 되는 거지?
무한히 생성되는 은총 같은 건 가지고 있지 않은 그녀는 어떻게..
아니, 그리고 무엇보다 셀틱에서는 독기가 몰려든 내 오른손의 피를 마시고도 오히려 소녀는 깨어났었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피가 보여준 치명적인 독성은 방해가 될 뿐이다.
"무생물에는 반응하지 않았다고 했었지."
"네, 아직까지는요."
"그럼... 죽어가는 것에는? 아니면.. 이미 죽은 생물에게는 반응하나?"
내 질문에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겨 얕게 앓는 소리를 내더니, 이내 눈빛을 반짝이며 대답해 온다.
"으흐음.. 그건 흥미로운 접근인걸요? 독기가 너무 강해서 의미는 없을지도 모르겠지만 맹독으로 병을 제거한 사례를 들어 본 적은 있어요."
"..."
평소에는 진중한 모습은 커녕 자신이 흥미를 가진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는 뭐든 지루하다는 듯이 행동하던 그녀가, 어째서인지 미지의 것을 탐구하는 것에 대해서 만큼은 기대와 노골적인 욕망을 숨기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내게는 상당히 생소하게 느껴져온다.
이전에도 계속 그녀가 일관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고는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같다.
내 굳어있는 표정이 보일 텐데도 이젠 아예 애원하는 투로 매달려 오는 이비.
"음.. 저기~ 에단 씨?"
"..."
그 의도적인 접근에 나는 망설이지 않고 뒷걸음질 쳤지만, 그녀는 더 눈치를 볼 생각도 없는지 대놓고 내게 달려들어 손목을 붙잡는다.
"피.. 좀 얻을 수 있을까요...? 에헤헤."
"..."
"딱 몇 방울이면 되니까요. 네?"
내 손목을 기분 나쁘게 조물락 거리고 있는 이비를 밀쳐냈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제대로 알아두는 편이 향후의 안전에도 유익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 정도 독기라면 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더 어울려줄 이유가 없겠다고 생각했지만 무기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말에는 잠시 멈칫하고 말았다.
.. 그녀의 말대로다.
이 정도의 독기는 그 자체로도 치명적이니 당연히 무기로 사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건 이에 대한 확실한 탐구를 통해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칼자루를 만들어야만 제대로 된 무기로 가공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일전의 전투에서 재생 능력자를 상대로 내 무력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던 만큼, 그녀가 입에 담은 무기라는 단어는 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내가 멈칫한 그 짧은 사이를 놓치지 않고 손목을 다시 붙잡아온 이비.
이번에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지 못했다.
"..."
하지만 역시 용의 저주가 흐르고 있는 피를 달라는 부탁은 아무래도 껄끄럽다.
호기심과 궁금증을 해소해 주는 것이 이 성가신 은인이 바라는 보답임을 느끼고는 있지만, 그 위험성을 본의 아니게 확인하게 된 직후라서 말이다.
"으으.. 좋아요, 그럼 저도 에단 씨가 원하는 걸 뭐든 한 가지 들어드릴게요."
".. 딱히 너에게 바라는 건 없는데."
내 입이 움직일 기색을 보이지 않자 마치 큰 결심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던 그녀는 내 즉답에 잠깐 멍하니 서있다가 괜히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다.
왜?
"... 아.. 방금 그 말에는 조금 상처받았어요."
"무슨 소리를.."
하지만 역시 연기였는지 곧 기운을 차리고 내 몸의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한 그녀는 일전의 전투에서 베어지고 찢어져 너덜거리는 내 옷자락을 집어왔다.
"그렇지, 이 사제복. 수선하지 않아도 괜찮겠어요? 당시에야 급하게 불려간 거였다고는 하지만 계속 이런 차림이라면 셀렌 님 이외에 깐깐한 원로들은 무례하다고 생각할 거예요."
".. 내 부정적인 평가라면 여기에서 하나 둘 더해진다고 해도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상관이 없다뇨? 그건 아니죠. 그건 당신을 데려온 저와, 최종적으로 요람에서 머무르는 것을 허락해준 셀렌 님에게까지 그 평가가 영향을 미칠 거라는 의미에요."
"..."
내 말문이 막히자 드디어 제대로 된 이유를 찾았다는 것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온다.
그 모습에 괜히 더 부정하고 싶어졌지만 반박하기 힘든 건 사실이다.
"하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지금의 내 입장은 이해하고 있다. 내 무신경한 행동으로 인해 피해를 입게되는 것은 나나, 일단은 명목상으로 일행인 소녀 이외에도 분명 있었다.
이비가 말한 것도 사실이고, 바실리카의 대표로 엘프의 마을에 방문하게 된 거나 다름없는 내가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는 없다.
수가 사제복을 수선해 준지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이렇게 넝마를 만들어놓고 말았다는 사실에 한숨이 나온다.
"에헤헤.. 바느질에도 나름 자신이 있거든요. 얼마 안 걸릴 테니까 벗어요. 어서요."
".. 한가지만 약속해 준다면."
"뭐든지요. 그러니 그다음은.. 부탁해요?"
뭐든지라는 말을 계속 함부로 입에 담는 이 은발의 엘프에게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알려주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내 몸의 혈관 아래로 저주 말고도 타인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한 독기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 만큼, 우선 이것이 괜히 알려져 문제가 되지 않도록 그녀가 입을 무겁게 해주기를 약속하는 게 우선이었다.
* * *